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앞서 1987년 11월 창립한 충북교사협의회에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교육운동을 하셨죠?
“나는 그때 아이들이 목숨을 끊으며 견딜 수 없어 하는 잘못된 교육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법으로 보장된 교사들의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구치소에 갔을 때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어야 했는데, 교도관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알몸인 채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켰어요. 하루는 조사를 받기 위해 포승줄에 꽁꽁 묶이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검사 앞에 앉았는데, 검사가 내 이름을 보더니 ‘접시꽃 당신 (시인) 아니냐’하고 물었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 검사는 아니꼽다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피’하고 웃었어요. 감옥생활을 하면서 장이 안 좋아 고생을 많이 했어요. 배탈과 설사가 멈추지 않았지만 치료를 받을 곳이 없어 몸이 쇠약해지고 기력이 많이 떨어졌죠. 가장 답답한 것은 터질 것 같은 그 심정을 어디에 글로 써놓고 싶은데 구치소에서는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도 주지 않았어요. 교도소 교무과장을 면담하면서 집필 허가를 내달라고도 했지만 미결수라 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년노트를 활용했죠.”
“이게 편지야? 시야?”
▼ 만년노트?
“만년노트는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노트였는데, 연필 모양의 뾰쪽한 플라스틱 물건으로 눌러 쓰면 글씨가 써지고 비닐을 들면 글씨가 날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취침나팔이 울리고 나면 그 만년노트에 긴 시를 한 편 썼어요. 그 다음날 봉함엽서를 신청해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만년노트에 쓴 시를 편지 형식으로 옮겨 적었죠. 그때 교도관이 ‘이게 편지야? 시야?’라고 물었어요. 나는 ‘시인이 편지를 시처럼 쓴 것’이라 대답했고, 그 봉함엽서는 여러 번 검열을 거쳐 마침내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에 배달되었어요. 나중에 그 시가 명동성당 단식농성장에 대자보로 붙고, 신문에도 실려 구치소 안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우연찮게 이쑤시개보다 약간 작은 볼펜심을 지인으로부터 얻어 몰래 숨어서 시를 썼어요. 종이가 없어 비누를 싼 속포장지에도 시를 쓰고, 화장지 겉을 싼 종이 안쪽에도 시를 썼어요. 그렇게 쓴 시를 모은 시집이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이죠. 참 힘든 시절이었어요.”
▼ 잘못된 교육구조가 문제라고 했는데, 도 시인이 바라보는 한국교육은 어떤가요?
“내가 교사로 재직할 때 하루는 교감이 상담실로 나를 불렀어요. 교감은 ‘대학동창회보’에 실린 내 시를 보여주면서 ‘이 시에 나오는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가 맞죠?’라고 물었어요.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식민지가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뜻이죠?’라고 추궁했어요. 그 시가 ‘접시꽃 당신’에 실려 있는 ‘앉은뱅이 민들레’라는 시였어요.”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
-‘앉은뱅이 민들레’ 중
“그 시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에서 쓴 시였어요. 그때 나는 ‘진달래꽃이 문제가 된다면 저보다 먼저 김소월을 잡아넣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더니 교감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고 나가버렸어요. 우리 교육 현장이 이렇게 왜곡되어 있어요. 그때 교육계 현실은 4·19혁명과 3·15부정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징계를 받는 시대였어요. 통일교육을 하면 좌경 의식화교육을 한다고 의심했죠. 사람들은 대부분 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독약은 약이 아니라 독이듯이,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이다’라고요. 나는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고 생각해요. 고장 난 신호등을 고칠 생각을 않고 ‘고장이 나기는 했지만 신호등이니 계속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면 되겠어요? 그때 나와 길을 함께 걸었던 교사들은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싸움에 몸을 던졌어요. 그 일이 곧 우리 아이들과 이 나라 교육의 미래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