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악당, 그 뜨거운 매혹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1-09-21 17: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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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션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멋진 악당이다.
    •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 허장강이 딸을 지키려는 장모 황정순의 이마를 도끼로 내리찍을 때, 황해가 독립군 남궁원을 가혹하게 고문할 때 비로소 ‘김약국의 딸들’과‘쇠사슬을 끊어라’가 살아 숨 쉬지 않던가.
    • 스크린 속에서 소름 끼치는 악의를 발산하던, 그래서 한국 액션영화의 지평을 한층 넓힌 매혹적인 악역들을 추억한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배우 황해가 열연한 영화 ‘독짓는 늙은이’의 한 장면.

    1990년대 초. 영화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는 이미 충무로가 영화인의 거리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해 있던 때였다. 새벽 6시면 촬영을 나가는 스태프들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충무로 국밥집에 모여들어 후루룩 단숨에 국밥을 비우고 골목마다 매연을 뿜어내며 서 있는 촬영버스에 올라타던 분주한 풍경이나, 충무로의 다방마다 영화배우와 감독·작가가 북적이고 해가 지면 수많은 영화인이 충무로의 돼지갈비집과 골뱅이집에 모여 술을 먹고 왁자하게 떠들던 그런 풍경이 사라진 시기였다. 내가 일하는 영화사는 충무로가 아니라 안국동에 있었고, 새로운 세대들이 만든 영화사도 종로나 강남의 신사동 쪽에 하나 둘 자리 잡으며 충무로를 떠나던 시기였다.

    추운 겨울날 충무로에 있는 편집실에 심부름을 갔던 나는 극동빌딩 뒤의 골목을 걷다가 순대국밥집에서 낮술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았다. 아! 그들은 한국 액션영화에 단골로 출연해 기꺼이 주인공에게 한 방씩 맞아주던, 바로 악역 배우들이었다. 수많은 영화에서 항상 만나는 배우들이지만 이름도 몰랐던 그들을 대낮에 술집 앞을 지나다 본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뻔뻔하게 해댔건만, 옹기종기 앉아 술을 먹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은 대단히 쓸쓸해 보였다. 1970년대처럼 액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새로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왕년의 액션 단역배우들을 더 이상 찾지 않던 그 무렵. 허름한 술집에 대낮부터 앉아서 왕년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을 그들은 ‘영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퇴색한 충무로 거리와 비슷한 쇠락의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액션영화 속의 악당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며 프랭크 시내트라를 괴롭혀야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완성되고, 리 반 클립이 독사 같은 눈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노려보며 괴롭혀야만 ‘젊은 사자들’이 완성된다. 리 마빈이 과묵한 스팬서 트레이시의 침대에 흙 묻은 부츠를 신고 누워 협박을 해야 ‘블랙록에서의 더러운 날’이 완성된다. 그들의 사악함이 설득력을 얻어야 우리는 주인공에게 더욱더 감정이입된다. 세계 영화 속에 빛나는 악역들의 별자리가 있듯이 한국 액션영화에도 소름끼치는 악의를 발산해 꿈속까지 나타나 나의 어린 시절을 괴롭혔던 매혹적인 악역들이 있었다.

    “조센징, 빠가야롯!”

    내가 혼자 극장을 드나들던 1970년대 중반, 한국 액션영화에서 맨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악역은 배수천이다. 당시 나온 액션영화는 거의 모두 태권도 영화였고, 단골 악역은 배수천이었다. 그는 영화 속 악당 무리 중 언제나 가장 극악무도한 ‘악당 중의 악당’으로 출연하곤 했다. 그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빌리 쟝’(김선경 감독, 1974)이라는 태권도 영화였는데, 영화를 다보고 난 후 주인공의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대머리에 히틀러 콧수염을 한 흉물스러운 배수천의 모습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았었다.



    1975년. 추석 특선프로로 동네 극장에서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가 상영됐다. 일본군 장교로 등장한 배수천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를 손으로 끄집어내 꼬리를 파닥이며 몸부림치는 모양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는 무장해제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맨주먹 맨다리 태권도를 사용해 대일본제국에 반항하는 구 한국군 병사들에 대한 증오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배수천이 눈동자 아래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상대방을 쏘아보면 한 마리 독사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살결은 왜 그렇게 하얀지. 그가 ‘훈도시’ 하나만 달랑 걸치고 터럭 하나 없는 뽀얀 맨살을 드러낸 채 “조센징. 빠가야롯!”을 외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미안하지만 무섭기보다는 좀 민망하고 웃겼다.

    1970년대 중반 태권도 영화가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한국 액션영화 속의 마지막 단골 악역이던 배수천의 영화는 너무 내용이 뻔하고 선악 대립만을 강요해 흉물스러운 모습만 기억에 남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배수천 이전, 19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속의 악역 중 멋있는 악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문오장이다. 문오장은 간첩단의 두목, 조총련의 악질 간부, 일본군으로 나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을 도맡아 했다. 이만희 감독의 ‘일본 해적’(1972)에서 일본 해적 부두목으로 등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비록 해적이지만, 강하고 멋진 사나이다. 그가 모시는 두목과 동료들은 조선 해안에 침입해 강간과 노략질을 일삼지만, 문오장은 강한 상대를 찾아 칼부림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에 목숨을 건 검객인 셈이다. 문오장은 두목이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막아서며 항명한다. 분노한 두목은 그에게 할복을 명하고 문오장은 두목의 명령이니 따르겠다며 서슴없이 자신의 배를 가른다. 배를 가르고 죽어가는 문오장의 눈에 서글픔이 서린다. 시대와 두목을 잘못 만나 자신의 재능이 헛되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다.

    설득력 있는 악의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 전문 연기자로 유명했던 배우 오지명.

    오지명도 빼놓으면 섭섭한 악역이다. 문오장과 비슷하게 1960년대 중반 등장해 1970년대 중반까지 온갖 악역을 도맡아 했는데, 이원세 감독의 ‘석양에 떠나라’(1973)에서 그는 하이에나 같은 악역을 해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명의 사나이가 산등성이에 서서 여명이 밝아오는 공장지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지명과 1970년대 단골 악역 중 하나인 최성이다. 두 사람은 어제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범죄를 벌이려 코를 벌름거리며 근대화 산업으로 돈이 돌기 시작한 시멘트 공업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 사악한 두 마리의 하이에나는 개과천선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옛 동료 신일룡을 찾는다. 협박해 돈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아침에 문을 연 국밥집에 들어간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 세숫대야를 놓고 머리를 감던 여주인의 하얀 목덜미와 허벅지를 보고 성욕이 동한 오지명과 최성은 거침없이 뻔뻔하게 강간을 한다. 신일룡의 집 거실에 들어간 오지명은 신일룡이 이뤄낸 안락한 가정을 질투하는 한편, 신일룡의 행복을 산산조각 낼 비루한 생각들을 떠올린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독사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눈에 보이는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파괴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오지명의 악의는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그가 멋진 연기를 펼친 또 다른 영화는 장동휘가 킬러로 출연하는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다. 장동휘가 우익 인사를 암살하러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뻔뻔스럽게 침입해 장동휘의 어린 딸을 인질로 삼아 장동휘가 변심하지 못하게 하는 좌익 하수인으로 출연한 오지명은 어린 소녀 전영선과 마주 앉아 늑대와 소녀의 동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악한 늑대가 어린 소녀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더러운 궁리를 하는 역을 멋지게 해낸다.

    오지명과 문오장, 최성은 한국 액션영화의 2세대 악역들이다. 1세대 악역, 장동휘·박노식·허장강·황해·독고성이 나이가 들어 중후한 멋을 갖추면서 악역보다는 성격 있는 주인공 쪽으로 옮겨가자 그 빈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독고성. 그는 주로 조연으로 출연했고, 장동휘·박노식처럼 파워풀한 에너지로 악의를 발산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늘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영화 속에서 진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장동휘 또는 박노식 같은 주인공의 깡패조직과 겨루는 상대방 깡패조직의 두목으로 나와 비열한 음모와 술수를 쓰는 몇 장면만 보이고는 사라져버리는 작은 역으로 기억된다. 그의 악역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웨스턴 ‘황야의 7인’(존 스터지스 감독, 1960)을 불법으로 리메이크한 ‘오인의 건달들’(1971)이다.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장동휘의 깡패 조직에 대항하는 다섯 명의 깡패 중 주인공 최무룡과 함께 리더 격 깡패 역을 맡은 독고성은 ‘황야의 7인’에서 리더 격이었던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매퀸 중 율 브리너에 가까운, 조용하지만 사려 깊은 깡패로 나온다. 연기의 섬세한 결을 중시하는 최무룡의 버디 파트너로 독고성은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복수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최무룡 주위를 맴돌며 조금은 뻔뻔스럽고 조금은 교활한 깡패연기를 해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그가 사실은 형사였고 장동휘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한 언더커버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좀 재미없어지기는 하지만, 연기력만은 발군이다. 자신을 과장되게 밀어붙여 혼자만 튀려는 한국 액션영화계의 고질적인 나쁜 연기를 독고성은 조용한 연기로 가볍게 비웃어버린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한국 액션영화 악역 중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허장강, 황해, 장동휘, 박노식이다. 장동휘는 1950~60년대 그가 했던 수많은 악역 연기를 뛰어넘는 가장 멋진 악역 연기를 박노식 감독의 영화 ‘광녀’(1975)에서 보여줬다. 박노식을 고문하는 일본 특무대의 앞잡이 조선인 역인데, 병 때문인지 살이 빠져 홀쭉한 얼굴을 하고 사이가 벌어진 이빨을 드러낸 채 사악하게 웃으며 박노식을 협박하는 그 악의가 대단했다. 좀 더 나와 더 사악한 연기를 해줬으면 했지만 그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나오고 사라졌다. 좀 더 비중이 있었더라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역 반열에 올랐을 텐데 아쉽다.

    1세대 악역 스타들

    1975년 9월21일. 아마도 일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영화배우들이 팬들을 위해 축구 대회를 열었는데, 선수로 뛰던 허장강이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나는 배우 허장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는데, 그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악역배우였다는 해설이 곁들여졌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 영화 속 최고의 악역배우는 허장강이라고,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고 말았다.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몇 해 뒤 TV에서 방영된 ‘대지옥’(1973)을 보고서였다. 극악무도한 악당 허장강이 지옥으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는 이야기였는데, 지옥에서 겪는 온갖 고초 때문인지 그는 불쌍해 보였고, 허장강을 괴롭히는 지옥의 악귀들이 오히려 영화 속 악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을 보았다. 영화 속에서 방자로 출연한 허장강은 악역 전문 배우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재미있는 감초 조역이었다. 주인공 김진규 최은희보다 허장강과 도금봉이 나오는 장면이 더 재미있었다. 한국 영화에서 감초처럼 등장해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조연들의 계보 중 그가 최고이자,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장강의 진면모를 보지 못했던 어릴 적 내 생각일 뿐, 허장강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악역 전문 배우였다. 물론 그의 연기 영역이 악역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탈한 중년 서민 연기와 노인 연기가 인상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허장강 하면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악역이 오직 그만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악당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허장강.

    나는 한국 액션영화 속의 악역들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는 배우는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뻔뻔스럽고 능청스러운 악당 허장강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키에 이를 부드득 갈아대며 상대방을 어둠 속에서 노려보는 히스테리컬한 악당, 황해다. 두 악역 배우가 한 여인을 두고 다투다 파멸하는 영화가 있다.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의 딸들’(1963)이다. 김약국의 셋째딸 최지희는 매우 분방한 여자다. 시집가기 전에 이미 머슴인 황해와 섹스를 즐긴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 황정순은 머슴 황해를 쫓아내고, 더 이상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허장강에게 최지희를 시집보낸다. 쫓겨나는 머슴 황해. 그는 말이 없다. 눈알이 빠질 정도로 세상을 노려본다. 그리고 돌아선다. 머슴 신분이라는 열등감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성욕, 그리고 배신감. 그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이를 앙다문다.

    허장강 vs 황해

    황해는 황정순과 김약국 집안 모두를 증오한다. 그는 반드시 복수하러 돌아올 것이다. 최지희가 시집간 허장강은 아편 중독자에 날건달. 게다가 성불구자다. 최지희의 과거를 알고 그녀의 성욕을 충족해 주지 못하는 허장강은 폭군이 되어버린다. 최지희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허장강의 분노는 점점 끓어오르고 마침내 터져버린다. 시커먼 도끼를 들고 발광하며 최지희를 죽이려다 그를 막아서는 황정순의 이마에 도끼를 내리치는 허장강. 최지희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황해. 그는 작은 키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최지희를 찾아내 자기 품에 안는다. 열등감과 배신감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무서운 집념을 황해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김약국의 딸들’은 내가 성인이 돼 허장강과 황해 두 배우를 만난 첫 영화였다. 인상적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황토 먼지가 휘날리는 만주 벌판. 저 멀리서 말을 탄 사나이가 다가온다. 사나이는 호피 무늬 재킷에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어디 좋은 건수가 없나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가 바로 허장강이 연기한 허달건이다. 허장강이 주막에 들어선다. 술집 안에는 요염하게 생긴 여자가 난로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비비면서 여자 앞에 앉으며 던지는 허장강의 첫 번째 수작. “한잔 따라” 첫마디가 반말이다. 반응이 없는 여자. 허장강, 실눈을 뜨고 여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 그녀가 주막집 여자가 아니라 마차를 기다리는 손님이었음을 눈치 채고는 “실례했소”라 사과하고는 자기가 직접 차를 따라 마시며 “쳇, 좀 따라주면 안 되나?”며 구시렁거리자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알고 보니 요염한 여자는 예전에 알던 술집 마담이었고, 허장강이 눈웃음 살살 치며 수작을 거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만주 어느 도시의 마담은 싫지 않은 눈치다. 허장강이 “난 여자에게 관심 없어” 하고는 여자의 관심을 사기 위해 2단계 작전에 들어서는데 여자는 “여자보다는 밀정 일에 더 관심 있죠?”라 한다. 자신의 정체를 빤히 다 알고 있는 여자와 뭔가 잘되어 가는데 주막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지프를 몰고 손에 쇠사슬이 감긴 사내가 등장한다. 가죽재킷을 입은 험상궂은 사내는 여자에게 눈길과 관심을 절대 안 주고 쇠사슬 끊는 일과 펑크 난 타이어 고칠 일만 신경 쓰는데, 술집 마담은 허장강보다 그 사내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왜 아니겠는가? 가죽재킷의 사나이는 바로 장동휘인 걸. 허장강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다. 뭐 세상사 그런 거다. 허장강은 슬그머니 물러나 “난 여자는 관심 없고, 오직 하나 밀정 일만 관심 있다”며 씁쓸함을 지우려 하지만, 이미 그의 폼은 다 망가져버렸다. 여자에게 다가가 먼저 수작을 걸지만 장동휘에게 번번이 여자를 빼앗기고, 그토록 찾아 헤매는 황금불상도 결국 일본군 장교 황해와 남궁원에게 빼앗기니, 악당이긴 하지만 측은하기도 하고 뻔뻔하기도 한, 미워할 수 없는 그리운 악당이 바로 이만희 감독의 만주 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의 허장강이다.

    언젠가 허장강을 기억하는 인터뷰에서 돈을 요구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허장강의 연기를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보통 연기자들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얼굴 가까이 대고 “돈”이라고 한다. 허장강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허리에 갖다 대고 배를 불쑥 내밀고 “돈”이란 제스처를 했다고 한다. 허장강의 악역 연기가 다른 수많은 악역 배우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유머다. 그는 어떤 악역을 하더라도 뻔뻔함과 능청스러움을 기본 캐릭터로 깔고 그 위에 작품에 따라 강약을 조절했다. 배우 허장강에게 매혹된 감독 이만희는 필름 원본과 프린트가 모두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영화지만 허장강을 위한 영화 ‘사기한 미스터 허’(1967)까지 만들었다니 그에게 매혹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가자. 허장강은 독립군 남궁원을 속여 일본군사령부로 붙잡아 간다. 밧줄에 꽁꽁 묶여 일본군에게 끌려가던 남궁원이 허장강 앞을 지나다 멈춰서며 “나도 담배 하나 주라” 하자, 허장강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이 방금 불을 붙인 담배를 남궁원 입에 물려준다. 남궁원이 일본군사령부를 바라보며 “많이 아프겠지?” 한다. 사령부 지하실에서 남궁원을 고문하려 벼르고 있는 황해의 매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허장강은 웃으며 “많이 아플 거야. 난 아직 맞아본 적이 없지만” 한다. 허장강이란 악당이 매력적인 지점은 아무리 날고 기고 속이고 해봐야 이 영화에 등장하는 황해라는 더 큰 악당 앞에 서면 생쥐 꼴이라는 것이다. 조선인 밀정 허장강을 부려먹고 “조선인들은 멍청해”를 입에 달고 살며 고문이 주특기인 일본군 장교 황해가 고문실에 있다. 남궁원을 쇠사슬에 매달아놓고 황해는 일단 때리기부터 한다. 남궁원이 “보자마자 때리냐? 이름도 안 물어보냐?” 하자 황해는 “다 알고 있어” 하고는 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문을 하는 악당 황해. 그는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겨울 내복만 입고 집무를 보는 이상한 일본군 장교다. 황해는 이 영화에서 잔인한 고문 기술자부터 허장강과 장동휘, 남궁원의 흉계에 넘어가 포로가 된 뒤 비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되기까지 획획 캐릭터를 변신시킨다. 게다가 자신의 계획이 안 맞아떨어지자 작은 키로 방방 뜨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은 유년기로 퇴행한 소년의 모습처럼 보인다. ‘쇠사슬을 끊어라’는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악당들만 등장해 흥청망청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도시의 뒷골목 깡패들이 쓸법한 뻔뻔한 욕과 대사를 쏟아낸 아주 매력적인 영화다. 동시에 대표적인 악역 허장강과 황해의 악역 연기가 왜 특별하고 뛰어난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편의 영화다.

    악역 배우의 깊게 팬 주름

    황해는 1960년대 초 많이 만들어진 범죄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범죄 영화들은 항상 연기력이 풍부한 악당 주인공을 원한다. 황해가 출연한 수많은 범죄 영화가 모두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황해의 아들 전영록이 어린 시절 보고 지금도 잊지 못한다는 범죄 영화 한편이 있다. ‘창살 없는 감옥’(강범구 감독, 1963). 6·25전쟁이 일어난 날 6월25일 새벽의 서울. 형사는 범죄자를 잡기 일보 직전이다. 그를 잡으려는 순간 전쟁이 터지고, 당황한 형사의 손아귀에서 범죄자는 달아난다. 범죄자는 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하고 형사는 악마적인 집념으로 범죄자의 뒤를 따라 자원입대해 추적한다. 둘은 숙명적으로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형사가 부상을 당한다. 범죄자는 형사를 죽이고 달아날까 아니면 그를 구할까를 고민한다. 죄의식에 휩싸이고, 형사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달아나며 두려움에 떠는 주인공 역을 황해가 해냈다.

    영화 ‘마부’(강대진 감독, 1961)에서 황해가 연기한 싸움꾼 둘째아들도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에게 항상 다가오는 불운을 저주하는 황해는 어둠 속에 숨어 아버지 김승호와 형제들을 노려보며 입을 앙다물고 이를 부득부득 간다. 황해에게 이때 붙여진 별명이 있다. 한국의 제임스 케그니. 두 배우 모두 작은 키에 항상 열등감에 휩싸여 세상을 노려보는 역할을 훌륭하게 했다. 황해는 입을 앙다물고 세상을 노려보는 사나이였다.

    좋은 악역 배우들은 그들의 사생활에서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며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배우 리 반 클립은 악역을 하되 언제나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아이를 쏘는 장면은 절대 안 한다는 것. 감독들은 그를 존중해 아이를 쏘는 장면은 대역을 써서 촬영했다고 한다. 나는 영화인으로 허장강과 황해의 아들들과 촬영을 했고,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악역 배우였던 아버지는 사생활에서 항상 엄격하게 스스로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수긍이 간다. 그런 엄격함으로 경계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악역 배우로서 자존심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배우들은 나이를 먹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면서 품격을 갖춘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 학사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 및 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


    황해는 말년에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생을 살아온 정직하고 관용 있는 인물을 깊이 있게 연기한다. 나는 영화를 보며 황해의 주름살 사이에 낀 탄가루를 보고 그의 영화 인생 전체를 존경했다. 허장강의 ‘명동잔혹사’(변장호 감독, 1972) 라스트 신도 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내레이터로 등장한 그는 깡패들이 의리 없는 싸움 끝에 모두 죽는 잔혹한 결말이 벌어지자 고아 소년의 눈을 가리며 “보지마라 이 잔혹한 명동을 떠나자”라고 한다. 두 눈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눈을 감는 허장강. 일생을 깡패 소굴 명동에서 바텐더로 살며 그들에게 당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던 그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고 내뱉은 대사였다. 좋은 악역 배우들이 영화 속이라는 다른 세상에서 악당으로 살면서 그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찰한 고뇌와 그 깊이는 그들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로 드러난다. 허장강과 황해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는 그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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