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이렇게 오래되고 느린 나라에 무얼 배우러 왔어요?”

프랑스 사회의 무능과 비효율을 보다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11-20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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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몇 주일 파리에서 지내면서 프랑스 사회의 문제점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비판적 시각이 더해졌다. 프랑스 친구들은 프랑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춰야 진정한 프랑스 애호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오래되고 느린 나라에 무얼 배우러 왔어요?”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이 있는 파리 시내 앵발리드 앞의 어느 카페.

    오랜만에 파리 땅을 다시 밟았다. 서울생활과 파리생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상 언어의 변화다. 파리에 오니까 물건을 살 때도 프랑스어로 말해야 한다. 길거리의 표지판도 프랑스어로 쓰여 있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도 프랑스어가 나온다. 프랑스 친구들을 만나면 당연히 프랑스어로 이야기한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달라지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달라지면서 뇌세포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프랑스어로 말할 때는 시제와 인칭에 따른 동사의 변화, 남성과 여성, 단수와 복수를 정확하게 구별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프랑스어로 듣거나 말하거나 읽거나 쓰다보면 내 머리의 뇌세포가 촘촘하고 빽빽하게 정리되는 것 같다.

    그렇게 프랑스어로 말하다보면 ‘서울에서의 나’와는 다른 ‘파리에서의 나’가 된다. 프랑스어로 말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프랑스 사람들의 ‘문화문법’을 따르게 된다. 프랑스어로 말하다보면 연령과 성에 따른 차이가 줄어들고 남의 눈치를 덜 보게 되며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프랑스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를 동시에 구사하던 러시아 출신의 작가 나보코프는 프랑스어는 귀에 아름다운 언어이고, 영어는 지적인 언어이며, 러시아어는 가슴에 호소하는 언어라고 말했다. 적절한 비음이 들어 있고 문장의 끝을 올리는 프랑스어의 어조는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경쾌하게 만든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하면서 자유로움을 누린다. 프랑스어로 된 글을 읽을 때면 현실을 벗어나 마치 다른 나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 나라에서는 서울에서 느끼던 온갖 무거운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날개가 생긴다. 몸이 가벼워진다.

    그런데 몇 주일을 파리에서 지내면서 프랑스 사회의 문제점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내가 오랜 세월 프랑스를 좋아하는 ‘프랑코필(francophile)’이라고 하지만 프랑스를 무조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 17년 동안 살아본 나의 경험은 프랑스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비판의 시각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비판적 프랑스 애호가(francophile critique)가 되었다. 프랑스 친구들은 프랑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추어야 진정한 프랑스 애호가라고 말한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보는 파리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침체되고 활기가 없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뉴스는 경제위기, 자동차 판매 대수 감소, 공장폐쇄, 해고, 실업률 증가 등의 소식으로 가득 차 있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지하철 객차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된 동유럽 이민자들이 조야한 반주 악기를 들고 다니며 귀에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카페 지하층에 있는 화장실에 동전을 넣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점점 더 늘고 있다. 노숙자들의 화장실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거리 한구석에는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단체의 천막이 보인다. 어둠이 내리면 길거리에 내놓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리의 안정된 중산층이 사는 동네에는 똑같은 쓰레기통을 한 사람이 뒤지고 간 다음 다른 사람이 와서 또 뒤진다. 그렇게 쓰레기통 뒤지기가 여러 번 계속된다. 버린 물건을 수집해 가져다 파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행으로 소수의 부자는 더 부유해졌지만 중산층을 포함한 다수 사람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풍경 #64 파리 드골 공항에서



    1982년 내가 프랑스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파리 남쪽의 오를리공항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대한항공은 드골공항으로 비행장을 옮겼다. 당시로는 최신식의 화려한 공항이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을 사용하면서부터는 드골공항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올 때 여권 검사를 하는 창구가 열 개나 되는데 두 개만 열어놓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여권 검사를 마치고 짐을 찾는 시간도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렸다. 비행장 대합실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10유로짜리 지폐를 냈는데 카페 종업원은 거스름돈이 없다고 투덜대더니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거의 5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서비스의 질과 속도에서 드골공항은 인천공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서는 모든 일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된다. “고객이 왕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상점, 식당, 카페에 가면 종업원들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친절하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다르다. 물론 고급 식당이나 명품 매장은 예외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식당과 카페의 종업원들은 불친절하고 서비스도 매우 느리다. 관공서에 일이 있을 때 서울에서는 몇 분 만에 처리될 일이 파리에서는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도 프랑스는 불친절하고 일처리가 느린 나라다.

    서울에 부임한 어느 대사 부인이 대사관저에 블라인더 설치를 주문했더니 이틀 만에 모든 일이 다 끝나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학술 모임에서 프랑스 정보통신부 장관 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남편을 동반해 한국의 정보통신사업 현황을 시찰하고 왔다는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렇게 오래되고 느린 나라 프랑스에 무얼 배우러 왔어요?”

    풍경 #65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

    2002년부터 2011년까지 파리에 거주할 때 동네에 있는 소시에테 제네랄(Societe Generale)은행을 주로 이용했다. 2011년 파리를 떠나면서 사용하던 계좌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열어두고 갔다. 그런데 신용카드를 새로 받으려면 주소가 필요하다고 해서 현재 머무르는 집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편지는 이틀이면 받아볼 수 있다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은행으로 갔더니 편지를 파리 주소가 아니라 2011년 파리를 떠나며 남겨놓았던 서울 주소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주소로 다시 보내달라고 이야기해놓고 기다리는데 다시 이틀이 지나도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신용카드가 있지만 비밀번호를 전달받지 못해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며칠 더 계속되었다. 다시 은행으로 갔더니 며칠 전에 그 은행에 강도가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상적인 업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미루어져 신용카드 사용은 2주일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은행의 현금 인출기가 고장이 나서 며칠씩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파리 은행 조직의 비효율성, 그리고 은행 직원들의 무책임성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우리나라 은행 직원들의 친절함과 효율성이 생각났다.

    풍경 #66 속 썩이는 인터넷 연결

    파리에 도착해 프랑스 친구 주느비에브가 빌려준 단칸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건물 안마당에 위치한 작은 창고를 개조해 만든 이 스튜디오의 천장 높이는 서울의 아파트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한구석을 2층 공간으로 만들어 거기에 ‘메자닌’이라고 부르는 침실을 만들어놓았다. 작은 공간에 화장실, 욕실, 주방, 책상, 벽장, 소파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이어서 출입구부터 운치가 있었다. 텔레비전, 전화, 인터넷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노트북으로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동네에 있는 오랑주(Orange) 통신회사 지점에 가서 문의했더니 해결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그대로 해보아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틀 후에 다시 통신사 지점에 갔다. 지난번에 있었던 점원은 어디로 가고 다른 점원이 와 있었다. 사정을 말하니까 지난번에 가르쳐준 대로 했으면 되어야 하는데 연결이 안 된다면 그건 컴퓨터의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의 컴퓨터 회사에 국제전화를 걸어 물어보니까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다시 통신사 직원에게 가니까 그러면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큰 지점으로 가보라고 한다. 거기에는 유능한 기술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더니 그 기술자가 휴가여서 이틀 후에 돌아온다고 한다. 이틀 후에 다시 가니까 기술자가 있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터넷을 연결하는 라이브 박스(Live Box)와 내 컴퓨터를 함께 가지고 오라고 했다. 다음 날 두 가지 장비를 다 가지고 갔더니 간단한 호환장치 조정으로 내 컴퓨터와 인터넷을 연결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비용을 19유로나 내라고 한다. 거의 열흘 만에 인터넷을 연결해주고는 비용까지 받는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게 프랑스 사회의 현주소인데. 지난해 프랑스를 떠나 서울로 이사해서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인터넷을 연결하기 위해 통신사에 전화를 했더니 당일로 와서 연결해놓고 간 일이 생각났다.

    풍경 #67 버스에서의 도중하차

    어느 날 오후 나시옹 광장 부근을 산책하다가 20구 구청 앞에서 69번 버스를 탔다. 그곳이 종점이어서 유리창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스가 떠나길 기다렸다. 몇 분 후 버스가 출발했다. 유리창 밖으로는 파리의 시내 풍경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와보는 파리를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했다. 버스는 마레 지역을 지나 센 강을 건넜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센 강변에는 자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센 강 우안에서 좌안으로 넘어선 버스가 생제르맹데프레 대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버스는 멈추어 서서 더는 가지 않는다. 운전사가 자기 자리에서 나와 모든 승객은 내려 다음 번 오는 버스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탈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도중에 충분한 설명도 없이 내려서 뒤차를 타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이 버스는 더 이상 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분명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동어 반복을 한다. 파리의 지하철과 버스를 비롯한 공공운송수단은 RATP라고 하는 공공서비스 회사에서 운영한다. 서울에 비교하면 파리 지하철공사 직원들은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잡아내는 데는 열심인지 몰라도 보통 승객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관심하고 불친절하다. 지하철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르쳐주는 정보가 역마다 다른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직원들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풍경 #68 콩포라마 가구점에서

    “이렇게 오래되고 느린 나라에 무얼 배우러 왔어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나라에서’포스터가 파리 시내 가판대에 붙어있다.

    스튜디오에 있는 의자 등받이가 불편해서 센 강변 퐁네프 다리 앞에 있는 콩포라마(Conforama)라는 가구전문점에 갔다.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가구가 일층과 이층의 넓은 매장에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들어온 김에 소파, 침대, 장식장, 책상, 식탁, 의자 등 다양한 가구를 구경했다. 그러고 나서 전시장 한 쪽 구석에 있는 접이식 간이의자 두 개를 샀다. 좁은 스튜디오 공간에 큰 의자를 들여놓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자 두 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손님이 많은데 여섯 개의 계산대 가운데 두 개만 열려 있었다. 직원의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계산대에 거의 도착했다. 내 앞 사람이 직원에게 뭐라고 항의했다. 진열대에서 가지고 온 물건에 붙여놓은 가격과 직원이 말하는 가격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직원이 자신의 실수라고 말했다. 자기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만 잘못 처리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온 의자의 가격도 전시장의 가격과 계산대의 가격이 달랐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그대로 낼 수는 없었다. 계산대의 직원은 바코드를 통해 컴퓨터에 입력된 가격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나도 그대로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계산대의 직원은 매장의 관리인을 불렀다. 관리인은 내가 산 의자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가서 가격을 확인하고 돌아와서는 내 말이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층 사무실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도 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컴퓨터에 입력된 가격을 내고 빨리 처리하고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메시지 같았다. 나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업체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리인에게 그러면 2층 사무실로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까짓 1유로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하면서 자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준다. 그렇게까지 나오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무실로 가지 않고 물건을 사서 나왔다.

    나중에 프랑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콩포라마 가구점이 어려운 상태여서 직원 수를 줄이는 과정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매장 관리인이 나를 데리고 중앙행정 사무실로 가면 실수가 드러나고 그것이 자신의 업무 충실도 평가에 반영될까 우려해 그냥 자기 주머니에서 1유로를 꺼내서 준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프랑스 사회의 무능과 비효율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풍경 #69 서점에서 책을 살 때

    파리에 온 관광객들은 흔히 고급의류, 보석, 핸드백, 구두 같은 제품을 산다. 서울에서보다 가격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항에서 부가가치세를 환불받는다. 파리에서 내가 사는 물건은 식료품 이외에는 책이 대부분이다. 슈퍼마켓에서는 무조건 기계에서 찍어 나오는 영수증을 주는데 파리의 몇몇 서점에서는 현금으로 내면 영수증을 주지 않는다.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기계로 찍은 영수증이 아니라 별도의 종이 영수증에 써준다. 어떤 서점 주인은 영수증 처리 기계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부가가치세를 안 내려는 수작인 것 같다.

    파리에 사는 한국 동포들은 대개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소수민족으로 외국에서 살아가는 게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포들이 보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않으며 금방 들통 날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우기는 성향이 있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약한 외국 사람일 경우에는 일단 얕잡아보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직업정신의 해이, 자기가 잘못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무책임성,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태도,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넘기면 그만이라는 짧은 생각, 약자 앞에서는 강하고 강자 앞에서는 약해지는 비굴한 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자기기만. 이런 정신상태와 태도가 프랑스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한 외국인들은 프랑스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며 프랑스 사람들끼리도 불신의 상태에서 각자 자기 이익만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가 없다.

    그래도 파리에 사는 주민의 10%가 외국인이고 파리를 찾는 관광객의 숫자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건 프랑스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다 해도 찬란한 역사와 문화, 예술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돈이 아무리 많은 부자라도 문화와 예술을 모르고 역사의식과 철학이 없으면 금방 무시하고 내려다본다.



    풍경 #70 그랑 팔레의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파리에 사는 가장 큰 이점은 풍부한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는 수준 높은 공연과 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계속되는 문화의 도시다. 얼마 전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철제와 유리로 지어진 ‘그랑팔레’에서는 프랑스를 사랑했던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전이 열렸다. 평소에 호퍼의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그림을 좋아 했기에 어느 날 아침 일찍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직 전시회장 문도 안 열었는데 관람객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런데 예약을 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같이 예약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들여보냈다. 그래도 줄을 이탈해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파리 사람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줄을 서는 일에는 끝없는 인내심을 발휘한다. 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내 앞에 긴 줄이 있다. 날씨가 쌀쌀해서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내 앞에 있던 스페인에서 여행 왔다는 젊은 청년이 견디다 못해 입장을 포기하고 사라진다. 그래도 내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음악 덕분이다. 전시장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서 거리의 악사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때는 독주자였거나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남루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연주하는 음악이 없었더라면 나도 스페인 청년처럼 입장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전시회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커다란 화면에 1920년대 뉴욕 항구를 찍은 흑백 활동사진이 돌아가고 있었고 화면 중간 중간에 휘트먼이 쓴 시의 구절이 나왔다. 2층에서 시작된 전시는 3층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끝난다. 호퍼의 초기 작품과 일러스트레이션, 판화, 수채화 작품들에 이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뉴욕의 밤 풍경을 그린 ‘밤의 올빼미들(Nighthawks)’을 비롯해 호텔방, 기차의 객실, 사무실, 집, 도로변의 주유소, 등대와 철도길 등을 그린 그의 대표작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정신없이 그림에 빨려들어 갔다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밖에는 아직도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파리에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교양층이 넓다.

    풍경 #71 파리에서 본 두 편의 한국영화

    영화 관람은 누구라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가의 방식이다. 최초의 영화는 프랑스 사람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흑백 무성영화다. 파리에서는 최신작을 상영하는 영화관이 많지만 그와 더불어 DVD가 아니면 보기 힘든 오래된 영화들만 상영하는 영화관도 있다. 라틴 구역에는 ‘샹포’와 ‘필모텍’이라는 두 개의 오래된 영화 상영관이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일간지 르몽드를 사서 읽는데 문화면에 김기영 감독의 1961년 작품 ‘하녀’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어느 영화애호가가 만든 재단에서 자금을 지원해 하나밖에 없는 ‘하녀’의 원본을 입수해 망가진 부분을 복원해 처음 상영한다는 소식이었다. 오후 4시 30분에 시작하는 ‘하녀’를 보러 필모텍으로 갔다. 1961년 만든 영화치고는 매우 모던한 영화였다. 르몽드의 기사는 ‘하녀’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검열이 약할 때 만들어진 영화로서 한국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며칠 후 생제르맹데프레 광장에 있는 영화관 앞을 지나가다가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In Another Country’라는 영어 제목 아래 한국 남자 배우 유준상과 프랑스 여자 배우 이사벨 위페르가 해변에서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매표구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다음 날 저녁에 이 영화관에서 개봉 전 시사회가 열린다고 알려준다.

    다음 날 저녁 예매한 표를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바로 내 앞에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앙드레 뒤솔리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영화관 안에는 프랑스 영화계 인사들이 대거 앉아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이사벨 위페르가 나와 짧은 소개말을 했다. 자기는 홍상수 감독의 매력에 끌려 아무 조건 없이 촬영에 임했으며 홍 감독이 고다르와 마찬가지로 시나리오 없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은 아무렇게나 찍는다는 뜻이 아니라 평소에 심사숙고하던 구성이나 대사를 촬영 현장에서 현장감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해명을 했다. 영화가 끝나고 노란색 자막이 추상화처럼 눈앞에 걸려 있는 순간 관객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고 나서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자 무대는 칵테일 파티장으로 변했다. 샴페인과 포도주 그리고 고급 식료품점에서 배달해온 다양한 요리가 차려졌다. 나도 샴페인을 한 잔 마시러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사벨 위페르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영화관을 나왔다. 파리의 밤거리에 노란 가로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풍경 #72 파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국 예술가들

    작가 이호철은 1960년대에 이미 ‘서울은 만원이다’라고 썼다. 서울은 확장을 거듭해 인구 1000만이 넘는 세계적인 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는 1860년대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인구도 200만 명 선에서 멈추어 있다. 파리의 크기는 서울의 6분의 1이다.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데 파리는 정말 작다. 파리 시내를 걷다보면 아는 얼굴들을 자주 만난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총리, 전 문화부 장관 자크 랑, 자크 투봉 등 얼굴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정치가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처럼 파리 시내를 걸어 다닌다. 서울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잘 가지 않는 파리 동북부의 벨빌이라는 동네로 산책을 갔다. 이곳은 19세기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다가 20세기 들어서는 유대인과 북아프리카 이민객들이 살았고, 지금은 중국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파리의 달동네다. 우선 앙드레 부르통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다니던 뷔트 쇼몽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다음 파리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벨빌 언덕에 있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페리에’를 한 잔 마시고 벨빌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인종이 섞여 있었고 토요일 오후라서 식당과 카페, 상점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언덕길을 다 내려와 벨빌 지하철 입구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더니 앞에 가던 영화배우 윤정희는 못 들은 채 그냥 지나가고, 뒤쫓아가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안녕하세요!”라고 답례를 하고 지하철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파리에 사는 오래된 프랑스 친구를 한국 식당에 초청했다. 그런데 오른쪽 테이블에서 70대로 보이는 노신사 한 분이 젊은이 대여섯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힐끗 보니까 파리의 죄드폼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연 세계적인 화가 이우환 화백이었다.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젊은이들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풍경 #73 프랑스 친구들의 한국사랑

    이번 파리 체류에서 내가 한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친구들과의 만남이다. 그동안 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 같은 한국 친구를 두었으니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지만 세계에서 한국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해졌고 일본, 한국에 이어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가는 일반적 경향도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되고 느린 나라에 무얼 배우러 왔어요?”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나에게 스튜디오를 빌려준 주느비에브는 파리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다가 붓글씨로 쓴 족자 두 개를 사다가 거실 벽에 걸어놓았다. 한글로 쓴 글씨가 아름다워서 샀다고 한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그녀의 집에 갔더니 나에게 그 뜻을 해석해달라고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과 “세상에 숱한 언어 있다 해도/ 표현할 수 없고/ 만 가지 꽃으로도/ 견줄 수 없는/ 맑은 향기 풍기는 당신은/ 나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로 끝나는 이영희의 시였다. 두 편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주었더니 족자를 사진 찍어서 카드를 만들고 카드 속지에 내가 번역한 시를 프린트해서 붙였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에게 보내는 카드로 쓸 거라고 하며 맑은 웃음을 지었다. 파리에는 그런 교양 있는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그들이 프랑스를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 만들고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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