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닻 올린 시진핑의 중국 人文治國 시대 열리나

5세대 지도부 출범

  • 이주형│창원대 중국학과 교수 leejh@changwon.ac.kr

    입력2012-11-21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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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무위원 6명 인문·사회계 출신… 빈부격차 갈등 조절
    • 시진핑, 계파 의견 수용하며 권력 공고화 나설 듯
    • ‘강한 중국’ 예고… 對中 네트워크 적극 활용해야
    닻 올린 시진핑의 중국 人文治國 시대 열리나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대 당 대회)가 11월 14일 시진핑(習近平) 등 중국을 이끌어나갈 5세대 지도부를 선출하고 폐막하면서 중국의 미래를 이끌 상무위원에게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진핑이 이끄는 5세대 지도부는 7인 상무위원의 집단지도 체제로 운영되는데, 리커창(李克强)이 국무원 총리를 맡아 시진핑-리커창 ‘투톱 체제’를 갖추게 됐다. 신임 상무위원단에는 시진핑과 총리 내정자인 리커창 이외에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위정성(兪正聲)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 류윈산(劉雲山) 국가부주석,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장가오리(張高麗) 상무부총리가 포진했다.

    상무위원 7인의 면면을 보면 중국은 바야흐로 ‘인문치국의 시대’로 진입했다. 이번 중국 공산당 제5세대 지도부는 1980년 이래로 유지되어 온 중국 최고 지도부의 ‘공정사치국’(工程師治國·이공계 출신이 국가를 다스림)의 전통이 퇴색하고 ‘인문치국’(人文治國·인문·사회계 출신이 국가를 다스림)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4세대 지도부는 칭화대(淸華大) 수리공정과를 졸업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해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 리창춘(李長春) 상무위원 등 모두가 공업 계통에서 경력을 쌓은 이공계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번 18대에서 선출된 제5세대 지도부는 칭화대와 베이징대에서 법학,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시진핑과 리커창 등 6명이 모두 인문사회계열 출신이다. 위정성은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나와 이공계 출신으로 분류된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18대에 앞서 개혁·개방 정책이 낳은 부작용을 치유하고 빈부격차 확대에 따른 사회·경제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선 인문·사회학적 마인드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인문사회계열 출신 지도부

    이들 상무위원을 놓고 어느 계파에 속하는지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 등을 종합하면 상무위원 7명 중 상하이방(上海幇·장쩌민 전 주석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 출신 그룹)은 장더장, 장가오리, 태자당(太子黨·국가 원로 자제들로 구성된 관료세력)은 시진핑, 위정성, 왕치산 3명,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후진타오 주석 계열의 공산주의청년단 출신 관료세력) 계열은 리커창이 유일하다. 이 중 위정성은 상하이 당서기 출신이어서 상하이방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태자당의 맏형이기도 하다. 류윈산은 공청단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후진타오 주석의 세력으로 분류되지만, 장쩌민 전 주석과도 가까운 관계로 알려져 상하이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므로 후 주석 세력인 공청단 계열은 리커창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후진타오 체제에서는 9명이었던 정치국 상무위원 숫자가 7명으로 줄었고, 새 권력지형에서 태자당과 상하이방 계열 인사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퇴임 후 후 주석의 영향력은 과거 10년간 사실상 ‘상왕(上王)’ 역할을 한 장 전 주석에 비해 크게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상무위원 수가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시진핑의 리더십이 커져 7인 집단지도체제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약진을 공청단의 패배로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류윈산을 제외한 상하이방 3명은 연령 제한으로 5년 후인 19차 당 대회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 경우 공청단 계열의 리위안차오(李源潮) 공산당 조직부장 또는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가 상무위원으로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8대 지도부 인선을 통해 시진핑이 1인자로 등극했지만, 1949년 건국 이후 최대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그 위상은 이전 지도자들과 달리 약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은 자신의 독자적인 노선보다는 원로그룹과 각 계파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18대의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경제 성향을 들여다보면 중국의 경제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다. 공청단 출신과 태자당, 상하이방 출신은 중국 경제운용 방안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 먼저 공청단은 사회정의와 사회통합을 강조한다.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으로 이미 많은 혜택을 입어 경제가 발전한 연해지역보다는 내륙지역에 관심이 더 많다. 반면 태자당과 상하이방은 경제효율성과 경제 성장을 강조한다. 중국경제가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계파별 경제성향 분석

    중국 리더십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청(李成) 박사는 이를 두고 ‘엘리트(Elite) 그룹’과 ‘대중(Populist) 그룹’으로 나눠 설명한다.

    태자당에 속한 시진핑은 엘리트 그룹의 전형으로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상하이(上海) 등 동부 연해 지역에서 업적을 쌓으면서 경제발전을 이뤄왔기 때문에 분배보다는 성장에 관심이 많다. 기업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정책을 선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국 기업에도 관대한 ‘자유주의 성향의 친(親)기업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닻 올린 시진핑의 중국 人文治國 시대 열리나
    반면 대중 그룹은 내륙에서 성장했거나 중앙권력 주변에서 맴돈 정치인이 많은데, 리커창 부총리 등 공청단 출신 인사가 주요 구성원으로 분류된다. 후 주석이 그랬듯, 성장을 중요시하면서도 조화를 강조하고, 노동자 복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분석된다.

    따라서 소득·지역 격차 등 민생경제 회복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시진핑 시대의 경제정책은 지속성장을 유지하면서 중국사회 최대 문제로 꼽히는 빈부격차 해소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 주석이 ‘조화사회 건설’을 기치로 공정·공평과 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했지만 양극화 심화에 따른 사회 불만이 날로 높아졌다. 성장 못지않게 분배가 향후 경제정책의 핵심 과제로 대두된 상황에서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제시된 내수주도형 경제 전환과 함께 소득 분배 개혁, 중서부개발, 동북지역 진흥을 통한 균형발전에도 상당한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정치 분야는 어떨까. 18대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정치개혁이었다. 하지만 정치개혁 관련 내용은 핵심은 빠져 있는 듯하다. 1987년 13대에서 당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정치개혁의 하나로 제기한 당-정 분리 같은 구체적인 조치에 비해 한참 후퇴했다. 특히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을 거론하면서 정치체제 개혁을 제기한 것은 파벌 전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좌우사상을 적당히 섞은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은 11월 8일 “고립되고 경직된 옛 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깃발을 바꾸는 잘못된 길을 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오쩌둥 시대의 극좌노선으로 돌아가지 않되, 헌정민주주의나 다당제 등 서구식 민주 정치도 추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정치개혁에 대해선 보수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 중국인들은 정치개혁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정부에 대해 “새로운 길이든 잘못된 길이든 헌 신발(老破鞋·중국공산당을 의미)을 신고 어떻게 가나? 지금 중국은 막다른 길로 달리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헌 신발 신고 어떻게 가나?”

    필자는 이번 18대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기간(11월 8~14일)에 중국을 방문해 실시간으로 현지 언론보도와 여론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1월 10일 중국 현지에서의 중국 야후 접속은 가능했지만, 타이완·홍콩 야후는 접속이 불가능했고, 11월 10일 저녁부터 구글 검색이 차단되었다가 11일 오전 차단 해제됐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반정부적인 내용이나 톈안먼 사태, 반정부활동가 등 민감한 키워드는 검색이 차단되었다.

    이번 중국 신지도부 선출에 대해 상당수 중국 네티즌은 “미국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선출되었는데 우리는 언제 투표해보나? 살아생전 지도자 선출 투표를 한번 해볼 수 있을까?”하는 의견을 올렸다. 부패 문제 해결에 대한 반응은 “언제부터 외친 반부패인가? 말만 있고 행동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정치개혁에 대한 욕구였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당 대회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 소수 지도자의 철저한 비밀 협상과 거래 속에 지도부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일반 대중 사이에는 ‘당 대회와 나는 상관없다’는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했다.

    우후이(吳輝)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가 “당과 당원들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인민과 거리를 두고 있다”면서 “1949년 공산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인민을 위해 복무할 것을 강조했지만, 91년 역사의 공산당은 이제 인민과 이혼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개혁은 시진핑이 완벽한 실권을 장악하고, 원로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중국 국민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진핑에게 정치개혁을 기대하고 있지만 시진핑은 마오쩌둥 노선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시진핑 체제는 정치개혁을 진행하지 않으면 중국이라는 국가가 위험해지고, 정치개혁을 단행하면 일당체제(一黨體制)인 공산당이 위험해진다는 딜레마를 안고 출발했다.

    시진핑이 집권한 뒤에도 정치개혁은 일당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안전한’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하게 비대해진 사법·공안 권력을 분산시키고, 사법부의 독립을 추진해 권력 감시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부정부패 해결 등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정치개혁은 강하게 추진되기 힘들며 당분간은 시간을 끌 것으로 보인다.

    人民과 民生

    후 주석은 18대 당 보고에서 “지난 10년간 중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6위에서 2위로 높아졌고, 전면적인 샤오캉(小康·중등 국가) 사회 실현 기반을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발전과정에서 빈부격차, 지역 간 격차 등 사회 모순이 심화되고 교육, 취업, 사회보장, 의료, 주택, 법집행 등에서 인민의 이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점은 인정했다. 일부 당 간부 사이에 부패현상이 만연하고 형식주의, 관료주의 문제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중국 국내외 언론들도 이번 18차 전당대회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인민’이라고 보도했다. 후 주석은 인민의 생활수준, 빈부격차, 사회의 공정 정의 문제 등에서 20여 차례나 ‘인민’ 을 언급했다고 중국 언론은 전했다. 후 주석은 “18대 당 보고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구체제, 구제도에 대한 사회주의 인식타파(破)였다면 향후 10년간 신지도부의 과제는 새로운 정립(立)의 과정이며 이것은 타파보다 더 어렵다”고 주장했다. 중국 지도부가 현재의 당과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만 정서를 인식하고 민생경제에 매진하지 않으면 위기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5세대 지도부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의 국정운영 우선순위는 소득분배 개선 정책을 적극 펼치는 것이다. 국유기업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보조금을 삭감하고 국유기업의 이윤에서 국가에 내야 할 분담금을 높여, 이를 재원으로 저소득층 지원을 늘리는 방안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의료·교육·주택 등 복지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11월 12일은 “2013년 정부가 보조하는 저소득층용 주택 600만 채를 건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득분배 개선 정책

    외교·국방과 관련해서는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한 만큼 국방력을 강화하고 국가 이익을 지키는 단호한 외교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18대에서는 지난 2007년 17대 때 등장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에 걸맞은’ ‘우리는 그 어떤 외부적 압력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 국가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단호히 수호할 것’ 이라는 단호한 표현이 나온 것도 자국 이익 수호와 강한 중국 건설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중국이 이른바 영토 문제 등 중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 새 지도부의 등장이 국제사회와 한반도(남북)에 미치는 영향을 잘 분석해 향후 대중(對中)정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시진핑뿐만 아니라 신임 지도부 대부분은 한국을 방문했거나 한국과 교류한 경험이 있어 비교적 한국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의 정·관계에도 시진핑 등 중국 지도부와 교분을 쌓은 인사들이 폭넓게 포진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한미동맹 관계를, 중국은 북한과 군사동맹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중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향후 한미, 한중 관계는 물론 미중 관계에서 전략 선택을 고민해야 할 처지임을 뜻한다. 향후 미중 관계는 협력과 경쟁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미중 갈등은 한국의 전략적 이익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은 모든 외교역량을 집중해 동북아 신뢰 메커니즘을 만들어 미중을 가깝게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외교 전략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국가이익을 근간으로 하는 새 전략적 틀을 구상해야 한다. 중국이 정치·안보 측면에서 미국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는 없지만 경제관계, 남북관계 그리고 향후 통일 과정에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이익 차원에서 중국이 과연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북한의 김정은 체제와 개혁개방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한중 양국은 북한의 핵개발 저지와 개혁개방 유도,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 등에 대해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런 공동 인식을 보다 굳건히 다지는 방향으로 향후 중국과의 정치·경제 관계와 대북정책을 설정해나가야 한다.

    덩샤오핑 vs 화궈펑(1976년), 덩샤오핑 vs 천윈 보수파(1989년), 소유제 논란(1997년)

    전국대표대회는 실력자들 正面勝負 무대


    1982년 제12차 대회부터 5년 주기로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는 중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국가의 방향과 시대적 주요 의제를 결정해 온 최대 정치 이벤트였다. 하지만 주요 당 대회에서의 최고지도자 선출과 공산당의 노선 결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암투였다. 최고 권력을 잡기 위한 고수들 간의 도검(刀劍)이 난무하는 ‘비검(比劍)의 산물’이었다.

    중국에선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3차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등극을 위한 고수들 간의 정면 승부가 펼쳐졌었다.

    첫 번째 정면 승부는 1976년 덩샤오핑(鄧小平)과 화궈펑(華國鋒) 간 대결이었는데, 덩샤오핑은 마오의 정치제일주의 계승을 표방한 화궈펑을 누르고 1982년 중국 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를 천명하며 개혁개방 노선을 확정했다. 중국에서의 ‘개인숭배사상’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다.

    두 번째 정면승부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지속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천윈(陳雲)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간의 대결이었다. 덩샤오핑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키고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 개념을 도출하면서 중국에서의 ‘계획경제 숭배사상’을 종식시켰다.

    세 번째 정면 승부는 중국 학술계에서 일어난 ‘소유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에 이어 대권을 물려받은 장쩌민(江澤民)은 1997년 중국 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에서의 사유제(私有制)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2002년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부의 무한한 축적과 대자본가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마르크스ㆍ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공산당 당장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중국이 점차 과거 소련과 동유럽 국가처럼 ‘탈(脫)사회주의’로 가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타이완이나 홍콩 등 일부 중화권 학자들 사이에서 향후 네 번째 정면승부는 ‘사회주의 사상’ 타파가 될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전망이 제기됐다. 그러나 18대 직전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 중국 정국을 흔들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보시라이 사건은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의 심복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이 충칭 시 공안국장에서 직위해제된 직후인 2012년 2월 6일 미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보시라이와 관련된 비리들이 드러난 정치 스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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