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현재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는 60명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가 더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1992년 7월과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발표하며 그 존재를 인정했으나 이는 ‘법적 책임 종결’이라는 일본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1993년 3월, 한국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물질적 보상 불요구 방침’을 발표했다.
우리 모두 가해자
젊음을 채 꽃피우지도 못한 어린 시절, 비참한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은 육체적으로도 회복이 어려울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상흔을 평생토록 숨기고 살아냈다. “내가 위안부였다”고 떳떳이 밝히는 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분은 236명. 그중 생존자는 단 60명이다.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가족 중 일본군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 쉬쉬하는 경우가 더 많아 그 숫자가 얼마였는지는 짐작기 어려운 실정이니까요. 수요집회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계신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뒤늦게 용기를 내시는 분들도 있어요.” 최근 2,3년 사이에도 용기를 내어 사단법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찾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정대협 관계자의 이야기다.
이들이 안고 산 건 비단 육체적 고통과 상처만이 아니다. “나 죽기 전에 사죄받으면 이 자리에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텐데….” 2011년 강구에서 진행된 ‘1000차 수요집회 기념 통영·거제시민 정의의 인간띠 잇기’ 행사에 참석한 김복득 할머니의 아픈 한마디는 그들이 겪었을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대변해준다.
2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정치적 이슈이자 쟁점 사안이다. 때로는 반일감정의 표상으로, 때로는 여야를 막론한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정작 위안부 할머니들이 처한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생활인’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기에, 어쩌면 우리 사회는 또 다른 가해자일지도 모른다.
정대협이 추진하고 있는 ‘치유와 평화의 집’(가칭) 설립 목적은 일차적으로 현재까지 정대협에 등록된 60명의 생존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치유와 재활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정대협에서는 2003년 12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정대협 사무실 인근에 전세주택을 마련해 ‘우리집’이라는 쉼터로 개소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면서 거주자 중심의 완전 주거 형태만 유지하게 되어 쉼터에 거주하지 않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쉼터를 통한 복지활동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치유와 평화의 집’
‘치유와 평화의 집’은 쉼터 거주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쉼터에 거주하지 않는 할머니들도 다른 피해자들과 교류하고 활동가들과 친교를 나누며 다른 세대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을 지향한다. 늘 두려움에 떨며 혼자서만 감내하듯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어울려 사는 삶이 무엇인지, 나아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치유하고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음을 깨닫도록 마음의 힐링(healing)을 제공하는 것이 ‘치유와 평화의 집’의 건립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