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
오랜 기간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스페인은 게르만 일족인 서고트족(族)의 남하로 한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 이슬람 군대가 처음 스페인 땅에 발을 디디면서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킨다.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걸쳐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후 기독교 세력에 의한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재정복(레콩키스타) 시도가 이어진다. 부부 관계가 된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과 아라곤 왕국의 태자 페르난도에 의해 1492년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레콩키스타가 완성된다. 같은 해 여왕 이사벨의 지원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스페인 황금시대를 열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들의 다섯 아이를 포르투갈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영국 등으로 보내 결혼시킴으로써 유럽 왕실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사벨(1504년)에 이어 페르난도(1516년)가 죽자 손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1516년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탄생이다.
‘비운의 왕’ 카를로스 2세
그런데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서는 마지막 스페인 왕이 되는 카를로스 2세(1661~1700, 재위 기간 1665~1700)가 문제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35년의 짧지 않은 재위 기간을 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비운의 왕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병약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러 심각한 증상을 보였던 그에 대해 후세의 학자들은 말단비대증과 선천성 매독, 그리고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결혼 풍습 때문에 조상의 정신질환 인자가 더욱 강화돼 유전된 결과로 분석한다. 이 때문에 그의 생애는 제대로 된 삶이었다기보다는 오랜 유아 기간을 거쳐 바로 병적인 조로 상태로 들어가면서 생을 마감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개인적인 문제에 겹쳐 그를 정치적으로 더욱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가 불과 만 세 살을 넘긴 1665년 부친 펠리페 4세가 사망한 것이었다. 펠리페 4세는 두 번의 결혼으로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정작 그가 사망했을 때는 심신이 매우 허약한 카를로스 2세만 생존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된 그의 초기 집권 10년은 어머니 마리아(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딸)가 섭정을 하기도 했지만 집권 내내 그가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기는 애초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후사가 없었다.
어쩌면 한 개인의 불행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의 배경이 장차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라는, 당시 유럽뿐 아니라 신대륙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 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세력균형 놓고 벌인 치열한 신경전
결국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왕실과 이웃 강대국들은 카를로스 2세 생전에 이미 그의 후계자 문제에 첨예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으로서는 본국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이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 지금의 벨기에 지역, 필리핀,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장 속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당시 카를로스 2세의 남자 형제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의 여자 형제 가계에서 후계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혈연으로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의 아들인 루이였다. 그런데 그는 바로 ‘태양왕’으로 불리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아들로, 그때 벌써 프랑스 황실의 황태자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다면 이는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 왕국이 합쳐져 전체 유럽의 균형을 무너뜨릴 거대한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을 표방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영국 등 주변 국가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같은 논리로 루이 황태자의 대안으로 거론됐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카를로스 2세와 사촌지간으로, 그의 어머니가 카를로스 2세의 선친 펠리페 4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왕위가 계승돼야 한다는 펠리페 4세의 유언과도 맞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경우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이 합쳐지는 또 다른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강력한 후보로 등장한 사람이 1692년생으로 당시 어린 나이였던 바이에른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레오폴드 1세의 외손자였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계 혈통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당시 유럽의 두 거대 가문인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접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를 적극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