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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한국의 명장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기술이 예술이 된 ‘쟁이’의 뚝심과 도전 한평생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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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작업실에서 -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배운 한문 실력에 그의 솜씨가 더해져 어느덧 전각이 취미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팠다.

이유 있는 은메달에 대한 씁쓸한 기억

‘기술’은 소병진의 특기이자 모든 것이다.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술’이라는 한 낱말로 남을 것이다. 교복에 모자를 쓴 또래 학생들을 보고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지만, 기술이 곧 인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행운아다. 처음 들어간 공방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을 만나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배운 즉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가구가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기술을 배우고 계발해나가는 그 자체를 정말로 좋아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쉴까 말까 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과 말투에 그토록 자랑스러움이 묻어날 리가 없다.

“노는 날 목욕하고 이발하고 영화 한 편 보면 기분 최고였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나가고, 그 보답마저 바로바로 주어질 때, 사람은 미친 듯이 일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맞는 잠깐의 휴식이란 꿀처럼 달콤했으리라. 김석환 사장과 ‘백골반’(칠하기 전 원목 상태의 가구를 백골이라고 한다)의 어느 여름휴가 기념사진을 보여줄 때도 그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순간을 회상하는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사진에는 김 사장을 비롯해 최규환, 이해민, 그리고 소병진과 그의 제자 서영길까지 차례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의 기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보를 그리고 싶었나보다.

소목 일에 몸담은 열다섯 살 이후 기술은 그의 인생에서 화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기술이 곧 돈이고 독립이었다. 기술자가 되면 사장에게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도급공으로서 만드는 만큼 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기술을 빠르게 익힌 어린 그에게 김 사장은 비싼 공구 일습을 사주며 그를 기술자로 대접해주었다.



“남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기술자도 좋고 사장도 좋아라 했지요. 일거리는 늘 쌓여 있었으니까요.”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져 농촌집이 개량되고 양복을 입게 되면서 옷을 걸어두고 이불을 넣어두는 새로운 장롱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다. 그때는 약혼하면 장롱부터 맞추러 왔다. 가장 큰 혼수품이었던 만큼 뭉칫돈이 들어왔고, ‘농방쟁이’(가구 기술자)라면 누구든 딸을 주려고 하는 ‘잘나가는’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단순한 돈벌이 이상이었다. 늘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해보는 데 서슴지 않는 그는 1971년 기능올림픽이 전주에서도 처음 열리자 가구제작 부문에 참가해 은메달을 받았다. 그런데 왜 금메달이 아니고 은메달일까?

“전주공고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심사위원 등 대회와 관련된 인사들이 죄다 전주공고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입디다. 금메달도 전주공고 조교가 차지했고….”

그는 지금도 억울한 표정이다. 기술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로서는 우선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고, 안 그래도 학교를 중퇴한 그이기에 더욱 비애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그 자신 각종 대회와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시험 출제자가 된 오늘날, 심사만큼은 엄격하게 해 과거 자신처럼 억울한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때 참가자가 스물네 명이었는데, 어쨌든 학교 출신 빼고 사회인 가운데서는 제가 최고였잖습니까. 그 자부심만큼은 대단했지요.”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가행진까지 했던 그날 이후 그는 이 일이 자신의 길이라는 걸 확신했고, 정확히 21년 뒤인 1992년 드디어 가구제작 부문에서 명장 1호가 되었다. 그것도 마흔을 갓 넘긴 최연소 명장이었다. 어린 시절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전주중앙가구에서 기술자로 한창 날리던 시절,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게 해준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난다. 김 사장이 새 디자인을 계발하기 위해 서울에서 초빙한 소목 유춘봉이 그 은인이다. 남원 출신인 유춘봉은 당시 이름난 장인으로 제자를 세 명이나 거느리고 전주로 내려왔는데, 공방에서 함께 일하던 소병진을 지켜본 유씨가 어느 날 그를 부르더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공장에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쉬는 날 음료수를 사들고 유 선생님이 머물던 도토리골로 찾아갔더니 대뜸 저더러 ‘자네는 돈을 벌랑가, 기술을 배울랑가?’ 물으시더군요. 그래, 기술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유춘봉은 소병진이 전북에서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젊은이가 전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며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서울 동일가구로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동일가구라면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동양 최대의 가구공장이었습니다. 농방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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