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혼인 중 다른 남자와 외도해 아이를 낳았다. 유전자 검사 결과 명백히 내 자녀가 아니다. 그런데도 가족관계등록부상에는 ‘친자’로 등록된다면? 대부분의 남성이 펄쩍 뛸 이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현실이다. 민법 제844조 ‘친생(親生)추정’ 조항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관련 소송이 급증하면서 법률 개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례 2. 2년 전 이혼녀와 동거를 시작한 30대 중반의 B씨.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지만 여자는 자식을 돌보는 데 소홀해 B씨가 양육을 도맡다시피 했다. 어느 날 구청에 아이를 ‘혼인 외 자’로 출생신고 하러 간 B씨는 경악했다. 그동안 이혼녀라고 믿고 살았던 동거녀가 사실은 유부녀였던 것.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면 동거녀 남편의 자식으로 올라간다는 말에 B씨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후 아이 엄마가 B씨와 다툰 후 가출까지 해 B씨는 돌 지난 아이의 출생신고도 못한 채 속을 끓이고 있다.
#사례 3. 사귀던 여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결혼을 서두른 30대 초반의 C씨. 출산 뒤 아이의 혈액형이 자신과 아내 사이에 나올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추궁한 끝에 아이 아빠가 다른 남자임을 확인했다. 엉뚱한 남자의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삼을 수 없었던 C씨는 아이가 친자식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친생부인(否認)의 소’를 제기했다. 그와 동시에 아내와는 협의이혼하기로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아내를 사기결혼으로 처벌하고 그동안 들어간 아이의 양육비까지 몽땅 받아내고 싶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진짜 아빠(생부)’와 ‘법률상 아빠(친부)’를 둘러싼 갈등으로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 제844조 ‘친생추정’ 조항에 따르면 ‘처(妻)가 혼인 중에 포태(胞胎)한 자는 부(父)의 자(子)로 추정한다. 혼인 성립의 날로부터 200일 후 또는 혼인관계 종료의 날로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는 혼인 중에 포태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자녀임이 명백한 아이가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남편의 법률상 친자로 기재되면서 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례 1의 A 씨가 ‘법률상 친부’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처한 남자들이 가장 억울해하는 부분은 “아내(혹은 전처)가 다른 남자 아이를 낳은 것도 황당한데 그 아이를 왜 내 자식으로 올려야 하나” “잘못은 아내가 저질렀는데 왜 내가 소송을 걸고 재판을 받아야 하나”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재판에 참석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어야 하나” 등이다. 이 때문에 아내나 전처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에 따른 위자료 청구를 하겠다고 나서는 남자들도 적지 않다.
친부·생부·생모·자녀 4중고
‘진짜 아빠’ 논란으로 인한 피해는 법률상 친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부 역시 고통을 받는다. ‘사례2’의 B씨의 경우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면 자동적으로 동거녀 남편의 자식으로 서류에 등재되기 때문에 친권과 양육권이 없어진다. 출생신고와 함께 법률상 친부가 되는 동거녀의 남편, 또는 생모인 동거녀가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도 어렵다. 스스로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해 확정판결을 받은 후 시·군·구 등 지자체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을 내서 법률상 친부의 가족관계등록부에서 아이를 빼낸 다음 다시 지자체에 자신이 아버지임을 인지신고한 후라야 비로소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등재할 수 있다. 재판을 통해 양육권을 가져온다 해도 친권은 회복하기 어렵다.
생모 역시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D씨의 사례를 보자. 남편에 의해 간통죄로 고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이혼당한 그는 이혼 전 외도로 둘째를 임신, 출산했다. 이 아이는 본인과 남편 모두 혼외 자녀인 것을 알고 있지만, 친생추정 조항 때문에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남편의 자식으로 기재됐다. 이혼 당시 남편은 “이 아이를 빼가라”고 이씨에게 통고했지만 소송비가 드는 데다 아이의 생부와도 연락이 끊긴 상태라 어찌 하지 못하고 있다. 행방을 감춘 생부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올리기가 쉽지 않고, 가능하다 해도 자신을 버린 남자의 자식으로 만들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문제로 재혼 가정이 파탄 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30대 초반인 E 씨는 전남편과의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이후 아이의 생부인 동갑내기 F씨와 재혼한 정씨는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가족관계등록부상 전남편의 자식이 된다는 것. 현재 F씨의 부모는 며느리가 재혼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E 씨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이런 법 규정으로 누구보다 큰 피해를 보는 건 당사자인 자녀다. 20대 초반 여성 G씨는 최근 자신의 출생신고가 이중으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가족관계등록부도 두 개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생모가 외도로 자신을 낳은 뒤 친부의 자녀인 것처럼 출생신고를 하고, 생부는 생부대로 또 출생신고를 해 벌어진 일이다. 2008년 호적법 개정 당시 전산상의 착오 등으로 두 개의 호적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가족관계등록부로 옮겨지면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
이 외에도 자녀가 보는 피해는 또 있다. 부모가 친생추정 조항을 피하려고 아이의 출생신고를 미루는 바람에 출생신고 상의 나이보다 실제 나이가 더 많아 고통 받는 경우 등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법률구조 1부장(상담위원)은 “상담 사례 중 10살짜리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인 경우가 있었다. 그 때문에 아이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친생자 소송 4년 새 2배 급증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개최한 ‘친생추정조항의 문제점 및 개정방향’심포지엄.
친생추정 조항 관련 상담이나 소송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뭘까. 이명숙 변호사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적으로 개방되면서 남녀 모두 외도가 많아졌다. 또 이혼이 과거보다 쉬워지고 이혼 남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줄어들어 혼인 외 자녀를 출생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만 낳아 기르려는 사람이 생기면서 ‘결혼=임신·출산’이라는 등식이 깨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또 과거에는 생부가 ‘혼인 외 자’를 ‘모(母) 미상’으로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있었지만, 가족관계등록부를 보다 철저하게 정리하는 방향으로 가족관계법이 개정되면서 혼인 외 자녀를 낳은 사람이 법망을 피해갈 길이 막힌 것도 관련 상담과 소송이 늘어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대법원은 친생추정 조항에 관한 흥미로운 판결을 내놨다. 남편과 이혼하기 전 외도로 아이를 낳은 H씨가, 이 아이를 이혼 뒤 태어난 것으로 허위 출생신고를 한 뒤, 다시 가족관계등록부상 아이의 생년월일을 실제 출생날짜로 정정해줄 것을 청구한 소송에서다. 원심은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허가할 경우 친생추정 조항으로 인해 이 아이가 전남편의 자녀가 되므로 재판을 통해 친생추정을 번복한 후에야 정정을 허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가족관계등록부의 출생연월일 정정은 민법의 친생추정 조항과는 관계가 없다는 취지로 원심결정을 파기했다. 이에 대해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현소혜 교수는 “H씨는 혼인 중 태어난 자녀를 이혼 후 출생한 것처럼 꾸며 친생추정을 벗어났는데, 이것을 정의롭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대법원의 결정이 향후 비슷한 사례에서 악용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친생추정 조항 관련 소송이 증가하고 편법 사례까지 발생하자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지난 10월 중순 ‘친생추정 조항의 문제점 및 개정방향’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에 대해 조경애 부장은 “조심스럽고 민감한 주제라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토론에 참석한 서울가정법원 박종택 부장판사도 “이 문제와 관련된 나의 발언은 사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닌 개인 입장”임을 강조하면서 “현재 우리 법원은 장기간의 별거나 부부 일방의 해외 장기체류 등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해 친생추정을 배제하고 있다.
법률상 아빠 VS 진짜 아빠
이는 법으로 명시된 게 아니라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라 법적으로 불안정적이다. 법 개정을 통해 예외 조항을 법 테두리 안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 판사는 또 “친생추정 조항의 원래 목적은 자(子)의 복리와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데 있다. 근본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별거 등으로 가정의 화목이 깨진 상태에서 모(母)와 자녀가 생부와 함께 살고 있는 경우라면 출생신고와 함께 생부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등재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모의 잠깐 실수로 자녀가 태어났고 남편과 계속 살면서 가정을 깨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라면 아이는 지금처럼 남편의 법률상 친자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이때는 생부가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 등으로 가정을 깨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방향의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반면 현소혜 서강대 교수는 “현행법에서처럼 ‘법률상 친부’를 강제하거나 생부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이를 등재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다. “아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출생신고 시 ‘부(父) 미정’으로 한 뒤 유전자 검사 등 확실한 방법을 통해 남편의 자녀가 아닌 걸로 판명되면 어머니의 가족관계등록부에 ‘혼외 자’로 올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부 미정 출생신고’에 대해 이명숙 변호사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아버지를 정하지 않은 채 혼외 자로 출생신고를 하거나 소송을 통해 생부 쪽 혼외 자로 올리면 그 내용이 가족관계등록부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그럼 나중에 아이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법원 판단을 통해 아이를 바로 생부의 아들로 출생신고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주최 토론회 참석자들이 공감대를 이룬 것은 “현재 친생추정 조항에 문제가 있다”는 점과 “법 개정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 교수는 “다른 남자의 정자를 제공받아 출산한 인공수정 자녀의 출생 신고 문제 등 갖가지 복잡한 문제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동안은 ‘법률상 아빠’와 ‘진짜 아빠’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지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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