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주식시장형 인사 시스템으로 공기업 뒤흔들겠다”

지독한 가난 이긴 총리실 해결사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 김유림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1-11-23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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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원들 앞에서 시 읊고 ‘번개 맥주팅’ 즐겨
    • “내 손에 들어온 일은 끝장을 본다”
    • 육성회비 없어 시험지 빼앗기고 검정고시 응시
    • 세계 최초 무정전 검사 도입
    • 전기 한류 선도, ‘블루칩 직원’ 우대
    “주식시장형 인사 시스템으로 공기업 뒤흔들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노란 은행잎이 길을 포근히 덮은 11월 초,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KESCO) 사장은 여직원 12명과 사옥 앞을 걸었다. 근처 메밀국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공원 벤치에 둘러앉았다. 여직원 한 명이 “사장님, 시 한 수 읊어주세요” 했다. 박 사장은 멋쩍게 웃으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읊었다. 박수를 치던 여직원 한 명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그거 ‘작업’하실 때 외우신 시 아니에요?”



    6월1일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KESCO 14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150일을 가까이서 지켜본 조민현 홍보실장은 “‘총리실 해결사’라는 별명답게 일을 할 때는 철두철미하면서도 일선 직원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열린 CEO”라고 평가했다. 박 사장은 취임식 직후 사무실을 돌면서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직원들을 일일이 찾아내 악수를 건넸다. 그는 종종 직원들과 ‘번개 맥주모임’을 갖고 밤낚시도 함께 간다.

    11월3일 서울 강동구 명일동 KESCO 집무실을 찾았다. 박 사장은 그 주 주말에 KESCO가 주최하는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에서 어떤 시를 낭독할지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낭만 CEO’, 박철곤 사장이 구상하는 KESCO의 큰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박 사장은 전북 진안 출신으로 부산진고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다니다 한양대 행정학과에 편입했다.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 25회에 합격해 27년간 공직에 몸담았다. 국무조정실 복지노동심의관, 총괄심의관, 심사평가조정관, 규제개혁조정관과 국무차장 등을 거쳐 2009년 2월 퇴임했다.

    퇴임 이후 KESCO 사장에 임명되기까지 2년4개월 동안, 그는 한양대에서 특임교수직을 맡았다. 그간의 생활에 대해 물으니 그가 “백수에도 네 가지 등급이 있는 것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에 따르면 은퇴한 후 밥 먹자는 전화도 많이 오고 같이 골프 치자는 사람이 있으면 ‘화백(화려한 백수)’, 점점 부르는 사람이 줄어들고 의기소침해지면 ‘준백(준수한 백수)’, 찾아가도 사람들이 잘 안 만나주면 ‘불백(불쌍한 백수)’이다. 여기서 더 시간이 지나, 하도 빈둥거려 아내도 귀찮아하는 백수는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이란다. 그는 “다행히 2년 반 동안 ‘화백’으로 지냈다. 아내도 ‘어째 차관 그만뒀는데 집에서 밥 먹는 일이 이렇게 없느냐’고 희한해했을 정도”라며 웃었다.

    총리실 과장 시절, 청와대 수석 찾아가 담판

    박 사장은 25년 총리실 생활 중 가장 인상 깊은 업무로 1997년 직업교육훈련촉진법자격기본법 등 ‘신(新) 직업법 3법’을 제정한 일을 꼽았다. 그는 15년 가까이 지난 일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날짜, 시간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타고난 ‘스토리텔러(storyteller)’였다.

    당시 학교 교육과 산업 현장에 간극이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기업에 들어가도 산업 현장에 배치하기까지 별도 교육이 필요한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전제하에, 산업현장의 인력 수요와 학교 교육을 잇는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해당사자인 교육부와 노동부가 힘을 겨루느라, 합의점을 못 찾고 있었다. 그때 박철곤 당시 국무총리실 교육정책과장이 나섰다.

    “일단 제 방에 교육부와 노동부 실무 과장들을 불러놓고 법안 하나하나 ‘끝장토론’ 시켜가면서 연결을 했어요. 노동부는 ‘직업훈련’이 빠지면 사실상 ‘노동부 폐지론’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했죠. 논리적으로 서로 끝까지 다툴 수 있게 하고, 그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갔죠.”

    일단 노동부와 교육부의 합의안을 만들어 청와대에 보냈으나, 3개월 이상 청와대에서 반응이 없었다. 박철곤 과장은 직접 박세일 당시 청와대 사회복지수석비서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총리실에서 조정한 상황에 대해, 이것이 위법하지 않은데도 청와대 의견과 다르다고 거부하시면 총리실은 아무 일도 못 합니다. 그럼 모든 부처 간 분쟁은 청와대가 다 처리하셔야 합니다.”

    박 사장은 “이제 와 말이지만 사실 총리실 과장과 청와대 수석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게 바로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건 공직사회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다행히 박 수석이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까마득한 나와 토론에 임해주셨고 일이 잘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통해 1997년 5월 ‘신직업법 3법’이 입법됐다. 민간에서 딴 자격증이라도 요건을 갖추면 국가 공인을 받을 수 있고, 국가자격검정에서 시험 과목 면제 혜택을 줬다. 또한 정부 출연으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설립을 추진했다. 중앙독립기구인 직업능력개발원은 교육부와 노동부가 힘을 합쳐 만든 효율적 기구다.

    “부처끼리 협의가 안 될 때 고함도 지르고 별소리 다 나와요. 협의가 안 되면 그냥 결렬되는 것도 부지기수죠. 근데 나는 내 손에 걸렸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끝내야 합니다.”

    어릴 때 삼시 세끼 먹어본 적 없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박 사장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김 기자, 안 울 자신 있어요?”라고 물었다.

    “얼마 전에 정두언 의원과 같이 차 타고 갈 기회가 있어서 내 어린 시절 얘기를 했더니 정 의원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형님, 그렇고 고생하신지 몰랐습니다’ 하면서 내 손을 꼭 잡더라고요. 정말 엄청나게 고생을 해서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나도 눈물이 나.”

    박 사장이 태어난 곳은 전북 진안 백운(白雲)면 백암(白巖)리. 남한의 유일한 고원지대로, 이름부터 ‘산골짜기’라는 느낌이 든다. 마을에 처음 버스가 들어온 건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학교에 가려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전기도 안 들어왔다.

    박 사장의 할아버지는 지역에 상당한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에 응하지 않아 대부분 잃었다.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갔다 부상을 입어 평생 앓았다.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7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행상한 걸로 먹고살았는데, 어린 시절 하루 세끼 먹어본 적이 없어요. 더구나 끼니를 밥으로 먹은 적도 없어요. 늘 시래기죽, 수제비, 쑥버무리, 고구마로 배를 채웠지.”

    박 사장은 동네에서 이름난 수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급이 ‘진학반’과 ‘사회반’으로 나뉘었는데, 학비가 없었지만 공부를 잘해 진학반에 배치됐다. 당시 진학반은 여름방학 내내 학교에서 합숙을 했다. 학생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담당 교사에게 수고비를 줬는데, 가난했던 박 사장은 늘 열외였다.

    “하루는 한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너 박철곤, 임마, 너 왜 여기 있어? 이리 나와’ 하면서 제 목덜미를 잡아끌고 나갔어요. 왜 돈도 안 내고 공부하느냐 이거죠. 슬리퍼로 제 등짝을 때리면서 ‘나가라’는데 얼마나 서럽던지. 제가 잘 못 먹어서 당시 덩치도 엄청 작았거든요. 중학교 입학할 때 키가 131㎝였으니.”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당시 서러움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땐 정말 딱 ‘흐느낀다’는 말이 맞아요. 어머니께 죄송해서 집에도 못 가고 학교 담벼락에서 울고 있는데 한 선생님이 저를 발견하셨어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선생님이 ‘이런 일로 낙심하면 큰일 못한다. 이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며 저를 다시 교실로 데려가셨어요. 급우들 앞에서 얼굴도 못 들 만큼 창피했지만 다시 들어갔죠. ‘공부를 안 하면 장래가 없다’는 생각 하나로요.”

    그는 “울던 나를 달래주셨던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야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주셨다”며 “요즘도 명절마다 인사드리고 선물을 보낸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참스승”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박 사장은 전주의 한 사립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들어갔지만 설움은 끝나지 않았다. 2학년 때 재건학생회비(육성회비)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무과에서 시험지를 뺏어가 시험도 못 치렀다. 결국 그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고입검정고시를 봤다. 힘들게 학업을 이어갔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고시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고시를 해서 나라에 큰일을 하는 게 제 인생으로 굳어진 거죠.”

    그는 “요즘도 TV에서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 나오면 내 이야기 같아서 펑펑 운다”고 멋쩍어하면서도 “하지만 가난했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힘”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가난을 겪은 사람은 두 부류예요. 성격이 모나고 살아남기 위해 정말 별 짓 다하는 사람, 그리고 어렵던 시절 잊지 않고 남한테도 따뜻하게 하는 사람. 저는 운 좋게 후자가 된 것 같아요.”

    KESCO는 전기 고장과 안전 문제를 책임지는 회사다. 전기 생산과 공급은 한국전력공사와 발전 자회사들이 맡고 있지만, 전기설비 점검 및 응급조치 등은 KESCO의 몫이다. 박 사장은 “KESCO는 전기 안전을 책임지는 ‘종합병원’”이라며 “국민에게 직접 서비스를 하는 만큼 최고의 기술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객 만족 서비스

    10월8일 그는 취임 100일을 맞아 △전기 안전 선도기업 △행복한 고객 △신명나는 일터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신 전기안전 관리 체계’를 구축해 KESCO의 안전 기준이 글로벌 표준이 될 수 있게 하고, 고객의 기대를 넘어선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키고, 아침에 일어나면 빨리 오고 싶은 놀이터 같은 일터를 만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KESCO의 기술력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KESCO는 2005년 세계 최초로 전기를 끊지 않고 전기 설비를 검사하는 ‘무(無)정전 검사 기술’을 개발해 올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제철소 등 24시간 공장이 가동되는 경우 정전 상태에서 검사를 하면 공장 가동 중단에서 오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데 무정전 검사 기술을 도입하면 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KESCO는 국가 주요 산업시설 100호에 무정전 검사를 실시하면 연간 5340억원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KESCO는 경제 취약계층에 ‘전기119’라는 스피드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회 취약계층이 정전, 누전 등 전기 고장을 겪으면 KESCO에서 긴급 출동해 조치하는 제도다. 이 밖에 KESCO는 7월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렸을 때 긴급 복구활동을 했고, 8월 초 태풍 무이파가 상륙했을 때 24시간 불철주야 긴급출동태세를 유지하며 복구 활동을 했다. 당시 박 사장도 직원들과 함께 경기 의정부 침수가옥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그는 “고객이 딱 기대하는 만큼 줘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보다 한걸음 나가야 그때 감동한다”고 말했다.

    초가을이던 9월15일 서울 강남과 여의도 일대를 비롯해 전국 곳곳이 정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가정과 공장, 병원 등 162만 곳의 전기가 동시에 끊겼다. 박 사장은 “낮 3시10분 뉴스채널을 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전은 전기 생산·공급을 맡고 우리는 안전 관리를 맡기 때문에 우리 소관은 아니다. 견해는 있지만 말을 보태지 않겠다”면서도 “안타까운 점은 있다”고 덧붙였다.

    “주식시장형 인사 시스템으로 공기업 뒤흔들겠다”
    “8월16일부터 나흘간 을지연습 할 때 저희는 정말 철저히 했어요. 책상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운 게 아니라 실제 전시에 어떻게 인력배치를 할 것인가, 만약 연평도에 사고가 나면 관리 인원을 몇 명 보낼 건가 철저히 고민하고 실전 연습을 했습니다. 만약 전력거래소도 실제 대처 연습을 많이 해봤다면 훨씬 처리가 빨랐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유비무환이지 않습니까.”

    전기 한류 선도

    박 사장은 10월17일부터 사흘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방문했다. SK가스플랜트 정밀진단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서다. 박 사장은 한국대사관, 코트라, 두바이 총영사관 등을 방문해 KESCO의 해외 전기안전 정밀진단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협력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재 KESCO 아부다비 현장출장소에 직원 8명이 파견돼 SK건설 등 국내 대기업 사업 현장에서 전기안전 설비 진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박 사장은 “국내 기업이 개도국, 후진국에 진출했을 때 산업 인프라를 구축해도 전기 설비 유지·관리가 안 돼 어려움을 겪는다. KESCO가 이 문제를 해결하면 국내 기업 해외 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KESCO는 한국형 전기안전 관리모델을 해외에 전파하고, 후진국에 KESCO의 기술과 경험을 전파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KESCO는 ‘전기 한류’를 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KESCO가 출범한 지 37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하는 일은 안전 설비입니다. 시대가 변한 만큼 해외에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내 안전 설비는 영세업체에 넘기고 우리는 큰 기술력을 요하는 업무나 해외 진출을 꾀해야 합니다. 우리 기술과 안전 관리 시스템을 다른 나라에 알려주면 또 다른 ‘한류(韓流)’로 퍼져나갈 겁니다.”

    그는 힘들었던 어린 시절 얻은 교훈을 늘 되새긴다. 집안을 세우려면 사람이 잘돼야 한다는 것. 그는 KESCO가 잘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장의 최대 권한이 인사권인 만큼, 임기 중 인사 시스템 하나는 확실히 만들어놓고 나가겠다는 각오다.

    그 구체적인 방안이 ‘주식시장형 인사시스템’이다. 주식시장에서 블루칩(우량주) 가격이 더 높고 수요자가 몰리고 성적 나쁜 주식은 상장폐지되는 것처럼, 간부들에게 신망과 평판이 좋은 인재를 팀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처장은 같이 일할 부장을, 부장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할 차장을 직접 선발한다. 사장도 함께 일할 비서실장, 인력실장을 뽑는 것 외에 인사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그는 취임 직후 7월 정기 인사 때 ‘주식시장형 인사시스템’을 도입했다. 낯설어했던 직원들도 이내 적응했다. 그는 “어떤 제도, 기준보다 직원들 성과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한 사람 따로 있고 보상받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며 “성과를 내는 사람에게 확실히 보상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우대받는 기업문화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박 사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서려는 기자를 불러 세웠다. 그는 휴대전화로, 어색하게 서 있는 기자의 얼굴 사진을 찍었다. 휴대전화에 얼굴 사진을 남겨놔야, 시간이 많이 흘러도 안 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수천 명의 사진이 담겨 있다. 그는 “언제든 전화나 문자, ‘카톡(카카오톡)’ 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그의 말이, 순간 몸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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