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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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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옆에 달린 사이드카를 애용하는 미와 경부(警部)는 고등계(高等係)의 실무책임자다.

“내 집 오신 손님이니 응대야 안 하겠소마는….”

파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피어오르다 살짝 흔들리며 흐트러진다. 담배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300년쯤 된다. 임진(壬辰)년과 정유(丁酉)년의 왜란(倭亂)으로 일본군대가 7년 동안 전국을 휩쓸고 나간 다음 정묘(丁卯)년과 병자(丙子)년의 호란(胡亂)으로 전국이 다시 쑥대밭이 되기 전, 그 사이 기간에 전래된 문물이다. 담뱃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에 파이프와 궐련(卷煙)이 들어서고 있다. 궐련은 새 시대의 대중적 담배 풍속으로 자리 잡으며 담배 소비량을 한껏 올려놓았다. 특히 젊은이와 여자에게 궐련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나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라. 생명이 붙어 있으니 사람이라 할까, 두문불출하여 집 바깥사람과 상종을 끊은 지가 이미….”

그러면서 노인은 을, 병, 정, 무, (乙 丙 丁 戊)…하며 육갑(六甲)을 꼽는다.



“옳지, 벌써 25년이나 되었소. 죽은 사람을 지금에 찾아와서 무슨 들을 말이 있겠소. 아직 말은 하오만 ‘미랭시(未冷屍)’이지요. 식지 않은 송장과 다름이 있겠소. 을사년 이후 말도 않고 듣지도 않으려 하였더니 요새는 귀도 멀고 눈도 어둡게 되었소. 아주 송장이 되려는가 보오. 입이 아직 성해 말은 하오. 그러나 정말로 귀에 담아듣지는 마소.”

망국 재상이 무슨 면목으로

노인은 등받침대(案席)에 등을 젖히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허허…내 말을 그리 듣고 싶소. 글쎄 망국 재상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소.”

망국(亡國) 두 글자는 총독부가 기피하는 용어의 하나다. 기사에서 검열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두 글자가 삭제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편집국에서는 신문 제작 단계에서 공란으로 둔다. 10년간 총독부 당국과의 밀고 당김 끝에 정착된 관습의 하나다. 망국 재상은 신문지에 OO 재상으로 표기되어 독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독립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등, 그렇게 약조된 단어가 많다.

“그때 일을 아는 선비들은 다 알지오. 하도 소원이라면 묻는 말 몇 마디나 대답하리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 체결에 이르는 열흘간. 11월9일부터 18일까지의 긴박했던 상황의 전말을 겪은바대로 술회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황제 아래 국정 최고책임자였다고는 하지만 지금 와서 지난 일을 들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말은 꺼냈고 오기는 왔지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한림 스스로 아니 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 동아(東亞)의 풍운(風雲)이 주마등같이 변하는 듯하더니, 광무(光武) 9년이지…. 장곡천(長谷川) 대장이 오며 일본 군사가 들락거리는 게, 벌써 짐작은 차리었소.”

장곡천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04년 9월 제2대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으로 부임해 만 4년 넘게 조선을 무력 압박하였다. 역대 최장수 조선군사령관을 거쳐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이 되어 조선을 강압 통치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총독에서 물러났다.

하세가와는 한규설보다 여섯 살 위다. 한규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공직에 임용되었고 하세가와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를 거쳐 군인의 길을 걸었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던 해부터 한규설은 관직을 시작했다. 2년 뒤 하세가와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의 내전을 끝내는 세이난(西南)전쟁에 보병 1연대장으로 종군했다. 이 길로 그는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육군대령으로 승승장구한다. 한규설이 왕의 친병(親兵)을 통솔하는 금군별장(禁軍別將)과 수도 치안을 맡은 우포도대장을 역임하는 동안 하세가와는 프랑스에 파견돼 프랑스 육군의 교리와 편제, 지휘 통솔에 관한 선진 운영기법을 실습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육군소장이 된 하세가와는 청일전쟁에 보병 12여단장으로 참전했다. 요동(遼東)반도의 여순(旅順) 공격에 공을 세워 남작(男爵)이 된다. 이로부터 10년간 한규설이 조정의 여러 요직을 거치는 동안 하세가와는 주요 사단장을 전전하며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승전과 함께 육군대장에 오른다. 그리고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일본국 주차군사령부 육군 대장 남작 장곡천호도는 우리나라에 다시 왔는데 공로가 매우 많아 친애하는 뜻을 표해야 될 것이니 특별히 이화장(李花章)을 하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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