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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전 인권위원장 회고록

섬 같은 인권위와 북한 인권 시한폭탄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③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ahnkw@snu.ac.kr

섬 같은 인권위와 북한 인권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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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라는 이름의 섬

섬 같은 인권위와 북한 인권 시한폭탄

2005년 북한인권단체 회원들이 인권위 앞에서 북한 인권실태 고발과 정부 무대응 비판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다.

부서별로 업무보고를 받고 사무실을 순회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위원회 전체에서 경제신문을 구독하는 부서가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왜 느닷없이 경제신문이냐, 다소 뜨악해하는 표정이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진보를 표방하는 인권운동가들은 대체로 경제에 대한 지식과 균형감각이 떨어진다.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인권문제가 경제적 여건과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그동안 쏟았던 관심과 관성에 따라 국가의 권력 작용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업을 적대시하는 의식훈련이 돼 있다. 경제신문은 시종일관 기업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대기업의 대변인이 돼 있다. 더욱 반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라 전체의 흐름은 물론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에 익숙해지려면 평소 경제신문을 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자신이 경제에 너무나 무식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경제적 사고의 핵심은 비용과 효용이다. 인권위는 사회권에 관련된 정책연구를 수행하고 권고도 한다. 권고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소요되는 예산액에 대한 분석이 없으면 권고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해 주문했다. 직원조회 때에 상공회의소 손경식 회장을 초청해 특강을 들었다. 경제인이 인권위 조회에서 강연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인권위는 비교적 잘 갖춰진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짜임새가 있다. 이용하는 일반시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소장 자료는 ‘인권’ 일변도였다. 구독하는 시사 잡지도 이른바 진보 성향 일색이었다. 영어자료는 아예 없었다. 위원장실에서 ‘신동아’와 ‘월간조선’‘타임’‘뉴스위크’그리고 영자신문을 구독하도록 했다. 배달 즉시 내가 일별한 후에 자료실로 넘겼다.

차츰 업무를 파악해가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실을 발견했다. 우선 사무실 어디에서도 태극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위원장 집무실은 물론 접객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누군가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창고 안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직원 조회 때도, 공식행사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을 하지 않았다. 국가주의에 대한 반감의 표출로, 전형적인 시민단체적인 성향의 표현이다. 한 시민운동가와 함께 KTV 대담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는 ‘국가폭력’이라는 용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국가와 정부 그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기기에 그 용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일 뿐이라고. 인권위에서 국기를 상징물로 존중하지 않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국가기관으로서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권위의 독립성과는 무관한 일이다. 동시에 흠이 잡힐 일이기도 했다.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해가 바뀌고 한참 지난 후에 새로 취임한 김칠준 사무총장에게 지시했다. 다음 직원조회 때는 시작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도록 하라고. 간부회의에서 논의해보겠다고 답했다. 나는 이런 것은 논의에 부칠 사항이 아니라 기관장이 결정해 실시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국기를 앞에 둔 국민의례만 시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낭송이나 애국가 제창은 생략하도록 했다. 외국에서는 강제 충성안보 선서의 합헌성 시비가 벌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정도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됐다. 일종의 타협이기도 했다. 그 후로 조회에 불참하는 직원이 더러 있었다. 속으로 양심의 자유를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체하고 넘겨주었다. 접견실에는 유엔기와 태극기를 함께 비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외국인의 내방을 받을 때 국기가 없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었다. 유엔기를 비치한 것은 국제화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인권위원장은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식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4대 국경일만 필수로 하고 나머지는 선택으로 했다. 나는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스럽게 다른 정부의 기관장과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 인권위원장은 정부에서 소외되고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가신 존재인 인권위인데 사적 인연이라도 맺어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독립의 대가는 고립이다. 인권위가 기관으로서 방어하는 일만 한다면 모르되 뭔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을 추진하려면 도움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은 모든 기관이 입을 모아 제동을 걸고 나서지 않는가. 어쨌든 나는 인권위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부 행사는 물론 경제계나 외국공관의 행사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그러나 실제로 효용은 별로 없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옳은 자세였다고 믿었다. 내가 이렇듯 바깥일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조직 내부의 안정을 확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안정에는 김칠준 사무총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북한 인권 시한폭탄

인권위 출범 당시에는 북한 인권문제를 인권위의 업무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제적인 기준과 관행에도 맞지 않았다. 유엔 결의로 채택한 국가인권기구(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e, NHRI)의 설립권고안은 이 기구가 어디까지나 자국 내의 인권문제를 다룰 것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에 대해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을 타국이 절대로 관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과 같은 국제인권법의 원리가 개발돼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전형적인 의미의 국가나 국제기구 차원의 행위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거나 인권이사회의 결의로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선임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물론 비정부기구는 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타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감시, 비판, 개선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4조는 “이 법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영역 안에 있는 외국인에 대하여 적용한다”라고 규정해 인권위의 관할권을 한정하고 있다. 국제법적으로 볼 때 북한은 엄연히 독립된 주권과 영토를 보유한 국가다. 즉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북한은 엄연한 외국이고 북한 땅은 외국 영토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이미 두 나라 정부 사이에 이 점에 대해 합의 내지는 양해가 존재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은 여전히 원래의 영토조항을 고수한다. 제3조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을 내세워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고 따라서 북한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도 당연히 인귄위의 업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토 조항은 원천적 정당성을 논외로 하면 평상시에는 실효성이 전혀 없다. 다만 장래 북한정권이 붕괴되고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별도의 헌법 개정을 하지 않아도 이 조항을 바탕으로 북한지역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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