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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한국의 명장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기술이 예술이 된 ‘쟁이’의 뚝심과 도전 한평생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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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병진은 평생 가구를 만들어온 ‘농방쟁이’로, 가구제작 부문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명장 1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이 망하면서 맥이 끊어진 전주장을 되살리는 데 도전해 아름다운 전주장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 전통가구의 아름다움이 집대성된 전주장이 10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하기까지, 소병진이 기울여온 노력과 탐구정신은 한 장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소병진(61)은 좋은 가구를 ‘음양(陰陽) 화합’이라고 했다. 남녀가 꽉 껴안듯 서로 다른 재질의 목재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 음양이 조화되면 남녀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나무의 화합 역시 제대로 이루어져 ‘한 살’(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가구로 완성된다고 했다. 딴은 그렇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결구법으로 만드는 우리 전통가구는 못이라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무끼리 서로 얽혀 하나가 된 결과다.

그러나 나무의 화합이 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나무가 서로 파고들어 하나가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얽히고 나서도 뒤틀어지기 일쑤다.

“전주장(全州欌)을 만드는 데 꼬박 2년이 걸립니다. 서로 다른 재질의 나무를 깎아 아교로 붙인 뒤 꽁꽁 묶어 여섯 달을 두고, 그것을 반으로 가른 다음 매끄럽게 다듬고 잘라낸 뒤 또 여섯 달을 둬요. 이 조각들로 장이든 농이든 완전히 조립한 뒤에도 여섯 달 이상 묶어두고 사계절을 나도록 합니다. 계절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는데, 그런 과정을 다 견디고 나야 온전히 한 살이 돼요.”

실제로 그가 만든 가구를 손으로 만져보면 하도 매끄러워서 이음새를 느낄 수가 없다. 남녀가 처음 만나 갈등 속에서 서로 맞춰가는 과정처럼 나무 역시 이렇게 완벽한 한 살이 되기까지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시간은 본격적으로 가구 제작에 들어가는 기간만 따져 2년이지, 원목을 들여와 노지에서 5,6년씩 비바람 맞혀 진 빼고 그 나무를 크게 켜서 다시 3년여 건조시키는 과정까지 합하면 10년 세월은 좋이 걸린다. 그리고 그 나무 수명까지 헤아려보면 시간은 100년 단위, 때로 1000년 단위로 넘어간다. 전주장의 매력은 앞면에 아름다운 나무무늬를 대칭으로 배열하는 것인데, 주로 느티나무와 먹감나무 무늬를 이용한다. 특히 잔물결 치듯 아른거리는 용목(龍目) 무늬를 얻으려면 500년 이상 되는 느티나무를 만나야 한다.

“용목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고사(枯死)할 때 생깁니다. 사람 몸의 암덩이처럼, 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느티나무는 속으로 용틀임을 하며 세포가 말라가는 겁니다. 죽음과 맞서 싸운 나무의 흔적, 그것이 바로 용목이랍니다.”



수명을 1000년으로 치는 느티나무가 자연사, 즉 고사하면서 만들어낸 용목을 사용했다면 그 가구는 만드는 데 2년이 아니라 1000년이 걸린 셈이다. 한 나무가 가구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한 장인과 나무의 인연이 이렇듯 길고 무겁다.

열다섯에 공방에 들어가 2년 반 만에 기술 익혀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집안 내림인지도 모른다. 그의 고향 전북 완주군 용진면 녹동마을은 소(蘇)씨 집성촌이자 목수고을로도 유명했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 소진동과 문중어른 소팔룡은 이름난 대목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지으며 목수도 겸했기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는 일꾼을 스무 명이나 거느린 지주였는데 광복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식 열한 명을 뒷바라지하느라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전주에서 전매국(당시 전매청)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주에서 나서 자랐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면서 낙향하게 되었고, 저도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고향마을로 돌아와서도 농사를 짓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버지는 목수일 한답시고 일 년씩 외지로 떠돌기 일쑤였고, 칠남매의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철따라 비단장사, 새우젓장사, 생강장사, 엇갈이장사(바구니를 이고 다니며 파는 장사)까지 하며 자식을 키워냈다.

“제가 칠남매 중 허리, 딱 중간이에요. 형은 선반일 하러 공업사에 취직했고 저 역시 어차피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어려울 바에야 얼른 기술을 배워 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찍 철든 중학교 1학년생 소병진은 2학년이 되자 더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2학년이 끝나가도록 그를 기다려주었지만, 그는 가구공방에 다니는 8촌형 소병식을 따라 ‘전주중앙가구’에 들어간다. 목공부 소목반에 들어간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1960년대 중반이었다.

“전주중앙가구는 소목장인 김석환 선생님이 설립한 공방인데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알아주는 곳이었어요. 김석환 사장은 그 자신 뛰어난 장인인데다 경영도 잘하는 사업가였습니다. 겨울이면 직원들이 오자마자 일할 수 있도록 미리 불 피워놓고 기다리는 사람이었어요. 또 조금이라도 잘못된 가구는 그 자리에서 부숴버릴 정도로 목수들의 실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 김 사장 밑에서 일한 사람치고 솜씨 없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다들 그 기술로 잘살고 있죠.”

보르네오 같은 공장제작 가구가 보급되기 전이던 당시 그곳에서 만드는 가구는 옛 방식대로 모두 손으로 만들되, 모양은 개량된 주택에 맞춘 신식 농이었다. 무엇보다 손기술, 곧 ‘솜씨’가 중요한데, 철저히 도제식이어서 기술을 배우려면 심부름과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는 남보다 빨리 기술을 익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20리 길을 오가는 출퇴근 시간을 아끼려고 자주 공방 작업대에서 잠을 자고 아교 끓이는 연탄불에 밥해 먹으면서 남들은 10년은 돼야 배운다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습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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