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정성을 다하는 요리사처럼

  •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2011-11-22 1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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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을 다하는 요리사처럼
    나에겐 자랑하고픈 능력이 있다. 그건 바로, 좋은 식당과 찻집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물론 먹어보고 나서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잘난 척하는 이유는, 그 집의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그것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이 닫혀있는 휴일이나 심야라도 상관없다. 문 밖에 서서 온 신경을 집중하고 가게를 쏘아보고 있으면 답이 온다. 이 집은 ‘믿어도 되겠구나’ 또는 ‘아니다’와 같은.

    이때 초집중하며 써버리는 정신적 에너지는 무척 고밀도요, 고강도다. 마치 촬영 현장에서 한 컷 한 컷을 찍을 때 들이는 열정이나 긴장감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식당 감별에 심혈을 기울이냐?”고들 핀잔을 준다. 무릇, 좋은 음식이 건강한 사회를 낳고, 인류의 후손들에게 건강한 유전자를 전달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은 건강한 지구와 인류를 만드는 최전방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은…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에 ‘the Towering Inferno’(한글 제목 ‘타워링’)라는 영화를 단체관람한 후 배우 폴 뉴먼(Paul Newman)에 홀려서 영화와 연애하기 시작했고, 중3이 되던 첫날, 나와 생일이 같은 하길종 감독님의 부고를 접하고 영화감독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전까지 내 생의 첫 장래 희망은 기자였고, 만 14세 때 영화감독으로 바뀐 이후로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요리사다. 20대에는 건축가였고, 30대에는 기상천문학자였으나, 나이 들어가면서 먹는 것의 소중함과 즐거움에 더욱 빠져버린 후에는 단연코 요리사가 1등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사라고 해 직업 요리인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정갈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가족을 먹이는 일반인도 포함되어 있다.



    울 엄마는 요리 솜씨가 좋으시다. 하지만 메뉴는 다양하지 못하다. 평범한 시골 아낙네들이 구사하는 종류와 그들의 구수한 손맛에 가까운데 우리집 음식에 대해 내가 제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에서 된장찌개 한번이라도 끓여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조미료를 안 쓰면 요리에 들이는 시간과 정성이 배로 늘어난다. 그만큼 조미료를 쓰면 요리하는 사람으로선 많은 게 편해진다. 하지만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은 대체적으로 평균 정도의 맛을 지닐 뿐 깊은 맛도, 담백함도 갖지 못하며, 먹은 후에는 찝찝한 갈증을 초래하기도 한다. 더 위험한 건, 이런 조미료에 입맛이 길들고 나면,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음식을 먹을 때 뭔가 심심하고 맛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조미료가 몸에 나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여기서 접어두겠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며, 혹자들은 알고 있어도 끊기가 힘들어서 진실을 외면하고자 하기에.

    난 식당을 고를 때 화려한 간판은 선호하지 않는다. 음식 사진들이 붙어 있는 곳도 마찬가지다. 대개는 자신들이 만든 음식 사진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구해온 사진일 때가 많다. 또한 메뉴가 육해공(陸海空)인 경우도 신뢰도가 떨어진다. 저 많은 메뉴를 소화한다는 건 분명 깊이가 없을 거라는 불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전국을 휩쓸고 있는 프랜차이즈 점도 회피 대상이다. 본사에서 냉동상태로 온 음식과 재료를 데우고 조리해서 내놓기에 따듯한 손맛이 약하다. 즉, 조리가 아니라 조립에 가깝다.

    자극과 재미보다 정성과 감동에 길들어야

    오래되고 낡아도 주인의 마음과 자부심이 서린 간판을 보면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이 온다. 그런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배가 포만 상태일지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단출한 메뉴 한두 가지에 투박하고 촌스러워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입니다. 어쩔 수 없지만요’라고 하는 숨은 자긍심과 멋을 보는 듯해 반갑다. 이런 겸손한 인상의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식탁과 의자와 주인 얼굴의 주름살이 서로 잘 맞는 화음을 이루며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이런 가게들일수록 음식 값도 싸다. 주인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맛난 음식을 먹고 나오면 이 가게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발걸음이 이내 무거워진다. 비싼 집은 맛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집이 너무나 많다.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집은 세상의 보물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식당들을 가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맛이 너무 없어서. 퓨전이란 명분으로 위장한 모호한 생김새의 요리, 그런 요리일수록 진한 소스가 쫙 뿌려져 있다. 재료의 신선함에 자신이 없고, 간을 예리하게 맞추지 못한 음식일수록 소스에 의존한다. 우리 때보다 훨씬 잘 먹고 자란 요즘 젊은이들이기에 우리보다 입맛도 더 예민하고 맛난 음식을 가려낼 줄 알았는데 어째 이런 음식에 만족하는지 이해가 어려웠다. 하지만 답은 오히려 단순했다. 수험 공부에 바빠서 엄마 손 음식보다는 외식이나 패스트푸드에 길들었기 때문이란다.

    영양가 있는 음식일수록 맛이 간사하지 못하듯이 정서에 좋은 영화도 오락성이 떨어지기 일쑤다. 투자사도 배급사도 관객이 많이 몰릴 영화만 선택하고, 관객들은 거기에 화답하듯 그런 영화들만 찾는다. 그런 중에 ‘우리나라 영화는 죄다 오락물이야, 보고 나면 남는 게 없어’라는 볼멘소리도 나오지만 그 소리는 이내 묻혀버린다.

    언젠가부터 캠코더가 가정마다 보급되고, 초등학생도 촬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컴퓨터로 간단한 편집도 가능해져서 관심과 성의만 있으면 짧더라도 자기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학생들이 그전에 영화 감상법을 배울 수 있을런가? 좋은 영화를 선별하고,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다른 이에게 추천하는 안목을 갖추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며 이것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이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마치,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고 좋은 음식을 가려내는 입맛을 훈련받지 않은 아이들이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걱정처럼. 어쩜 그들은 보기에만 화려하고 영양가는 신경 쓰지 않는 음식을 만들면서 그러한 결함을 깨닫지도 못하는 건 아닐까? 더욱이 이 사회가 그걸 부추기는 건 아닐까?

    “좋은 요리사 같은 감독이고 싶다”

    난 요리사와 영화감독이 많이 닮았다고 본다. 좋은 요리사는 새벽 일찍 일어나 신선한 재료를 구하느라 발품을 팔고, 누가 보지 않아도 천천히 조심조심 요리를 한다. 조미료 한 번 치면 쉽게 끝날 것을 오래도록 우리고 정성을 들인다. 이유는, 먹는 이들을 자기 몸처럼 여기고 아껴서다. 나는 이런 요리사를 닮고 싶다. 정성을 다하는 감독이고 싶다.

    사족이지만, 난 한때 요리사의 아내를 꿈꿨었다. 내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하는 남자라면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들었으며 평생 존경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먹는 즐거움을 세상의 최고 낙으로 여기지만 불행히도 내 요리 솜씨는 바닥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만 먹게 해주면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해도 행복해하는 종자다. 요리사의 아내가 되어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며, 또한 음식을 나르며, 그이의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손님들을 보는 게 꿈이었다.

    정성을 다하는 요리사처럼
    李廷香

    1964년 서울 출생

    1987년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1988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2002년 제39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시나리오상 등 다수 수상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집으로’(2002), ‘오늘’(2011) 각본 및 연출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영화로 인해 내 삶이 많이 행복했으므로 그 누군가에게도 내 영화로 행복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처럼, 맛난 음식을 먹을 때 제일 행복하므로, 누군가를 음식으로 행복하게 해줌에 요리 솜씨 없는 내가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다면 그건 설거지와 음식 나르기가 아닐까?

    그런데 요리사들은 집에서 절대 요리를 하지 않는단다. 그들 또한 요리 잘하는 아내를 원한다는 것. 나는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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