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남양동 한마을에서 발견된 오목눈이는 자기 둥지에 뻐꾸기가 낳은 알을 품어 부화시킨뒤 정성스레 키우고 있다.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 본심과 욕심이 그것이다. 본심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기 본래의 마음이지만, 욕심은 도중에 밖에서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남의 마음이다. 본심은 변하지 않지만, 욕심은 수시로 변한다. 본심은 모두가 다 함께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지만, 욕심은 자기 몸속에만 들어있는 자기 개인만의 마음이다. 본심은 남과 공유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지만, 욕심은 자기 것만 챙기는 닫힌 마음이다.
뻐꾸기는 작은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그 뻐꾸기의 알에서 먼저 깨어난 새끼 뻐꾸기는 작은 새의 알을 모두 굴려 밖으로 던져버린다. 작은 새는 혼자 남은 새끼 뻐꾸기를 자기 새끼인 줄 안다. 새끼 뻐꾸기는 먹성이 좋다. 작은 새는 새끼 뻐꾸기에게 벌레를 잡아주느라 쉴 틈이 없다. 지쳐서 쉬려고 하면, 훨씬 커져버린 새끼 뻐꾸기는 먹이를 더 갖고 오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것을 본 작은 새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벌레를 잡으러 간다. 완전히 자란 뻐꾸기가 입을 벌리면 작은 새의 머리가 통째로 그 입속으로 들어갈 정도다. 그런데도 작은 새는 뻐꾸기가 자기 새끼가 아닌 줄 모른다. 참으로 어리석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다 자란 뻐꾸기는 날개를 치며 숲 속으로 날아가고, 작은 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참으로 불쌍하다.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이 더욱 안타깝다.
뻐꾸기를 키우는 작은새
불쌍한 것은 새끼 뻐꾸기를 키우는 작은 새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본심이 본래의 자기 새끼라면, 욕심은 밖에서 들어온 뻐꾸기 새끼다. 작은 새가 뻐꾸기 새끼를 키우느라 쉴 틈이 없는 것처럼 사람도 욕심을 채우느라 쉴 틈이 없다. 사람들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달린다. 욕심을 채우는 삶의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욕심을 제대로 채우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지 못하는 경우다. 욕심을 채우는 것이 욕구충족이고 채우지 못하는 것이 욕구불만이다. 욕구불만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바로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욕심을 채운다고 해도 곧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욕심을 채우면 행복해질 줄 알지만 욕심은 채우는 순간 더 커져버린다. 욕심을 채우고 나면 그 욕심이 훨씬 더 커지기 때문에 더 큰 불만이 생기고,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눈앞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념이 없다. 산다는 것은 산 넘어 산을 오르는 힘든 과정이다. 저 산의 정상에만 오르면 행복한 줄 알고 열심히 오르지만 오르고 나면 더 큰 산이 나타난다. 더 큰 산의 정상에만 오르면 행복한 줄 알고 또 열심히 오르지만, 정상에 오르고 나면 더 큰 산이 또 나타난다. 그러다가 인생은 끝이 난다. 속고 속아 사는 한평생이다.
새끼 뻐꾸기를 키우는 작은 새에게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본래의 자기 새끼를 키울 때만 찾아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채우는 삶에는 행복이 없다. 욕심은 채워도 불행하고, 못 채워도 불행하다. 오직 본심에 따라서 살 때만 행복이 찾아온다. 본심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는 사람이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맹자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양나라 혜왕과의 문답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어느 날 별장에서 쉬고 있는 양나라 혜왕을 찾아갔다. 양나라 혜왕은 별장의 연못가에서 고니, 기러기, 사슴, 노루 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현명한 자들도 이러한 즐거움을 알고 있습니까?”
그의 말에는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현명해도 별장에서 이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맹자는 바로 대답했다.
맹자.
“어찌 혼자만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위의 내용은 ‘맹자’라는 책에 나온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많은 글 중에서 이처럼 잘 설명한 글을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다. 좋은 사람들과 한마음이 되어 서로 사랑하며 어울리는 것이 행복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와도 어울리고 동산에 뛰노는 짐승들과도 어울려 함께 기쁨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그렇게 된 상태가 천국이다. 사람은 천국을 그리워하고 천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놓아두고 서로 헐뜯고 싸운다. 그 이유는 욕심에 빠져 있어서 그렇다. 눈앞의 욕심을 채우기만 하면 바로 행복해질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은 양나라 혜왕처럼 자기 것만 챙긴다.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은 결국 외로워진다. 권력이나 돈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들이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돈 때문이지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잃었을 때면 알게 된다. 권력이나 돈을 따라 모인 사람들과는 마음을 공유하지 못한다.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면 외롭다. 외로움 속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모든 사람과 한마음이 될 때 찾아온다.
지금의 대통령후보들이 내세우는 정책들은 사람들에게 욕심을 채워주겠다는 것들이다. 그런 정책들은 결국 사람들을 불행으로 인도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어떤 후보의 정책이 더 현실성이 있는지를 따지고 있다. 돈은 좋다. 그러나 그 돈이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된다면 불행해진다. 오직 현명한 사람의 수중에 들어갈 때만 행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작정 돈을 좋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행복은 거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행복해져야 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弘益人間이 우리의 목표
우리나라는 원래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었다. 상징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단군에 관한 기록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가장 집약해 설명해주는 자료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려보내기 위해 지상에 천국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 거기가 지금의 한국 땅이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은 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이 땅을 신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에서 신시(神市)라 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만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만족하게 산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산다. 그런 나라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 홍익인간은 모든 사람에게 다 도움이 되는 세상이고, 모든 사람이 다 만족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홍익인간은 단군 할아버지 때 실현되었다. 인도의 시성(詩聖)이라 추앙받는 타고르가 노래했던 것처럼, 당시의 우리나라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단군조선은 1500년가량 지속되다가 소멸되었고, 우리의 조상들은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구이(九夷)라 불렀던 부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단군조선이 망한 뒤에도 그 유풍은 구이에 남아 있었으므로 공자는 구이 거주지역에서 살고 싶어 했다. 공자가 구이에서 살고자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다.
“거기는 누추한 곳인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사시려고 그러십니까?(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곳에는 군자들이 살고 있다. 그러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曰君子居之 何陋之有).”
이 말은 구이에는 군자들이 살지만, 중국에는 군자들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꿈은 군자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그 모델은 단군시대의 홍익인간이었다. 그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자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대동에 대한 공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큰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가 모두의 것이 된다. 어질고 유능한 자를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미덥게 만들고 화목하도록 유도하게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자녀만을 자녀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노인은 삶을 잘 마감할 수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다 일자리가 있어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모두 잘 자랄 수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자녀 없는 노인들, 그리고 폐질(廢疾) 걸린 자들까지 모두 잘 봉양받을 수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어울리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이 없었다. 돈이나 재물이 땅에 떨어져 버려지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것을 주운 자가 갖는 일은 없었다. 힘든 일은 자기가 먼저 나서서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불만을 토로하는 모의가이 일어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과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문을 밖으로 열어두고 닫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를 대동(大同)이라 한다(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 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위의 내용은 지상에서 이루어진 천국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천하는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천하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천하의 주인이다.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다.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 주인공이다. 사람의 욕심으로 보면 장미꽃은 가치가 있지만, 오랑캐꽃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장미꽃 100송이를 합해도 오랑캐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흉내 낼 수 없다. 오랑캐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태양이 계속 비추었고, 지구가 쉬지 않고 돌았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었다. 천둥도 쳤고 소쩍새도 울었다. 말하자면 전 우주가 동원되어 오랑캐꽃 한 송이를 피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오랑캐꽃 한 송이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이처럼 천국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주인공이라 해서 모습이 다 같고 능력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모습과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물체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그중에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가 나서서 사람들을 한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도록 가르친다.
공자의 천국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챙기지 않고 자기 자녀만 챙기지 않는다. 모두의 부모를 자기 부모처럼 받들고 모두의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보살핀다. 그래서 노인들과 젊은이들, 외로운 이와 병든 이들까지 모두가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특히 천국에서는 노인들이 할 일을 다 마치고 죽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긴다. 모두가 하나로 여기고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살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사는 방식은 늙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늙어서 할 일을 마친 사람은 자기의 몸이 죽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마치 할 일을 다 마친 잎들이 곱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곱게 늙어 행복하게 죽는다. 그렇게 죽는 것을 공자는 ‘잘 마친다’는 의미에서 ‘종(終)’이라고도 하고, ‘졸(卒)’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와 다르다. 힘 있는 자가 힘든 일을 찾아서 하고, 힘없는 자가 편한 일을 찾아서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최고의 능률을 발휘한다.
홍익인간이나 대동사회는 원래 없던 것을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하느님이 점지한 천국이었다. 그런 나라가 지금은 천국과 다른 나라가 되었다.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마음은 안타깝다. 이 안타까움이 한국인의 한(恨)이다. 이 한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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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 그를 위해 정치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한국인이 이토록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 대통령선거일이 다가온다. 이제 각 후보의 정치 목표가 달라졌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의 염원인 홍익인간의 건설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