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 조달 방안, 이행 기간 없는 선심성 정책의 실체
- 증세 없는 복지 확대 약속의 함정
-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어울려야 하는 이유
- ‘다 해주겠다’ 대신 ‘함께 해나가자’고 말하는 지도자
10월 13일 과학기술나눔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안철수·문재인·박근혜 대선 후보.(왼쪽부터)
각 후보가 열심히 정책공약을 발표한다. “내가 당선돼 대통령이 되면 무엇 무엇을 고칠 수 있다”고 호언한다. 그래야 표가 오겠지만 유권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정말 경제민주화가 되고 재벌구조가 파괴되는 것인지 잘 믿기지 않는다.
경제에 관해서만 말하면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의 공통점은 경제민주화다. 특히 골목상권 보호와 재벌총수의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등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출자총액제한제, 지주회사 등 재벌지배구조 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차이가 크다. 박근혜는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견제를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문재인과 안철수는 좀 더 근본적인 입장이다.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바꾸려 든다. 문재인과 안철수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문재인은 ‘3년 내 순환출자 금지’를 통해 즉각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하고, 안철수는 재벌개혁위원회라는 완충장치를 통한 단계적인 지배구조 개선을 주장한다.
매니페스토 실종
안철수의 제안은 한마디로 아이디어와 자원의 융합이라는 ‘혁신경제’다. 그는 또 경제민주화의 7대 영역으로 ‘재벌개혁 7대 과제’를 제시한다. 편법 상속·증여 방지, 총수 등 특수관계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형사상 제재, 금산분리 강화,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규제 강화, 재벌 지배구조에 대한 통제 강화, 일반집중 폐해 시정 및 시스템 리스크 관리 등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남·삼성·서울대 등 지배계급을 바꾸겠다고 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요란스러웠지만 성사되지는 않아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같았다. 구조는 초기 패턴(initial pattern)이 유지되고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t)이 강해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9월 5일 열린 ‘100% 국민행복 실천본부’의 총선 공약 법안실천 국민보고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우여 대표, 박 후보, 이한구 원내대표.
문재인의 ‘공정경제’는 안철수에 비해 분배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채무자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안심·공정·회복 금융’을 가계부채 해결의 세 가지 원칙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이자제한법·공정대출법·공정채권추심법 등을 제·개정하는 ‘피에타 3법’을 주장한다. 또 ‘새로운 정치’의 목표가 일자리 혁명이라면서 “성장과 복지, 경제민주화는 모두 일자리에서 시작되고 일자리로 귀결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제시한 정책이 ‘만·나·바’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고, 나쁜 일자리는 바꾼다는 뜻이다. 더불어 포용·창조·생태·협력 등 4대 성장전략도 제시한다.
문제는 대선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공약 내용을 보면 이행 기간이 명시돼 있지 않고 재원 조달 계획도 ‘추후 발표하겠다’ 정도로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니페스토(manifesto·대국민정책계약)가 실종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박근혜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복지 공약을 내놓았지만, 구체적인 안은 없고 재원 조달도 추후에 하겠다는 입장이다. 안철수는 ‘국민이 신뢰하는 든든한 복지체계’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노인 빈곤율 제로, 보육의 공공성 강화, 의료 민영화 반대’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재원 대책에 관해서는 역시 ‘정부 예산의 자연스러운 증가분을 우선 사용한다’고 할 뿐, 복지에 필요한 예산을 얼마로 잡고 있는지조차 밝히지 않는다. 어떤 불요불급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줄여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문재인 후보의 계획은 그래도 비교적 구체적이다. 0~5세 무상 보육과 전 계층 무상 의료, 기초노령연금 100% 인상, 반값 등록금 실시 등이 그것이다. 재원은 재정구조 개혁, 복지 전달체계 개선, 그리고 조세 개혁으로 마련한 연평균 가용 재산 35조 원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대통령의 한계
세 후보 모두 복지 확대를 추구하면서 증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국민을 위하고 국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만 할 것이 아니라 증세로 인해 국민 부담이 이렇게 될 텐데 그래도 좋은지를 물어야 한다.
일자리 창출 공약 역시 세 후보 모두 구체적이지 않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추진을 약속하지만, 재원 조달 방법에 대해 박 후보는 ‘추후에’, 문 후보는 ‘일반회계 및 기금활용을 통해’, 안 후보는 ‘불요불급한 예산 절감 및 우선순위조정 등을 통해’라고 밝혔을 뿐이다. 구호의 성격이 강하고, 선심성 정책 이상이 아니다.
올해 한국의 복지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9.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시대적인 흐름에 맞춰 예산을 늘려야 하지만 증세의 벽에 부딪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매 환자나 독거노인 등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후보들은 당선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책을 내놓지만, 이를 실현시킬 법과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는 건 쉽지 않다. 산 너머 산이다. 집권당 안에서도 이견이 속출하니 야당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국회는 국가 대계에 상관없이 의원들끼리 표를 나누어 갖는 로그 롤링(log-rolling)이나 투표거래를 떡 먹듯 한다. 서로 밀어 주고, 자신의 지역 이익 챙기기를 다반사로 한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전체 법안 통과 비율이 15.2%에 불과한 것을 보면,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쉽게 알게 된다. 농산물 원산지 표시, 전통시장과 상점가 육성, 증권거래세법 등 민생과 직결되는 법안들이 세월만 보내다 다음 국회로 미뤄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 관료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른다. 국회에 가서 살면서 관련자 설득에 진력한다. 그래도 굳건한 의회권력을 청와대가 이기지 못하는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통령후보 때는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유권자를 유혹한다. 또 청와대에 들어가 앉으면 세상이 내 것인 양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부하 격인 장관조차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통령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부처에 돌아가면 자부서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관료들 말에 밀린다.
행복한 사회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아랫줄 가운데)가 10월 11일 열린 ‘공존 공생의 경제민주주의’ 경제민주화 타운홀미팅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국민 각자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데 나라가 정책으로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미국의 언론인 에릭 와이너는 저서 ‘행복의 지도’에서 나라마다 행복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행복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삶의 양식, 그리고 현재의 정치 상황이나 자연환경 등의 여건과 관련이 깊다. 관대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네덜란드에서 행복은 타인과 공유할 때 가능하다. 네덜란드와 정반대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스위스인은 행복의 원천을 시기심을 줄이는 것에서 찾는다. 행복이 국가의 최대 목표인 부탄은 돈만이 절대선이라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거부한 최초의 국가로 정신적인 면에 치중하고, 행복은 집단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국은 작은 도시 ‘슬라우’에서 주민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실험을 한 ‘슬라우 행복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듯 훈련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나라다. 미국인은 이사 다니는 것을 행복추구의 방법으로 알기 때문에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산다. 이렇게 행복은 나라마다 다르며, 문화적으로 적합해야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또 행복의 열쇠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있다. 일본 고베대는 실험을 통해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밝혔다. 미국 시카고대 연구팀이 5만 명을 조사한 뒤 얻은 결론도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변호사, 의사, 은행가보다 성직자, 물리치료사, 간호사, 소방관이 훨씬 행복하다. 이를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표현한다. 남을 돕는 일, 남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일이 행복이라면 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차지한 위치보다 사회 전체의 질이다. 행복의 의미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남을 위해 봉사할 때 행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라면 더 큰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리더십이 ‘모두를 위한(sed nobis)’ 봉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대선 후보들은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회 전체의 질과 격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번 선거에 실망하는 것은 후보 중 위대한 리더를 찾기 쉽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내 착각일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이승만·김구·신익희·조병옥·송진우·장덕수·윤보선·장면 등 쟁쟁한 리더가 있었다. 민주투쟁에 앞장 선 리더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어려운 대과(大過) 시대에 사상, 철학, 이념이 깊어 나라를 바르게 이끌 지도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안철수는 비전선언에서 대한민국을 ‘궤도를 벗어난 아폴로 13호’에 비유하고 각 부처와 전문가, 그리고 국민의 현장의 목소리가 함께 반영될 때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열린 광장’으로서의 플랫폼(platform) 정치를 주장한다. 플랫폼 정치는 국민이 발의하고 전문가가 도와주며 정치인이 성실하게 이행하는 새로운 미래 정치 시스템이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수평적인 네트워크 정치조직에 해당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문제가 술술 풀릴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문재인 또한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저서 ‘문재인 스타일’에서는 “상대방과 자신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그것에 근거해 손을 잡아 아군의 힘을 확대, 강화했다”고 말한다. 이를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 즉 ‘다른 것이 있어도 같음을 추구한다’는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리더들은 예외 없이 통합을 외쳐댄다. 박근혜도 대통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승리한다 해도 국회가 구성된 뒤 각 당은 지속적으로 충돌할 것이 뻔하다. 남북관계 이슈, 한미 FTA, 재벌개혁, 무상급식 등의 문제에서 불협화음이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통합을 위해서는 경쟁에 대한 인식도 변해야 한다. 공존을 위한 경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역대 대통령이 모이는 ‘대통령 클럽(The Presidents Club)’이 있다.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 출범에 맞춰 발족한 이 클럽은 백악관 길 건너 라파예트 스퀘어에 자리 잡고 있다. 전직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할 때 이곳에 유숙하기도 한다. 현직은 거기서나 아니면 집무실(Oval Office) 옆방에서 전직을 만나 정책조언을 듣는다. 1981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국상에 갈 포드, 카터, 닉슨 전직 대통령이 미리 만난 곳도 여기다. 이들은 정적(政敵)이었지만 농담하며 서로 격려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빌 클린턴은 닉슨이 서거 직전 보낸 편지를 두고두고 읽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전직 대통령을 집무실로 초대해 러시아와 중국 문제, 오벌 오피스를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은지 등에 대한 고견을 듣기도 했다. 앞으로 이 나라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한 전직들과 어울려 지혜를 짜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전·현직 대통령들은 청와대에서 점심을 먹는 게 고작이다. 지극히 의례적인 만남이다. 구체적인 행동, 그것도 여야가 자주 화합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국민이 느끼는 통합의 온도는 상승한다. 모든 것이 공존을 위한 경쟁이라야 보람이 있다.
정의와 공정
리더가 필요한 것은 정의를 추구하고, 공정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 사목자인 정진석 추기경은 2011년 신년메시지에서 “세상에는 흑색이나 백색만 있지 않고 형형색색이 존재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지만 세상을 흑백으로만 판단할 때 공동체는 화를 부르고 불행해집니다. 사람은 자신만 옳고 정의롭고, 다른 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도 세상에 흑과 백으로 완연히 구별되는 것은 없다고 했다.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벗어나서 세상에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색들의 다름을 존중하며, 그 과정에서 ‘옳음’을 사유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의로운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74%가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고 답했을 정도다. 이름부터 ‘공정’을 내세운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조사하고 감독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과 재벌의 소송이 벌어졌을 때 재벌 편을 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첫째, 반칙사회에서 규칙사회로 가야 한다. 추상적인 도덕과 윤리를 말하기 전에 법과 질서부터 굳건히 자리를 잡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층 인사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기득권층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탈세, 병역기피,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등을 자행한다. 둘째, 공개적이고 예측 가능한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말처럼 병원, 은행, 우체국 등에서 하는 번호대기표 제도 같은 것이 보편화돼야 한다. 사회적인 신뢰는 이와 같은 투명한 절차 등을 통해 쌓인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정의 실현의 관점에서 성공한 정책이자 제도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1960년 케네디의 연설과 2008년 오바마의 연설 내용을 인용해 공동체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주의를 내세우며 미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샌델은 개인의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샌델이 생각하기에 합의만으로는 의무가 생기지 않는다. 자율과 호혜가 따라야 한다. 자율적인 행동은 자신을 존중하며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유행동이 도덕적인 행동이고 이것이 정언명령적 행동이다. 흥미·바람·욕구·기호 같은 경험적인 요소로 도덕이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의의 원칙도 마찬가지여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특권 없는 사회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10월 30일 열린 ‘행복한 아이를 위한 엄마들 간담회’에 참석해 어린이들과 함께 티셔츠에 핸드 프린팅을 하고 있다.
안철수는 부산대 초청 강연에서도 정의와 공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는 달리기를 할 때 첫째로 같은 출발선에 서고, 둘째로 신호가 오면 열심히 같이 달리고, 셋째로 결승전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정이 잘 지켜지는 게 정의로운 사회다. 즉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에 서고, 경쟁을 할 때 반칙이나 특권이 없고, 결승선에서 패자에게 다시 제도적인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한 공정에 대해 말하면서 공정의 반대말은 특권이며 경쟁에서 공정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특권이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때 특권에 관한 사례로 ‘아웃라이어’ 저자 맬컴 글래드웰의 ‘매튜 효과(Matthew effect)’를 든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 중에 1월부터 3월생이 많은 이유는 1월 1일을 선수 선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를 같은 나이에 두고 경쟁했을 때 한 살 차이는 발육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앞에 있는 달 출생자가 많이 뽑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로 뽑히고 난 뒤 교육과 연습의 정도에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실력 차이가 커진다. 이렇게 불평등한 차이, 불평등한 제도 때문에 어떤 사람이 특권을 부여받으면 그게 끝까지 가게 되는 것이 ‘매튜 효과’이고,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과정에서 특권을 없앤 뒤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며, 사회 구성원은 그렇게 나온 결과에 대해 승복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누구보다도 대통령은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를 꾸려야 한다. 그러려면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바람직한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선 후보들은 ‘이것 해주겠다’ ‘저것 해주겠다’고 선심만 쓰려고 하지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라는 표현만 하지 내용이 없다. 어떻게 이룩하겠다는 방법론이나 전략도 없다. 이들의 기본 철학을 들은 적은 더욱 없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물신주의에 빠져 있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려는 지배의 리비도가 팽배한 현실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철학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이상과 현실
대선 주자는 모두 표 구걸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 만들겠다’ ‘뭐 고치겠다’ 약속하는 품이 과장 광고하는 기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를 테면 정치개혁이 그렇다.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 거면 지금까지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무능하고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나도 17대 국회 때 국회정치개혁협의회 위원장을 하면서 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을 고치려고 많이 애쓴 기억이 난다. 그때 ‘오세훈법’을 더 현실적으로 고치기 위해 법 개정에 관한 제의도 많이 했다. 지방의회 의원과 의장의 정당공천 문제, 국회의원 정수 문제, 정당 후원금 문제 등등 다루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대선 후보들이 말하듯 말은 쉽지만 현실은 어려웠다. 이번 대선 후보 중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또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개헌과 국회의원 정수에 관해 좋은 안을 내놓으라고 큰소리치겠지만, 위원회 활동으로 그치고 말 것이 뻔하다.
대선 주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는 현실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힘들다, 그러나 여러분이 도와주면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와 오바마는 유권자들에게 ‘국가를 위해 국민이 뭐를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라’ ‘국가에 국민인 내가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런 자세를 떠올리면 우리 정치인도 저자세로 일관할 일이 아니다. 국가 구성원도 함께 책임져야 할 것이 많으니 요구하고 또 요구하며 난마처럼 얽힌 국가와 사회의 온갖 문제를 같이 풀자고 호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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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행복해지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정치인은 로널드 잉글하트 미국 미시간대 교수가 하는 주장을 되새겨야 한다. 즉,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으면 그게 3만이든 4만이든 국민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웰빙’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또 ‘경제민주화’ 등의 구호로 국민의 마음을 얻으려는 대신 경제성장 기준을 국내총생산(GDP) 말고 ‘진정진보계수(GPI·Genuine Progress Index)’로 잡아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리더십은 무대 위와 아래, 무대 앞과 뒤를 가리지 않는다. 구경꾼 따로, 뒤에서 고생하는 스태프 따로 있지 않다. 내가 무대 위에 섰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도 무대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고 또 호소해야 한다. 그런 인물이 이번 대선 후보 중에 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