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한국피엠지라는 국내 제약업체가 내놓은 천연물 신약이 하나 있다. ‘레일라정’이다. 유명 대학 교수가 자신이 세운 천연물신약개발업체를 통해 7년여 연구개발 끝에 만든 골관절염치료제다. 임상 결과 레일라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관절염치료제 화이자의 ‘쎄레브렉스’에 비해 부작용은 훨씬 적고 효과는 더 나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염진통과 연골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약이라고 한다. 이런 기능은 기존의 양방약으론 좀 어렵다.
양방약으로 둔갑한 활맥모과주
이 개발업체는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의 영예도 안았다. 연간 2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되는 신약 레일라정을 개발한 공로로 말이다.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좋은 약을 개발했으니 그 대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구차스러운 얘기를 좀 하면, 이렇게 레일라정을 시장에 내놓은 한국피엠지는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신약 허가를 받았는데 그 직후 악재가 터졌다. 의사들에게 수입차를 제공하고 리스 비용은 회사에서 내주는 식의 지능적인 리베이트를 주다가 전담수사반에 적발된 것이다. 그런데도 며칠 뒤 의료급여결정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레일라정은 모과가 주성분인 ‘활맥모과주(活脈木瓜酒)’라는 한약 그 자체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활맥모과주는 타계하신 원로 한의사 배원식 씨가 만든 관절염 비방으로, ‘한방임상보감’이라는 저서에서 이를 공개했다. 실력 있는 한의사들은 그때그때 작방(作方)해서 약을 쓰므로 공개만 하지 않는다면 웬만한 처방이 비방(秘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분은 이를 공개했다. 어쨌든 그의 활맥모과주는 모과 8근, 당귀 천궁 각 5근, 우슬 8근, 천마 5근, 오가피 8근, 홍화 6근, 육계 8근, 속단 4근, 진교 위령선 의이인 각 5근, 방풍 4근을 분말해 소주에 넣고 숙성시켜 만든다. 주치(主治)는 요통, 요각통, 퇴행성관절염, 류머티스관절염, 견비통, 견배통, 항강증, 구안와사, 버거씨 병 등이다.
레일라정의 처방 구성은 이 활맥모과주와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다. 배원식 씨 처방의 구성 약물들을 그대로, 하나도 다르지 않게 그대로 에탄올로 추출(모과 당귀 방풍 속단 오가피 우슬 위령선 육계 진교 천궁 천마 홍화를 25% 에탄올 연조엑스)해 만든 약이다. 이걸 정제(錠劑)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제 약이 양의사만 쓸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 됐다. 천연물신약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아니 언제는 한약이 간독성이 심각하다, 음양오행이 의학이냐 하면서 절대 먹어선 안 된다고 하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간독성과 음양오행은 제형을 바꾸면 허공으로 날아가는 모양이다. 참고로 의사가 환자에게 레일라정을 처방하면 건강보험공단에서 약가(藥價)를 주는 의료급여결정이 내려졌지만, 최근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해 약가를 확정하지 못하고 좀 늦어지고 있다.
도대체 한약이 환골탈태해 양의사만 쓸 수 있는 약으로 바뀐 이 천연물 신약이란 뭘까.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생약(한약재) 성분을 이용해 개발한 의약품 중 구성 성분과 효능이 새로운, 현대의학적으로 연구 개발된 의약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발했다는 신약을 보면 뭐가 현대의학적인지, 무슨 구성 성분과 효능이 새로운 건지 정말 의아스럽다.
하여간 정부는 천연물신약연구사업단을 만들어 여기에 엄청난 규모의 국가예산을 투입했다.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액수라고 한다. 그렇지만 원래의 천연물신약연구사업의 취지가 무엇이었든, 이 사업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피해가 큰 국내 제약업체, 다국적 제약사들의 오리지널(특허로 보호받는 신약)에 치이고, 제네릭(특허가 끝나 카피해서 쓰는 약) 시장도 모두 내줄 수밖에 없게 된 제약업체들의 이익을 돌보는 정책이 됐다고 보는 게 중론이다.
천연물신약의 폐해
천연물신약 시장이 커지면 한약재를 생산하는 가난한 국내 농가의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제약사들이 국내 약재는 단가가 비싸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중국산 등 수입 약재를 주로 써왔기 때문이다. 최근 농가들이 이를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입장이다. 혹시 이런 얘길 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산이든 뭐든 생약재에서 추출한 약이다. 독성검사나 임상실험, 뭐 안전성 검사도 과학적으로 잘했겠지. 솔직히 그동안 미덥지 않은 한약 달여서 이를 비싸게 팔아먹은 한의사 집단에는 안된 일이지만, 환자 입장에서 보면 더 좋은 일이잖아. 글쎄, 그것도 모를 일이다. 몇 번의 고시 변경으로 과학적이라는 것의 문턱, 천연물신약 허가 요건이 무척 낮아졌다는 것만 말하겠다. 수출이라도 좀 되나? 약이 아니라 건강기능식품으로 팔린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현재 활맥모과주와 다름없는 레일라정을 포함해 스티렌정(쑥 추출물), 조인스정(으아리꽃뿌리, 하눌타리뿌리, 하고초 3종 추출물), 모티리톤정(현호색, 나팔꽃씨 2종 추출물) 등 7개 품목의 약물이 천연물신약으로 허가받아 의사들이 처방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 됐다. 이 중에는 한의사가 만들었지만 정작 한의사는 쓸 수 없는 약도 있다. 70여 가지의, 한약재로 만든 이런 신약들이 조만간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다. 왜 이렇게 난리가 나는 걸까. 영세 제약업체도 큰 개발비용을 들이지 않고 전문의약품을 만들어 대박 사건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가 하나 있다.
동아제약에서 2003년에 쑥(애엽)을 알코올 추출해 만든 천연물신약 스티렌정이 그 대박 사례다. 작년 한 해 의료보험 청구 실적이 무려 870억 원이었다. 최근 3년간 생산 실적을 보면 3000억 원대. 그러나 수출 실적은 2억 원대로 초라하다. 그도 건강기능식품으로 팔렸다. 철저히 국내용이다. 스티렌은 속쓰림이나 위염 등의 예방치료제인데, 까놓고 말하면 단순히 쑥물을 정제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이 스티렌정이 대박을 터뜨린 까닭은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과 관계가 크다. 우리나라 병·의원들은 관행적으로 거의 모든 약 처방에 위장약을 함께 넣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디스크 초기로 진단받고 몇 가지 알약을 받았다고 하자. 약의 명칭은 다르나 근육이완제와 소염진통제다. 긴장된 골격근을 풀어주는 손페리정이나 카르몰정과, 비스테로이드성 해열진통소염제인 아크로펜정 또는 아세클로페낙 성분제제, 부종을 동반한 염증을 완화시키는 단백질분해 효소 브로멜린장용정, 소염진통제 알비스정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위장장애와 심혈관계 장애를 초래하며 간독성도 있다. 그래서 반드시 위장약을 함께 처방한다. 제산제인 탄산칼슘 성분의 카니트정, 역류성식도염과 궤양성 위염에 쓰이는 에소메프라졸 성분의 약 등이 많이 쓰였는데 요샌 동아제약의 천연물신약 스티렌정이 빠지지 않는다. 한약방에서 감초 쓰듯 모든 처방에 기본으로 스티렌정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대박이 날 수밖에. 한 가지 더 말하면, 이 업체의 모티리톤정도 스티렌정처럼 잘 쓰인다. 현호색과 나팔꽃씨(견우자)의 알코올 추출물인 모티리톤정 역시 위장약이기 때문이다. 복부팽만감, 트림, 구토, 속쓰림 등 운동불량성 소화기 장애를 개선한다고 한다.
생약을 좀 아는 이라면 위장장애를 예방할 목적으로 그렇게 쑥물이나 이런 유의 약을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필자도 이런 목적으로 이들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솔직히 병의원의 그 양방 처방약들을 포함해 이런 약들을, 예를 들어 환자의 몸에 맞춘 정교한 작방으로 약을 쓰는 한의사들이, 어쩔 수 없이 써야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그 약들의 조악함과 처방 구성의 단순함 때문에 자괴감으로 잠을 못 이룰 이가 많지 않을까 싶다. 뭐, 그들처럼 별생각 없이 제약업체가 ‘과학적’으로 만들어준 알약들을 ‘과학적’으로 쓰면서 부작용 리스트만 참고하면 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거습진통(去濕鎭痛) 효과
모과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요즘 시장에 나오는 모과를 보면 못생긴 모과는 옛말이다. 울퉁불퉁 못나기는커녕 하나같이 큼직한 데다 매끈매끈한 진노랑 피부를 자랑하는, 육덕 좋은 미녀 모과들이다. 거름도 주고 잘 키우는 덕에 호강을 해서 주름이 펴진 모양이다. 시골 외진 곳에나 가야 과일전 망신인 못난이 모과들을 볼 수 있다. 모과란 이름은 ‘나무에 달린 참외’를 뜻하는 목과(木瓜)에서 변한 것이다. 은은하고 달콤한, 그 매혹적인 향기와는 달리, 맛이 시고 떫은 데다 육질이 단단해 날로는 먹을 수 없는 과일이다. 그래서 주로 썰어서 설탕이나 꿀에 재워 모과차를 만들거나 술로 담가 먹는다. 감기 기운으로 몸살이 나거나, 기관지에 염증이 있어 기침이 날 때, 체하거나 설사가 났을 때, 또 소변이 너무 잦을 때도 모과차가 좋다.
‘동의보감’에선 모과에 대해 “맛이 시고 성질은 따뜻하다. 곽란(·#53926;亂)으로 몹시 토하고 설사하고 배가 아픈 위장병에 좋다. 또 쥐가 심하게 나는 것, 설사 후 갈증이 심한 것 등과 분돈(복대동맥의 박동이 과잉항진되거나 장의 경련 등으로 유발되며, 전신적인 허약 상태에서 주로 나타난다. 배속에서 덩어리가 위로 올라오고 숨이 막힐 듯한 증상이 많다), 각기(脚氣), 수종, 소갈, 구역을 치료한다. 힘줄과 뼈를 튼튼히 하고 다리와 무릎에 힘이 없는 것을 고친다”고 했다.
모과는 신맛으로 기혈(氣血)을 잘 수렴한다. 그래서 토하거나 설사가 심해 몸에서 전해질과 수분이 빠져나가서 오는 근육의 경련을 잘 잡는다. 모과에 향유 백편두 후박 복령 등을 가미한 육화탕이 유명하다. 또 서근통락(舒筋通絡)을 해 손발저림 등을 잘 잡는다. 수렴을 잘하므로 항이뇨작용도 크다.
무엇보다 거습진통(去濕鎭痛) 효과가 뛰어나다. 다리가 붓고 무겁고 땅기며 근육이 위축되어 걷기 힘든 각기 증상 등에 주효하다. 한약 처방으론 빈소산(檳蘇散) 등이 유명한데, 조기에 쓰면 이런 질환도 잘 치료된다. 풍습으로 인한 관절염, 예를 들면 허리에서 다리까지 걸치는 통증질환, 좌골신경통에도 모과가 잘 듣는다. 풍습성이거나 척추병변 좌골신경통의 경우, 어혈을 치고 소통을 보는 약재인 단삼 천궁 작약 속단 등과 진통을 주로 보는 진교 위령선 방풍 등을 가미해서 약을 쓴다.
배원식 씨의 활맥모과주도 모과를 군약(群藥)으로 해서 위의 약물들을 적절히 배합해 퇴행성이나 류머티스관절염과 요각통, 좌골통 등에 득효한 처방이다. 역시 모과를 군약으로 해 백굴채(애기똥풀), 현호색, 강활, 위령선(으아리꽃뿌리), 독활(땅드릅), 당귀, 건지황, 작약, 창출(삽주), 진피, 유향, 몰약, 홍화(잇꽃) 등을 배합한 활락탕이란 처방은 극심해진 온갖 통증에 잘 듣는다.
|
관절염이 오래되면 부종이나 근위축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경우 모과에 황기 등의 약재를 가미해 쓰면 근위축을 막고 부종도 가라앉힌다. 다발성신경염, 말초신경염, 근육류머티즘에도 모과가 좋다. 또 화위지사(化胃止瀉) 효능으로 구토, 설사, 소화불량, 복통, 위경련, 급성 장염으로 인한 장교통(腸絞痛) 등 다양한 소화기 질환을 치료하는 상용약으로 쓸 수 있다. 모과는 항이뇨작용이 있어 울열로 인해 소변이 단적(短赤)하고 잘 나오지 않을 경우엔 써서는 안된다. 동의보감엔 뼈와 이를 상하게 하므로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참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