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당국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내 회담장.
박 대통령이 남북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진보성향 전직 대통령의 접근법과 달랐다. 또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방식과도 차별화됐다. ‘박근혜 스타일’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런데 이게 국민에게 먹힌 것이다.
‘1979 변칙대좌’와 ‘2013 格’
남북당국회담 추진 과정에서 화두는 ‘격(格)’이었다. 박 대통령 측은 ‘남북 수석대표의 직급이 얼추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장관, 북쪽은 내각 참사(우리의 국장급)’ 같은 최근 10여 년간의 장관급회담 관행과 선을 그은 것이다. 이는 이번 남북당국회담 결렬의 결정적 이유로 작용했다. 박 대통령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다소 철학적인 말까지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토통일원 차관과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동훈 전 차관은 “박근혜 대통령이 ‘격’을 중시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동 전 차관과 나눈 대화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유사점이 있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쉬운 것부터 하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북한을 능가하는 국력을 배양하자’ ‘이산가족 상봉 등 국민이 원하는 것부터 하자’ ‘그다음에 고위 정치협상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1971~72년 이를 차례로 완수해 7·4남북공동성명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프로세스도 ‘신뢰부터 쌓자’ ‘쉬운 것부터 하자’고 말한다. 둘이 비슷하다.”
▼ 이번에 수석대표의 ‘격’ 문제로 회담이 무산됐다.
“34년 전인 1979년엔 ‘변칙대좌(變則對坐)’라는 시사용어가 신문에 자주 회자됐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겠다는 ‘1·19 제의’를 했다. 북측과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는 공식 채널인 남북조절위원회 위원들이 나갔다. 북측은 정체불명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요즘으로 치면 대화 상대의 격이 전혀 안 맞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이를 두고 ‘변칙대좌’라고 불렀다.”
‘통일연구원’의 ‘남북관계연표(1948~2011)’를 보면 80~81쪽에 걸쳐 “2월 17일 남북간 변칙대좌 1차” “3월 7일 남북간 변칙대좌 2차” “3월 14일 남북간 변칙대좌 3차”라고 표기돼 있다.
현재의 남북당국회담은 회담 전 상대방 명단을 미리 교환하는데, 1979년엔 회담장에 나가봐야 누가 실제 회담 상대인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3차에 걸쳐 변칙대좌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동 전 차관은 “박정희 대통령은 변칙대좌를 아주 싫어했다. ‘공개석상에서 야무지게 따지라’고 지시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 이번에 우리 장관과 북측 조평통 서기국장 간 당국회담이 열린다면 1979년 박정희식 기준으로 볼 때 변칙대좌인가.
“만약 그렇게 마주 앉는다면 변칙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부친의 대북협상을 어깨너머로 배운 건가.
“그렇다고 본다. 당시 남북대화가 신문에서 이슈가 되고 주목받았으니 퍼스트레이디로서 남의 일처럼 봤을 리 없다.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까 체험학습으로 아버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봤을 것이고. 특히 남북관계를 남북정치라기보다는 국가안보로 보는 박정희류의 특별한 국가안보관이 있지 않나. 그 딸이 연쇄적으로 이런 관점에 깊은 관심과 견해를 충분히 가졌을 것이다.”
“김장수 실장 아닌 참모가 조언”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회의석상에서 ‘북한에 격 문제를 들고 나올지 여부’를 둘러싼 논의를 주도했다. 다만 한 참모가 이 문제와 관련해 깊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 참모가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이 관계자는 “김장수 실장은 아니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관계에 관한 박근혜 스타일의 구체적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물밑 협상 없음’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과 교류의 병진(竝進)’이다. 이 관계자의 이어지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