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과 지동설이 둘 다 옳다고 인정한 꼴이다. 노벨경제학상의 권위가 훼손됐다.”
영국 경제일간지‘파이낸셜타임스’가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 내놓은 논평이다. 2013년 10월 14일 수상자가 발표되자 세계 경제학계는 크게 술렁였다. 핵심은 두 가지다. ‘알프레드 노벨 사후 제정된 노벨경제학상의 존재 의의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는 점과 ‘주류 경제학의 구멍을 파고든 행동경제학의 입지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논란은 수상자의 면면에서 기인한다. 3명의 수상자는 미국 시카고대 교수 유진 파머와 라스 피터 핸슨, 예일대 교수 로버트 실러다. 문제는 파머 교수와 실러 교수의 주장 및 연구 분야가 정반대라는 점. 두 사람은 앙숙이다. 전통 경제학의 적자(嫡子)인 파머 교수는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시장 또한 항상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명제를 신봉하는 ‘효율적 시장 이론’의 권위자다. 반면 실러 교수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언제나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종종 시장의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 al Economics)의 대가다.
전면에 등장한 ‘이단아’
실러 교수의 이론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이 시장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명제를 깔고 있다. 이에 따라 실러 교수는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 이후 “효율적 시장이론이 틀렸다는 점이 완전히 드러났다”며 파머 교수를 매섭게 공격했다. 상식적으로 두 사람의 상반된 주장이 모두 틀릴 수는 있어도 둘 다 맞을 수는 없다. 노벨경제학상위원회가 황희 정승도 아니고, 상의 권위가 훼손됐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실러 교수의 수상은 몇 년 전만 해도 ‘주류 경제학의 이단아’쯤으로 평가받던 행동경제학의 발전 속도와 그에 대한 사회 저변의 인식 변화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002년 사상 최초의 심리학자 출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대니얼 카너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신동아’ 2013년 5월호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 참조)가 이 상을 탔을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카너먼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때만 해도 “대다수 경제학자가 잘 연구하지 않는 틈새 분야를 개척해 노벨상을 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실러 교수까지 노벨상을 수상함에 따라 행동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2000년대 이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행동경제학과 직간접적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 많다. 201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로이드 섀플리 교수는 게임이론과 수리경제학을 접목한 ‘협조적 게임이론(cooperative game theory)’으로 노벨상을 탔다. 최근에는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 지명자의 남편으로 더 유명해진 조지 애컬로프 UC버클리대 교수도 2001년 중고차 시장의 정보 불균형을 분석한 ‘레몬이론’으로 노벨상을 탔다. 두 사람의 이론은 행동경제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애컬로프 교수는 실러 교수와 함께 2009년 초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는 행동경제학 분야의 명저도 펴냈다.
실러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 주택가격 지수인 ‘케이스-실러 지수’를 개발했으며 주식과 금융 분야에서도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21세기 들어 연이어 터진 경제위기, 즉 2000년 초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모두 예측한 유일한 학자다. 그는 어떻게 이런 혜안을 갖게 된 것일까.
MIT의 소중한 인연
로버트 실러는 1946년 3월 미국 자동차산업의 본산인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리투아니아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벤저민 실러도 자동차 엔지니어로 일했다. 1967년 미시간대를 졸업한 실러는 1972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스승은 198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소비이론 ‘생애 주기(life cycle) 가설’의 창시자로 유명한 프랑코 모딜리아니 교수였다.
MIT 시절 실러는 평생의 벗인 제레미 시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MBA스쿨 교수를 만났다. 두 사람은 MIT 입학 전 건강검진 때 실러(Shiller)와 시겔(Siegel)이라는 성이 비슷해 앞뒤로 나란히 줄을 섰다가 조우한 것을 계기로 1946년생 동갑내기, 미 중서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더해져 그야말로 ‘절친’이 됐다.
아들만 2명을 둔 것, 전업주부가 아닌 전문직 종사자가 아내라는 사실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두 가족은 여름휴가를 같이 보낼 정도로 돈독한 사이다. 다만 금융위기 이후 시겔 교수는 미국 금융·부동산 시장의 광범위한 거품론을 주장하는 실러 교수와 견해를 달리했다. 시겔 교수는 “미국 주식 시장이 그다지 고평가 상태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친구와 논쟁을 벌였다.
실러는 MIT 졸업 후 미네소타대, 런던정경대(LSE)를 거쳐 1982년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30년 넘게 이 학교에 재직하며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실러 교수가 세계 경제학계로부터 처음 주목받은 것은 1987년이다. 당시 그는 칼 케이스 웰슬리대 교수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주택가격 지수인 케이스-실러 지수를 개발했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국 10대 도시의 집값을 지수화한 이 수치는 1년에 4번(2월, 5월, 8월, 11월 마지막 주 화요일) 발표되는데, 미국 주택시장 동향을 가장 잘 반영하는 지표로 꼽힌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집계 대상을 20대 도시로 확대해 수치를 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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