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장엔진-신시장-신기술-신시스템 4新 경영방침
- ‘글로벌 톱 클래스 위·변조방지기업’ 비전
- 따라 하기 아닌 월드 베스트, 월드 퍼스트 기술 추구
- 취임 1년 만에 해외수출 3배…목표 초과 달성
그랬던 조폐공사가 최근 들어 확 바뀌었다. 우선 해외수출 실적 소개를 중심으로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졌다. 기념메달이나 상품권 등 조폐공사가 생산하는 여타 제품에 대한 마케팅도 예전에 비해 훨씬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0월 26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여울역 무역전시장 SETEC에서 ‘대한민국 화폐박람회(Korea Money Fair)’도 개최한다. 이 행사는 지난 2년간 본사가 있는 대전에서 지역행사로 개최하던 것을 서울로 옮겨 전국 규모, 국제 규모로 확대한 것이다.
그간 조폐공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글로벌 조폐업계에서 ‘개혁의 화신’으로 불리는 윤영대 사장(66)을 만나 최근 조폐공사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에 대해 알아봤다.
“신용카드 사용과 전자결제의 증가, 5만 원권 발행 등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공사의 경영환경이 급격하게 악화됐습니다. 단적인 예로 5만 원권이 발행되면서 2007년 20억 장에 달했던 우리 공사의 화폐 생산량이 지난해에는 4억1000만 장으로 5분의 1 이하로 줄었어요. 화폐 제조라는 우리의 전통적 핵심사업이 거시적 트렌드의 변화로 인해 크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의미죠.”
10년 뒤 1조 원 매출 목표
지난해 9월 취임한 윤 사장의 취임 일성(一聲)은 도전과 변화, 혁신이었다. 그는 임직원들과 첫 대면 자리에서 ‘외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공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기회 삼아 도전하고 창신(創新)하는 것만이 공사가 살 길’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취임사에는 새로운 성장엔진 발굴, 새로운 시장개척, 새로운 기술개발, 새로운 경영시스템 구축 등 구체적 목표가 담겼는데, 이는 그 후 4대 경영방침으로 정립됐다.
▼ 취임 당시 조폐공사의 상황을 ‘위기 국면’으로 규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공사의 주력 사업인 화폐사업이 카드 사용, 전자결제, 5만 원 권 발행 등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5만 원권이 발행되면서 수표 사용도 줄었습니다. 최근 10만 원짜리 수표 보신 적 있습니까? 스마트폰 사용으로 우표 수요도 줄었습니다. 사업구조 자체가 이렇게 수요가 줄고 있는 사업 위주이니 위기 국면이 아니겠습니까?”
▼ 4대 경영방침을 토대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는데.
“CEO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직원들에게 회사의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 제시해서 모든 임직원이 이 비전과 목표를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취임 후 ‘글로벌 톱 클래스 위·변조방지기업’이라는 새 비전을 설정했습니다. 매출 규모로 보면 우리 공사는 지난해 3600여억 원으로 전 세계 조폐기관 중 12~13위 정도인데, 이것을 창업 7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1조 원대로 끌어올리자는 겁니다. 이는 국내시장에 안주하는 수동적 공기업이 아니라 세계시장을 무대로 뛰는 글로벌 기업이 될 때 현실화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새로운 성장엔진 발굴, 새로운 시장개척 등 경영방침들도 글로벌 톱 클래스로 올라서기 위한 부문별 전략인 셈이지요.”
▼ 무엇보다 경쟁력 있는 기술이 중요하겠습니다.
“세계 보안시장을 선도하려면 기술이 중요하지요. 우리 5만 원권의 경우 위변조방지 요소가 22가지 들어가 있습니다. 미국 100달러화가 14가지, 일본 100엔화가 14가지, 유로화가 21가지인 데 비하면 상당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나는 남이 만든 것을 복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남이 아직 만들지 못한 것을 만들어내라고 우리 연구원들을 닦달하고 있습니다. 월드 베스트(World Best), 월드 퍼스트(World First) 기술을 확보해야만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윤 사장은 새 비전과 4가지 경영방침, 그리고 도전·변화·혁신의 자세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직원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매달 초 본사 강당에서 열리는 월례조회를 ‘직원 정신교육’ 용으로 활용한다고도 했다.
“원대한 비전을 전체 직원이 공유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21세기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국 GE의 잭 웰치 전 회장도 재직 시절 기업 비전을 직원들에게 무한 반복해 강조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기업이 지향하는 비전과 목표를 자신의 가치체계로 내면화할 정도가 되어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장이 직접 해외 세일즈
올해 조폐공사가 언론의 집중적 주목을 받은 것은 해외 수출 때문이다. 지난 3월 태국 주화 수주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 은행권용지, 우즈베키스탄 등에 특수잉크를 수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국민 중에는 ‘조폐공사가 우리 돈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수출도 하는구나’하며 놀라워하는 이가 많았다. 이른바 ‘돈 수출로 돈 버는 기업’이라는 새로운 인식이었다. 하지만 외국 화폐를 우리가 만들어 수출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터. 화폐란 일반 공산품과 달리 그 나라의 얼굴이자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최첨단 위·변조방지 요소가 적용되는 과학적 측면과 함께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예술적 측면이 담겨 있는 매우 특별한 상품입니다. 대체로 기술력이 떨어지는 개발도상국들이 외국에서 화폐를 만들어오는데,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에 매우 민감합니다. 더욱이 그런 나라들의 화폐시장은 이미 영국, 독일 등 메이저급 조폐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시장에 신규 진입할 경쟁력을 갖춘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 그럼에도 올해 큰 성과를 냈다면서요.
“올해 수출 목표를 지난해 실적 131억 원보다 3배가량 높은 397억원으로 잡았어요. 그런데 8월 말에 벌써 247억원의 실적을 올렸고, 연말에는 470여억 원까지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공사 최초로 5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 단기간에 높은 수출 실적을 올린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지난해 말 수출전담부서를 확대 개편하고 공사 61년 역사상 최초로 해외사업이사를 외부 공모를 통해 선발한 게 주효했다고 봐요. ‘새로운 시장 개척’을 구호로만 외치는 게 아니라 실제 실적을 낼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는 게 중요하지요. 해외입찰 정보를 재빨리 입수해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잠재적 수출 대상 국가들에 대해 전방위적 프리마케팅(pre-marketing) 활동을 벌인 것도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화폐 외에도 자체 위·변조방지 요소가 들어간 은행권용지, 수표용지를 비롯해 특수보안잉크 등 화폐 제조의 원재료가 되는 것들도 수출하고 있고, 국가 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전자여권과 국가신분증 등과 같은 ID사업 분야에도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윤 사장 자신도 세일즈맨이 되어 여러 차례 해외를 뛰어다녔다. 지난봄에는 인접국가에 출장 간 김에 82억 원 상당의 은행권용지 추가 발주를 따냈다. 조폐공사의 자회사가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에는 정부 관계자와 협상을 벌여 은행권용지의 원료인 면 펄프를 특혜가격으로 공급받기로 확약받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세계 최대 면화생산국입니다. 면화는 은행권용지 제조의 주 원료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원자재 확보가 중요하죠. 그곳에 2010년 자회사 GKD(Global KOMSCO Daewoo)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설립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면화를 특혜가격으로 받기로 약속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어요. 그것을 내가 그 나라 장관들과 재협상해서 더 좋은 조건으로 약속을 소생시켰습니다. 직원들 말로는 그로 인해 회사가 얻을 이득이 260억 원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 해외 수출에서 조폐공사가 가진 강점이 있다면.
“은행권용지와 특수보안잉크의 제조에서 화폐인쇄까지 화폐 제조의 전 과정을 일괄 수행할 수 있는 종합 조폐기관은 전 세계에서 서너 곳밖에 안 됩니다. 우리 공사가 그중 하나이고요. 해외에서 수주경쟁을 벌일 때 이런 점이 강점이 될 수 있죠. 특히 우리나라는 정보통신(IT) 분야 세계 강국이기 때문에 국가신분증 사업 등 ID 분야에서 잠재력이 크다고 봅니다. 포괄적으로는 최근 각 부문에서 일고 있는 한류(韓流) 바람도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겠죠. 우리의 높은 기술력과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이 보다 높아진다면 세계적으로 화폐 한류바람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폐산업 인식 바꿀 화폐박람회
화폐 위·변조방지기술에 대해 연구원의 설명을 듣는 윤영대 사장.
이번 화폐박람회는 ‘돈 이야기 :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세계 12개국에서 40여 개 기관이 참여해 전시 부스를 마련하고, 보안기술 관련 국제회의도 함께 열린다. 동서양 화폐 3000년전(展), 화폐수집 우수작품전 등 풍성한 볼거리와 함께 지폐와 동전 모형 만들기, 돈뭉치 실감하기 등 체험 프로그램, 희귀화폐 옥션 및 화폐수집 강좌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외국에서는 화폐박람회가 정기적으로 열립니다. 매년 2월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화폐박람회(WMF)가 대표적인 예인데, 전 세계 조폐기관 관계자뿐 아니라 화폐 딜러들, 컬렉터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비즈니스 활동을 하지요. 이번 화폐박람회가 화폐산업에 대한 국민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화폐산업에 대한 인식 변화가 왜 중요합니까?
“일반적으로 화폐라고 하면 지불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폐에는 산업적 측면도 있어요. 예를 들어 기념화폐에는 문화·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성이 있어서 오래 소장할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외국에서 기념주화를 많이 발행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자국 내 수집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 수집가를 위해서 발행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안도라 공화국이라는 조그만 나라도 연간 10여 종의 기념주화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서방 선진국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외국에 팔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제는 화폐도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기념화폐(기념주화+기념은행권)를 많이 만들어 해외에 팔아야 할 것입니다.”
▼ 김연아 선수의 기념주화가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2008년 김연아 선수가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남태평양의 투발루라는 조그마한 섬나라가 김연아 기념주화를 발행한 일이 있어요. 기념주화 관련법이 미비했던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죠. 하지만 올해 3월 관련법이 개정되어 기념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뒤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기념화폐가 많이 발행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시장 중심형, 수평적 조직 운영
윤영대 사장은 1972년 공직에 몸을 담은 이후 경제기획원과 재정경제원에서 주로 해외협력과 투자심사, 예산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예산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통계청장과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글로벌 마인드는 통계청장(1998~2002년)을 할 때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2001년 제 53회 세계통계대회(International Statistical Institute)를 유치하고 치른 주역이 바로 그였다. 세계통계대회는 전 세계 저명 통계학자, 정부 및 국제기구 통계업무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통계인의 올림픽’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이니까 2001명 이상 참석시키겠다는 열망으로 준비했는데 외국 인사 2000여 명, 국내 인사 700여 명 등 총 2700명 이상이 참가했습니다. 당시는 한국 통계청이 국제사회에 그다지 노출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이 대회는 국제 통계 사회에 우리나라를 크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 통계청장 시절에도 조직에 새 바람을 불러왔는데, 조폐공사에선 어떤 변화와 혁신 노력을 하셨습니까?
“앞서 소개한 대로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조직 혁신을 단행한 것이 첫 번째이고요. 우수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연공서열주의를 파괴하고 승진 후보자 범위를 확대하는 등 인사제도를 고쳤습니다. 아울러 성과급 보상 격차를 확대하는 등 성과창출형 보상제도를 구축했고, 수직적 의사결정구조를 수평적 구조로 바꾸는 등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업무방식의 혁신 노력을 꾸준히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파격적인 변화와 혁신을 자주 하다보니 취임 후 ‘공사 6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웃음)”
▼ 조폐공사를 글로벌 체제로 변환하는 데 애로점이 있었다면.
“일은 사람과 조직이 하는 겁니다. 부임 직후 다양한 측면에서 새 바람을 불어넣자 조직 일부에서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 중심형, 시장지향형으로 조직을 만들기 위해 해외사업이사와 홍보협력실장 등에 전문지식과 경험을 가진 외부 인사를 영입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불만이 터져 나왔지요.”
▼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사외뿐만 아니라 사내에서도 모집을 한 데다 경쟁률이 30대 1이 넘었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실제로 뽑힌 분들이 들어와 역량을 발휘하면서 반발은 금세 수그러들었어요. 조폐공사와 같은 공기업의 순혈주의는 시야와 경험을 내부에 갇히게 합니다. 글로벌 톱 기업으로 성장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선 혼혈주의, 다문화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채용과정의 투명성과 공명정대함이 알려지면서 요즘은 전 직원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 개척 향한 결의
윤 사장은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 사례를 하나 더 들려줬다.
“최근 우즈베키스탄 자회사 사장이 퇴직을 하셨습니다. 후속 인선을 어떻게 하느냐가 회사 내에 초미의 관심사였죠. 저는 이번에도 사내 공개모집을 통해 뽑았습니다. 그동안의 관행으로 보면 엄청난 파격이었죠. 그런데 직원들이 이번에는 모두 환영하고 나섰습니다. 분위기가 정말 확 달라졌어요.”
▼ 평소 직원들과 대화는 많이 하나요.
“업무시간 후 직원들과 테니스를 치거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소통하려고 노력합니다. 회의를 할 때도 처장, 실장, 팀장, 담당 과장이 모두 참석하게 해서 난상토론을 벌이곤 합니다. 평직원들에게 e메일도 보내고 문자 메시지도 보냅니다.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수평적인 구조로 바꾸려는 시도이지요. 처음에는 모두 당황하더니 이젠 바로 답변이 옵니다. CEO의 경영철학과 비전이 현장 직원들과 공유되는 거지요.”
과연 조폐공사는 윤영대 사장의 비전처럼 10년 안에 글로벌 조폐시장의 톱 클래스로 등극할 수 있을까. “조폐공사를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는 수출형 공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인터뷰의 마지막 말을 대신하는 그의 모습에서 비장한 결기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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