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전부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감독, 1963)에서의 이대엽은 또 어떤가? 언제나 말없이 내무반 귀퉁이에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던 이대엽은 장동휘 분대에 전입해 온 최무룡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최무룡의 형은 이대엽의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원수다. 대원들의 중재로 일단 화해는 한다. 자신의 동생을 최무룡이 죽인 것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최무룡의 얼굴을 보면 억울하게 죽은 동생이 생각난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최무룡은 같은 분대의 전우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대엽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운다. 울어서 푸는 수밖에 없다. ‘검은 머리’에서 무뚝뚝하지만 정이 철철 넘치는 사내였던 그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는 과묵하고 책임감 넘치는 병사를 연기해낸다.

이대엽이 최무룡, 남궁원 등과 함께 출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한 장면.
1958년 경남 마산으로 촬영 간 한형모 감독의 눈에 들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배우가 된 이대엽은 박노식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했듯 투박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를 영화 속에서 쓰고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다. 전라도 사나이가 박노식이라면, 경상도 사나이는 이대엽이었다. 데뷔 초기 주로 한형모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한 감독의 1958년 작 ‘나 혼자만이’에서 김진규를 돕는 정의로운 청년 역을 맡아 평론가들에게 “키가 좀 작은 것이 흠이지만 장래를 보고 싶은 연기바탕을 가지 연기자”라는 칭찬을 받는다. 이후 주로 주인공을 돕는 정의로운 조연으로 출연하던 그가 개성 있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만희 감독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다.
1963년 작 ‘YMS 504의 수병’을 보자.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교 박노식은 해군 사상 최고 말썽꾼들의 똥배라는 YMS 504호의 함장으로 부임한다. 부함장은 노상 술에 찌들어 바람둥이 아내의 무기력한 남편인 자신의 신세를 저주하는 개망나니 싸움꾼 알코올중독자 장동휘이고, 하사관의 최고선임 이대엽은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날리는 싸움꾼에 술주정뱅이다. 이두박근에 여자 나체 문신을 하고 눈에 거슬리면 언제나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보자’며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병사에게 웃통을 벗으며 덤벼든다. 박노식은 이대엽과 꼴통 수병들의 싸움질을 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런 꼴통들을 나더러 다루란 말이냐?”며.
이대엽과 이만희 감독의 두 번째 만남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었다. 이후 세 번째 만남 ‘검은 머리’에서 이대엽은 장동휘와 문정숙을 두고 삼각관계에 휘말리지만, 사내답게 문정숙의 행복을 빌고 떠나가는 택시운전사 역을 맡아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이후 ‘빨간 마후라’(신상옥 감독, 1964)에 출연해 인기를 한 몸에 모은 그는 이후 반공 전쟁영화의 단골 조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모든 배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배우의 출연작 중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영화에서의 연기가 그 배우의 연기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대엽의 대성공작은 ‘빨간 마후라’였다. 이후 이대엽의 캐릭터는 항상 의리 있고, 뚝심 있는 경상도 사나이로,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돕는 역을 했다. 비슷한 종류의 영화에서 비슷한 배역을 맡는 조연. 이것이 1960년대 중반까지 이대엽의 모습이었다. 좋은 감독과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배우는 성장한다. 이대엽의 연기를 물오르게 한 감독은 이만희였다. 그러나 개봉 이후 군사정권이 필름을 강제 소거해버려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은 영화 ‘7인의 여포로’(1965) 이후 이대엽은 이만희 감독 영화에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