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팝아티스트 낸시랭(34)도 그중 한 명이다. 물론 잦은 방송 출연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만, 지난해 4·11 총선을 앞두고 벌인 투표 독려 프로젝트 ‘앙’이나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와의 공방, ‘박정희와 팝아트 투어’ 등이 화제 혹은 논란이 된 것은 SNS 영향이 컸다.
인터뷰를 위해 낸시랭에게 처음 연락한 것은 지난 4월 말. SNS와 ‘일베’(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를 중심으로 그의 부친 생존설이 한창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다. 기자는 근 5~6년 만에 그의 018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며, 아직도 이 번호가 존재할까 싶었다. 그는 여전히 이 번호를 쓰고 있었고 우리는 몇 번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연락처는 ‘없는 번호’가 됐다. 다시 그와 연락이 닿아 사연을 물었더니, 일베에 018 번호가 공개됐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수천 통의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추억이 깃든 번호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5월 말,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작업실에서 낸시랭을 만났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달린 팬시한 소형차 도요타 ‘윌비’(Will Vi)에서 내린 그는 하얀 미니드레스에 어깨에는 고양이 인형 코코샤넬을 얹고 있었다. 코코샤넬은 이날 인터뷰 내내, 그리고 사진 촬영하는 와중에도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작업실은 좁았다. 작품이 가득했고, 오로지 작업만을 위한 공간인지 의자나 탁자도 변변치 않았다. 그나마 구석에 놓인 소파에도 작품이 두어 점 올라가 있었다.
“아티스트가 자기 작품을 계속 보관하고 있기가 쉽지 않거든요. 대학 은사님 한 분은 그래서 한강에 버리셨대요.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요. 그래서 전 절대 안 버려요.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이 여기에 다 있어요.”
광주에서 많은 것 배워
▼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용감한 기자들’이라고, 신동엽 씨가 진행하는 케이블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요, KBS 전주방송국 교양 프로그램 ‘The 비빔밥’ MC를 맡고 있어요. 기업이나 대학 강연도 많이 해요. 며칠 후엔 서울대 경영대에서 강연해요. 지금까지 서울대에서만 네다섯 번 강연했어요.”
▼ 서울대와는 어떤 인연으로?
“처음엔 조동성 교수가 초청했는데, 김성민 군이라고, 출판사를 창업하려는 학생이 그 강연을 듣고 연락해 와서 ‘장미와 찔레’라는 책 표지를 제가 만들었어요. 학생이 도와달라고 했지만, 전 500만 원을 달라고 했죠. 과제물이 아니라 사업을 벌이겠다는 건데, 사회에선 공짜가 없잖아요. 이 프로젝트가 성공했고, 그 이야기가 서울대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진 게 인연이 된 것 같아요.”
‘장미와 찔레’는 김 군과 조 교수가 공저하고 낸시랭이 표지 디자인을 맡은, 청년 세대를 위한 일종의 처세서다. 시안 2개를 보냈더니 둘 다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1개 값인 500만 원만 받는 대신 인세를 달라고 했단다. 그는 “책이 꾸준하게 잘 팔려 지금까지 2000만 원이 넘는 인세가 들어왔다”고 했다.
그때 작업실 밖으로 아이들이 와글와글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 건물에 어린이집이나 학원이 있나봐요?
“몰라요. 저는 저 외에는 관심이 없어요(웃음). 변(그는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를 이렇게 불렀다)과 일베가 저를 종북으로 몰아서 난 ‘친낸종랭 종낸랭파’다, 나는 나르시시즘이다, 얘기했잖아요. 제가 방송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말하니까 이게 검색어 순위가 쫙 올라서 1위를 했더라고요(웃음).”
지난 2월 그는 방송에서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올 누드 찍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또 한바탕 화제를 모은 바 있다.
5·18 민주화운동기념일이 지난 며칠 후, 낸시랭은 프랑스의 배우 겸 MC 앙투안 드 코네스와 함께 란제리 차림으로 5·18 기념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트가 그려진 태극기와 프랑스 국기를 들고 낸시랭은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앙투안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 퍼포먼스는 프랑스 카날플러스TV에서 ‘Seoul Story’로 방영될 예정이다.
“이번에 팝아트협동조합의 두 번째 팝아트투어로 광주를 방문했어요. 5·18민주묘지 등에 가서 모르던 역사도 알게 됐고,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어요. 매년 5·18 때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광주를 찾는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광주를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미국 국적인 그는 ‘국민’ 대신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와 자유가 그들의 희생 덕분이구나, 눈물 흘리며 감사해야 할 일이구나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프랑스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콘셉트가 붕어빵처럼 똑같잖아요. 그래서 전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고, 앙투안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게 했죠. 라 마르세예즈 가사 내용이 장난 아니게 무섭거든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