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군 1, 2제대 통합해 초강력 속도전 준비
- 한미연합군 피해 중앙고속도로 쪽 우회 기동
- 경보병부대 사전 투입해 주요 시설 먼저 장악
- 미사일로 美 증원군 제압, 한국민 공포심 극대화
- 한국판 비대칭 전략 ‘참수계획’으로 대응해야
북한군 전차부대의 기동훈련. 북한은 기동부대인 2제대를 해체해 1제대에 배치함으로써 핵전면전쟁 준비를 마쳤다.
조보근 국방부 국방정보본부장의 이같은 국회 발언이 비난을 사자 김관진 국방장관은 “남북 간 전쟁 시 북한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며 긴급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군 전력은 북한의 80% 수준”이라고 답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조 본부장의 다른 발언도 눈길을 끌었다.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이 “수도권을 타격의 중심으로 한 북한군의 비대칭전력 증강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북한군은 휴전선 인근 100km 이내에 전체 병력의 70%인 70만 명, 전체 화력의 80%인 8000문의 포와 2000대의 전차를 배치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질문하자 조 본부장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조 본부장은 1990년대 중반 시작된 북한의 전력증강 실태와 대규모 군 구조 개편, 그리고 개편된 북한군 주력부대의 최전방 추진 등에 대해 설명했다. 언론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설명은 과거의 대(對)북한 군사위협평가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필자는 공개정보를 중심으로 강성대국 건설기(1998~2012) 북한의 군사전략 변화를 연구해왔다. 그 결과 한미연합군에 대한 구조적 열세를 역전시킬 수 있도록 전력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했음을 파악했다. 북한은 핵·WMD(대량살상무기)·장사정포·특수전 전력을 집중 증강시켰고, 재래식 전력을 전진 배치했다. 그리고 이 둘을 융합해, 미군이 한반도로 증원군을 보내기 전인 개전 3~5일 내 전쟁을 종결한다는 ‘핵전면전쟁계획’을 은밀히 추진해왔다.
이를 증명한 것이 조 본부장의 답변이다.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정설이 된 ‘북한은 경제난으로 인해 전면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대북위협평가를 완전히 뒤엎는 얘기였다. 북한이 핵심전력을 최전방으로 추진한 것은 전면전을 할 의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핵 개발에 전력을 기울인 것도 전면전을 하겠다는 뚜렷한 노선 선회다. 그러나 언론은 조 본부장의 고언(苦言)에만 주목하고, 그가 고언해야만 했던 충정(衷情)은 외면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북한이 심화한 경제파탄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첩보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었다. 이 때문에 김정일 특명으로 북한이 핵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통신선로를 지중화하고, 군 구조와 전력구조를 개편해 전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북한 고위급 망명자와 여러 정보자산이 같은 정보를 제공하는데도 계속 무시했다.
국지도발 → 전면전
김정일이 강성대국 건설을 선포한 1998년까지 북한군은 ‘3단계 공격작전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전연지대(최전방)에 기갑여단 특수전여단 포병여단 등을 거느린 4개 전연 군단을 ‘제1제대’로 배치했다. 그 후방에 전차군단 기계화군단 포병군단을 ‘제2제대’로 두고, 그 뒤에는 기계화군단과 포병군단을 ‘제3제대’로 배치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1·2·3제대로 연속 공격을 퍼부어 승리를 확정짓는, 전형적인 ‘제파식(諸波式)’ 공격을 위한 배치였다.
제1제대의 기습공격으로 어디엔가 돌파구가 뚫리면, 대기하고 있던 제2제대를 그곳으로 집중 투입해 돌파구를 확대 개척하고 밀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으로 제3제대를 집어넣어 2제대 엄호하에 한반도 전역을 석권한다는 것이 3단계 공격작전이었다. 돌파구를 뚫지 못한 제1제대의 다른 부대들은 한국군 부대와 계속 대치함으로써 한국군이 돌파당한 쪽을 보강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 시기 우리 군은 북한군이 160여 만t의 탄약과 150여 만t의 유류, 120여 만t의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 3~6개월간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상당히 공세적인 준비였기에 한미연합군은 북한군 위협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1990년 유럽에서 냉전이 막을 내리고 공산권의 정치·경제·군사적인 연대가 붕괴되자 “북한군은 전면전을 수행하기 어려워 국지도발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평가를 바꾸게 됐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돼 한미 국방당국은 국회와 언론을 상대로 “북한군이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답변과 설명을 거듭했다.
그러나 최근 강성대국 건설기에 북한이 대대적인 군사개편을 했고 핵과 미사일 등 비대칭전력을 증강시킨 것이 확인되면서 북한이 ‘속전속결의 전면전’을 할 수 있다는 쪽으로 평가가 급선회했다. 에서 보듯이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기 21개이던 군단을 15개로 축소하고, 63개이던 지상군 사단을 90개로 증편했다. 이는 제2제대를 형성했던 전차·기계화·포병군단을 사단으로 개편해 제1제대를 이룬 전연군단 산하로 추진한 결과다. 군단을 줄이고 사단을 늘린 것이다.
속전속결에 초점
1, 2제대를 명확히 구분하던 시기에 1제대 군단과 2제대 군단 사이엔 큰 알력이 있었다. 전선 돌파를 책임진 1제대 군단의 지원 요청에 2제대 군단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1, 2제대 지휘관이 똑같이 군단장급이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2제대 군단장 처지에서 1제대 군단장의 지원 요청이 ‘명령’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2제대 군단은 1제대 군단의 요청을 종종 거부해 갈등을 빚었다. 이런 알력은 유사시 큰 허점을 초래할 수 있기에 김정일 집권기 북한은 2제대의 군단을 사단으로 재편해 1제대 군단에 배속시켰다. 1제대로 하여금 통로 개척은 물론이고 그 통로를 확대해 뚫고 들어가는 것까지 하라는 지시였다.
이에 따라 50여만 명이던 1제대 병력이 70여만 명으로 증가했다. 1제대가 보유한 포는 3000여 문 늘어나 8000여 문으로, 전차는 800여 대 증가해 2000여 대가 됐다. 를 보면 전차사단과 기보(기계화보병)사단이 많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보병사단도 수가 크게 늘었는데 이것은 2제대 군단을 사단으로 쪼개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1제대 군단장들은 기동부대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보병부대로 뚫고 연이어 기동부대로 통로를 확대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이는 지휘 구조를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큰 발전이다. 전시에는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기에 지휘 구조가 단순할수록 유리하다. 북한은 군 개혁을 제대로 한 것이다.
1제대는 승부를 결정짓는 결전(決戰)을 한다. 이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하면 과거에는 3제대였으나 지금은 2제대인 후방의 기동부대가 밀고 내려와 풍비박산난 한국군을 추적·격멸한다. ‘잔적(殘賊) 제거’와 ‘전과 확대’ 작전을 펼치며 순식간에 남해안에 도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3단계 제파식 공격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다.
사전 침투할 경보병 증강
이 작전을 위해 북한은 특수전부대를 증강했다. 1980년대에 3만여 명이던 특수전부대를 1990년대 10여만 명, 2000년대 20여만 명으로 팽창시켰다. 경보병사단이나 경보병연대로 편성된 이들은 제1제대 군단이나 그 예하 사단에 들어가 유사시 가장 먼저 침투한다. 그때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비밀 침투로 중의 하나가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땅굴’이다.
땅굴 등을 통해 사전 침투한 경보병부대가 은밀하게 한국 주요 시설을 장악할 때 미사일과 방사포부대가 불을 뿜어 한국을 혼란에 빠뜨린다. 북한의 공격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한국의 중요 시설들이 ‘벌써’ 북한군에 점령됐다고 하니, 한국민들은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를 극대화해 우리 국민의 항전 의지를 끊어놓는 것이 북의 노림수다.
이런 작전을 위해 북한은 수개 연대 규모이던 미사일 부대를 군단급(1개 군단, 3개 사단 규모)으로 확대했다. 미사일 부대는 ICBM으로 불리는 핵미사일도 발사할 수 있다. 핵미사일이 발사되면 한국민들은 더 큰 두려움에 빠져들 것이다. 미사일부대는 한국을 돕기 위해 증원을 준비하는 미국과 일본도 공격함으로써 증원군의 신속한 한국 상륙을 저지하기도 한다.
이처럼 북한은 미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작전을 수립해놓았기 때문에 조보근 본부장은 남북한이 1대 1로 붙으면 우리가 불리하다고 말한 것이다.
조 본부장이 언급한 휴전선 100km 이내 지역은 사리원에서 통천을 연결한 선이다. 강성대국 건설을 시작하기 전(2제대가 있던 시절)에는, 그 이북인 평양-원산선 이남에 북한군 전력의 약 70%가 배치돼 있었으나 지금은 훨씬 남쪽인 사리원-통천선에 북한군 전력의 70%가 배치돼 있다. 이는 2제대를 해체해 1제대 예하로 넣으면서 전방으로 추진한 데 따른 것이다( 참조).
북한은 사리원-통천선에 서쪽에서부터 2군단, 5군단, 1군단의 3개 전연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휴전선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 황해남도에 4군단을 뒀다. 과거 4군단은 평양을 방어하던 부대였다가 1990년대 중반 공세형 군단으로 전환됐다. 그에 따라 장비와 병력이 증강돼 휴전선 북쪽의 3개 군단과 같은 전연군단 임무를 맡게 됐다. 이 4군단이 감행한 것이 바로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이었다.
4-2-5-1로 이어진 4개 전연군단은 2제대를 흡수해 초고속 속도전을 수행한다. 전연군단을 원거리에서 엄호하는 것이 핵미사일 발사 등을 책임진 전략로켓군이고, 근거리에서 엄호하는 것은 전연군단이 거느린 방사포부대다. 최전방 척후는 전연군단 예하 경보병부대가 맡는다. 전연군단과 전략로켓군의 협동공격으로 승부가 결정되면 기동부대인 2제대가 초고속으로 밀고 와 전 한반도를 석권하는 것이다.
중앙고속도로 축선 우회 기동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2013년 3월 31일 노동당 중앙회의에서 김정은이 발표한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다. 이는 1966년 10월 김일성이 당 대표회의에서 “국방에서의 자위를 위해 경제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한 ‘경제·국방 병진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노선이 선군정치를 하면서 강성대국 건설을 추진한 김정일의 ‘핵전면전쟁’으로 연결된다. 핵전면전쟁 계획을 계승한 것이 김정은의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다.
김정은은 이러한 의지를 “전선부대들을 비롯한 육군, 해군, 항공 및 반(反)항공 군, 전략로켓군 장병들이 우리 식의 전면전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2013년 3월 8일, 조선중앙통신 보도), “지금 미국은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된 우리의 핵 억제력을 가장 무서워하고 있으며 (…) 그럴수록 우리는 핵보검을 더욱 억세게 틀어쥐고 강성부흥의 활로를 열어나가야 한다”(2013년 3월 31일 당중앙위 발언)는 말로 표출한 바 있다.
김정일이 거론한 핵전면전쟁계획은 황장엽 전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하며 처음 밝혀졌다. 평생 아버지(김일성)를 의식하고 살았던 김정일은 자신도 큰 업적을 이뤘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망이 높던 황 전 비서에게 이 계획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군사동향에 따르면 핵전면전쟁 계획에 따른 북한군의 주타격 기동로는 중앙고속도로 방향일 가능성이 높다. 한미 연합군이 집중 방어하는 문산-서울 축선을 우회기동하는 것이다. 주타격 부대가 중앙고속도로로 침투할 때 북한의 전략로켓군은 미국과 일본으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다.
북한은 대남군사전략을 상황에 따라 변형시켰을 뿐 포기한 적이 없다. 그 핵심이 속도전과 핵무기였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한 김일성은 1950년 12월 21일 당 중앙위에서 ‘현 정세와 당면임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미군이 개입할 경우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못 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김일성의 이 유일한 자아비판이 있은 뒤 북한은 미국과 일본의 증원과 지원을 차단하고 한반도를 조기에 적화시키기 위한 속도전 개발에 매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핵개발이다. 북한은 1960~70년대에 핵개발 기초, 1980~90년대에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고, 2000년대엔 1~2개의 초보적 핵무기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1991년의 공산권 붕괴와 걸프전에서 드러난 미국의 첨단전쟁 능력에 충격을 받은 김정일은 재래식 전면전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경제난 때문에라도 많은 장비를 이용한 작전은 지속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그에 따라 준비한 것이 ‘미제와 판갈이 결전준비 차원의 북한식 작전계획’이다(1999년 7월 7일자 노동신문).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은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부문을 경제관료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조선반도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을 군사전략 수립에 매진하고 있다”라고 연설했다. 핵전면전쟁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인민에 대한 김정일의 공약이고 통치 비전이었다.
우리 식 속전 전략 준비해야
‘북한은 경제난 탓에 전면전을 일으킬 능력도 의지도 없다’라는 대북위협평가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배경에는 북한의 핵과 군사적 위협을 경시한 김대중·노무현·이명박 3인의 전임 대통령의 개인적 견해가 강하게 작용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후 클린턴 정권이 국방비를 감축하고 전략적 관심을 중동과 유럽으로 돌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대(對)테러전을 중시하면서 상대적으로 북한의 핵과 군사적 위협을 평가절하한 것도 방심을 불러온 요인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전략정보보다는 야전정보를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면서 북한의 전략과 군사력에 대한 정보분석이 약화됐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현금을 주는 햇볕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전환을 시도하고,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음에도 남북정상회담을 강행하고, 서해에 남북공동어로 구역을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방비 증가폭을 줄였고 천안함·연평도 공격을 허용했다.
이런 대북관(觀)이 미국에 ‘전면전보다는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북한 급변사태를 야기해 핵과 ICBM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게 한 것이다. 이런 논리가 전파되면서 중국은 북한의 핵과 ICBM 개발, 국지도발을 방조하게 됐다. 중국은 한반도의 전면전은 우려하지만, 코너에 몰린 북한이 한반도 분단을 유지하려는 노력엔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는 것은 체제 유지나 대미협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핵전면전쟁 준비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핵개발과 관련해 이미 레드라인을 넘어 평화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하거나 핵실험을 하면 한·미·일의 삼각 군사공조나 삼각동맹을 추진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폐기하거나 한국의 핵무장도 추진해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북한 핵시설을 타격하거나 북한 지휘부를 제거하는 참수(斬首·Decapitation Operation)계획도 준비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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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을 유지한다면 전차 비행기 함정 같은 장비 중심의 전력 증강을 지양하고 초정밀 사격이 가능한 특정 장비, 예컨대 초정밀 미사일 확보에 주력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 된다. 우리도 비대칭 전력 위주로 전력을 증강해야 한다. 핵전면전쟁계획을 준비한 북한을 제압하려면 우리 식의 속전속결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