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전통 고집, 경쟁자 제거하고 독일 상징도 만들다

바이에른公國의 빌헬름 4세와 맥주순수령

  • 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2-11-20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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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와 홉 물만으로 맥주를 만들라는 맥주순수령 반포는 맥주의 기본 품질 확보와 함께 제빵산업에 필요한 곡물을 원활히 공급해준 측면도 있다. 맥주순수령에는 효모가 빠졌는데, 이는 맥주 발효에 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주순수령을 고집하고 홍보한 덕분에 독일은 세계 맥주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
    여름날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제 맥주는 계절을 떠난 술이 되었다. 서기전 3000년경 수메리아인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진 맥주는 국적과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사랑받는 술 중 하나다. 세계에는 많은 맥주가 있다. 해외여행을 하다 만나는 것을 차치하고, 국내에서도 세계의 각종 맥주를 전시한 전문 술집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맥주만큼 기본 종류가 단순한 술도 없다. 맥주는 크게 ‘라거(Lager)’와 ‘에일(Ale)’ 두 종류로 나뉜다. 구별은 어떤 효모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라거는 발효 때 밑으로 가라앉는 ‘하면발효’ 효모를 사용해 저온에서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라거는 한 맥주의 상품명이 됐지만, 실은 맥주의 양대 종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다. 에일은 전통적인 양조 방식으로 제조한다. 발효 과정 중 위로 떠오르는 ‘상면발효’ 효모를 사용해 실내온도에서 만든다.

    오랫동안 맥주는 에일 형태로 만들어졌다. 냉장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저온 활동 효모로 만들어지는 라거의 존립은 불가능했다. 15세기 중부 유럽의 양조업자들이 더운 여름에도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맥주를 저온 환경에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독일 양조업자들은 여름에도 서늘한 동굴에서 맥주를 만들다가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효모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효모라는 것은 모르고, 발효를 일으켜 술을 만들어 주는 자연 성분으로만 알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 봐왔던 효모는 맥아즙 위로 떠올라 며칠 만에 발효했다. 그러나 새로운 효모는 용기 바닥에 가라앉아 몇 주에 걸쳐 천천히 발효했다. 바로 라거 맥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라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상업화가 이뤄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 같은 황금빛깔의 맥주가 체코에서 ‘필스너(Pilsner)’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라거는 인기를 끌게 되었다.

    독일 맥주 상징 맥주순수령



    저온 발효는 과일 향을 내는 ‘에스테르(esters)’ 같은 발효 부산물의 생성을 억제하므로 깨끗하고 가벼운 맛을 낸다. 긴 숙성과정은 맥주 맛을 부드럽게 해준다. 라거는 섭씨 4~7도의 낮은 온도에서 마셔야 최적의 맛이 난다. 에일은 묵직한 느낌을 준다. 과일 향을 풍기며 쓴맛이 강하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맥주 옹호론자들은 에일을 진정한 맥주로 평가한다. 그러나 라거가 주는 청량감에 밀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라거에 밀리고 있다. 위기를 느낀 에일 옹호론자들은 1970년대 초 영국에서 ‘진정한 에일을 위한 캠페인(Campaign for Real Ale)’ 단체를 만들어 부흥운동을 벌였다. 에일은 10~13도의 낮지 않은 온도에서 마셔야 제맛을 볼 수 있다.

    맥주 하면 독일을 떠올린다. 독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제일의 맥주대국이다. 라거 맥주에서는 역사나 전통, 소비량을 볼 때 가히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맥주와 소시지를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들은 독일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 뮌헨에서 열리는 맥주축제 ‘옥토베르페스트(Octoberfest)’는 꽤 유명하다. 1810년 10월 바이에른 황태자인 루트비히(Ludwig)의 결혼에 맞추어 시작된 이 축제는 700여 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맥주가 독일의 대표 술이 된 데는 한 원칙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바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이다. 이 원칙은 1516년 바이에른의 빌헬름 4세가 맥주의 품질 향상을 위해 공포한 법안이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맥주 제조에 보리와 홉, 그리고 물 3가지 원료 이외 다른 재료는 일절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외로 수출되는 독일산 맥주의 상표에는 ‘Brewed in strict accordance with the German purity law of 1516’이란 영문이 적혀 있는데 ‘German Purity Law’가 맥주순수령이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다른 국가의 맥주가 독일 맥주보다 품질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법령이 있었기에 독일 맥주는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어 세계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이트맥주가 ‘프라임’이라는 상표를 내놓으면서 맥주순수령 기준으로 만든 제품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바 있다. 맥주순수령을 공포한 빌헬름 4세(1493~1550)는 어떤 군주였는가.

    종교개혁에 반대한 군주

    그는 독일 남동쪽의 바이에른이 독립국이었을 때 그 지역을 통합한 알브레히트 4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 바이에른은 독일 면적의 거의 20%를 차지하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다. 인구는 약 1250만 명으로 독일에서 두 번째로 많다.

    1506년 그는 장남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바이에른 공작’직에 올랐다. 그러자 동생 루트비히가 계승권에 관한 부친의 칙령이 공포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그 칙령에 관계없이 자신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루트비히는 어머니와 의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빌헬름 4세는 이에 굴복해 1516년부터 동생과 함께 바이에른을 공동 통치하다, 란츠후트와 슈트라우빙을 동생에게 분할해주었다. 그 후 동생은 루트비히 10세가 된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자신이 강의해온 비텐베르크대학 정문에 내걸면서 종교개혁의 열풍이 전 유럽에 휘몰아쳤다.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나 신교도의 세력이 강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됐다. 1522년 그는 바이에른에서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524년에 교황인 클레멘스 7세와 협정을 맺으면서 그는 강력한 반(反)종교개혁 지도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1526년 보헤미아 왕을 겸하던 헝가리의 왕 로요슈 2세(1506~1526)가 술레이만 1세(1494~1566)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사망했다. 그러자 동생 루트비히 10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는데 빌헬름 4세는 이에 동조했다. 그 바람에 강력한 가톨릭 세력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이 갈등은 1534년 빌헬름 4세와 루트비히 10세가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나중에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됨)와 린츠에서 협정을 맺으면서 종결된다. 이러한 관계 회복 덕분에 1546년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을 치를 때, 빌헬름 4세는 카를 5세 황제의 강력한 지원자가 된다. 1560년 이러한 빌헬름 4세가 사망해 뮌헨의 프라우엔 교회에 안치되었다.

    빌헬름 4세는 예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어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1523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한 가장 큰 업적은 맥주순수령 반포였다. 맥주순수령은 훨씬 이전인 1487년부터 꾸준히 제안됐기에 일부 사람들은 1487년을 맥주순수령의 원년으로 보기도 한다.

    맥주순수령 반포는 맥주의 기본 품질 확보와 함께 제빵산업에 필요한 곡물을 원활하게 유통되게 한 측면이 있다. 맥주 원료 곡물을 보리로 엄격히 제한한 맥주순수령 덕분에 제빵업계는 밀이나 호밀과 같은 곡물을 확보해 충분한 양의 빵을 시중에 공급할 수 있었다. 맥주순수령에는 효모가 빠져 있는데, 이는 맥주 발효에는 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양조업자들은 경험을 통해 앞서 술을 만들었던 통에 남아 있는 침전물을 그 다음 술 만드는 통에 넣으면 술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전에 만든 술 찌꺼기를 구할 수 없으면 재료를 담은 술통을 적절한 장소에서 열어둠으로써, 자연 효모가 술에 증식하게 했다. 효모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술이 잘되는 장소가 있다는 경험에 따라 술을 만들어온 것이다.

    맥주순수령이 홉의 사용을 강조한 것은 홉이 맥주 특유의 쌉쌀한 맛을 내게 한다는 미각적 이유와 함께 맥주 보존법의 관행도 작용했다. 홉 사용이 본격화하기 전 양조업자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 맥주를 상하지 않게 보존했다. 여기에는 쐐기풀, 사리풀(유럽산 독풀), 숯 검댕과 광대버섯(파리잡이 종이에 칠하는 독을 뽑았던 버섯)도 포함돼 있었다. 독초는 소비자를 빨리 취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때문에 맥주 품질 보장을 위해서라도 홉만 사용하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통일 전제조건이 맥주순수령 유지

    이런 배경에서 빌헬름 4세는 1516년 4월 23일 지배계층(Gentry)과 기사들을 바이에른 공국 내의 잉골슈타트 시(市)에 소집해 맥주 제조에 물, 홉, 보리 이외의 어떤 재료도 첨가하지 못하게 하는 맥주순수령을 공식 반포했다. 법령을 어기면 언제든지 생산된 맥주를, 아무런 보상 없이 압류 조처할 수 있다는 처벌 조항도 명기했다. 맥주순수령은 공국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확고하게 정착됐다. 그리고 전 독일에 퍼져 맥주 제조 관행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1871년 프러시아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을 포함한 남부 독일국가들과 협상해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다. 1월 18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독일 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독일 제2제국은 4개 왕국, 18개 공국, 3개 자유시 등 25개 국가와 제국령(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통일 협상을 할 때 바이에른 공국은 자랑스럽게 지켜온 맥주순수령을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지켜줄 것을 중요 조건 중의 하나로 내걸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재료로 맥주를 만들고 있던 다른 지역의 양조업자들은 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했으나 프러시아는 바이에른의 명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맥주순수령은 바이에른을 떠나 통일 독일의 중요한 맥주 제조 원칙이 되었다. 이 조처로 북부 독일에서 유행하던 체리 맥주나 향신료 맥주 등은 완전히 갈 길을 잃었다.

    세월이 흘러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다. 동독은 맥주순수령을 적당히 적용했으나 서독은 맥주순수령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서독은 1952년 맥주순수령을 맥주과세법(Biersteuergesetz)에 편입시켜 취지를 이어갔다. 서독은 서독산 맥주는 물론이고 수입 맥주도 이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벨기에와 영국에서는 맥주순수령은 서독 맥주를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영국과 벨기에 등은 옥수수나 쌀을 원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설탕 같은 기타 첨가물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불만이 누적돼 1988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가 맥주순수령에 의한 맥주 원료 제한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판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서독으로 수입되는 외국산 제품에만 적용되었다. 서독은 자국산 맥주에는 맥주순수령을 계속 적용하고, 맥주순수령을 서독 맥주의 자랑으로 적극 홍보했다.

    1990년 재통일을 이룬 독일이 1993년 맥주순수령을 둘러싸고 ‘브란덴부르크 맥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베를린 동쪽 100km 정도에 있는 브란덴부르크주 노이젤이라는 마을에서 헬무트 프릿슈가 옛 수도원 양조장에서 지역 명산인 흑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통일 후 유예 기간이 지나자 맥주순수령이 구 동독 지역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주정부는 헬무트 프릿슈가 만든 흑맥주는 맥주순수령을 어기고 설탕을 첨가했으니 맥주라는 용어를 쓸 수 없다는 제재를 가했다.

    주정부는 헬무트에게 제품 이름을 종전의 Schwarzer Bier(흑맥주)에서 Schwarzer Abt(검은 수도원장)로 바꾸라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헬무트는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2%의 설탕을 혼합하는 것은 400년이나 된 그 흑맥주의 전통이다. 커피에 설탕을 넣고 마시느냐 넣지 않고 마시느냐는 개인적인 선호도 차이이듯, 맥주에서의 설탕 첨가도 개인 취향 차이일 뿐이다. 제품의 근본적인 질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헬무트는 소송을 제기해 10여 년의 긴 재판 끝에 자신의 흑맥주 제품에 ‘맥주’란 용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 때문에 통일 독일은 엄격한 맥주순수령 정신을 약간 양보한 새 법(Vorla‥ufiges)을 공표했다. 그러나 현장의 맥주 제조회사들은 판매 전략 차원에서 맥주순수령을 고수했다.

    가장 오래된 식품법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독일의 맥주순수령에는 상당한 자기모순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밀맥주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밀맥주의 원산지가 독일 바이에른 지역이다. 이 맥주는 오랫동안 왕실과 귀족의 술로 남아 있다가, 1850년 양조업자인 조지 슈나이더가 왕실양조장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밀맥주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음으로써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양조업자가 밀맥주를 제조하게 되지만 최근까지 라거맥주의 조역에 그쳤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밀맥주에 들어 있는 효모와 단백질 등의 침전물이 자연 그대로의 맛을 추구하는 신세대의 입맛과 맞아떨어지면서 호황을 맞았다. 덕분에 밀맥주는 오늘날까지 상업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맥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밀맥주는 이름 그대로 밀을 주요 원료로 만들었다. 빛깔이 하얗기에 ‘하얀 맥주’, 독일 어원을 존중해 ‘Weizen Bier(밀 맥주)’ ‘Weiss Bier(하얀 맥주)’라고도 부른다. 일반맥주와 달리 사과, 바나나 같은 과일 향과 정향나무 같은 향신료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밀맥주는 크게 헤페 바이젠(Hefe Weizen)과 크리스탈 바이젠(Kristal Weizen)의 두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다. ‘Hefe’는 독일어로 효모를 뜻한다. 헤페 바이젠은 효모가 그대로 병에 들어 있는 것으로 밀맥주의 전형이다. 크리스탈 바이젠은 효모 때문에 혼탁하게 보이는 밀맥주에 거부감을 느끼는 소비자를 위해 효모를 제거한 맑은 밀맥주다. 그밖에 색깔이 짙은 흑맥주 종류도 있는데, 독일어로 둔켈(Dunkel)이라고 한다.

    바이에른 지역의 명산품인 밀맥주는 맥주순수령을 지키지 않은 맥주다. 그런데도 업체들은 밀맥주도 맥주순수령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표방하니, 맥주순수령이 주는 상업적 이미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맥주순수령은 현재까지 지켜지는 가장 오래된 식품 관련 법규다.

    독일은 1994년부터 4월 23일을 ‘맥주의 날’로 정해 해마다 성대한 행사를 치르고 있다. 500여 년 전 그날 빌헬름 4세가 맥주순수령을 반포한 것을 기리는 것이다. 그날의 분위기에 대해서 ‘주간동아’는 2012년 5월 7일자에 ‘닥치고 500년…순수한 맛에 캬~, 독일맥주순수령 우직하게 지켜 전 세계인 불러 모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현지 기사를 실었다.

    독일에서 4월 23일은 맥주의 날이다. 그 유래는 중세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도원 밖으로 나온 맥주가 보편화하면서 맥주 맛과 보존법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특별한 맥주를 만들려고 식물을 첨가하거나 흑맥주를 만들기 위해 검댕을 넣기도 했다. 쉬어버린 맥주에 석회가루를 섞어 맛을 중화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광대버섯이나 흰독말풀 같은 독초를 첨가해 독특한 향을 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과도한 경쟁으로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바이에른공국의 왕 빌헬름 4세는 1516년 4월 23일, 맥주 양조 때 주재료인 물과 보리, 향신료이자 방부제 구실을 하는 홉 외에 다른 재료를 쓰지 못하도록 명했다. 이것이 바로 ‘독일맥주순수령’(이하 순수령)이다.(중략)

    독일에서는 1994년부터 4월 23일을 ‘맥주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크고 작은 맥주 생일잔치를 벌인다. 이날 하루는 맥주 값을 크게 내린다. 올해도 각 도시의 유명 양조 맥줏집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맥줏집마다 시음회, 행운권 추첨, 퀴즈대회, 맥주아가씨와 함께 하는 빙고 게임, 맥주요리 시범, 맥주유람선 타기, 중고서적과 맥주 물물교환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그중에 맥주 애호가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 브라우마이스터다. 맥주 양조 장인과 함께 하는 일종의 양조장 견학이다. 독일맥주양조협회가 있는 베를린의 유명 맥줏집 브라우하우스를 방문해보니 이른 시간(점심 무렵)인데도 많은 사람이 맥주를 마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베를린에서 현역으로는 가장 고참이라는 맥주 양조 장인 미하엘 메처(68) 씨가 신참인 토마스 산데르 씨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메처 씨는 베를린공대에서 양조과학을 전공한 뒤 50년 넘게 양조 일을 해왔으며 장인이 된 지는 40년이 넘었다고 한다. (중략)

    맥주 양조 장인이라는 직업은 어떨까. 메처 씨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왜냐하면 평생 사람에게 칭찬만 듣거든요. 이곳에 온 사람들은 ‘당신이 만든 맥주가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맥주가 좋아서 마시러 온 사람들인데 맥주가 맛없다고 할 리 있나요(웃음).”

    독일인은 여전히 맥주를 사랑하고 있다. 오랫동안 지켜온 맥주순수령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다양화된 현대인의 입맛과 요구에 과거의 맥주순수령이 주는 의미가 똑 같을 수는 없지만 맥주순수령에 대한 독일인들의 순수한 열정은 변함없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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