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33만 쌍, 이혼 11만 쌍. 2012년 이혼한 부부 11만 쌍 중 26.4%가 동거 기간 20년 이상의 ‘황혼이혼’이었다. ‘신혼이혼’ 비율을 훌쩍 앞질렀다. 오랜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이혼 선언. 전문가들은 “부부가 함께 행복한 노년을 맞으려면 돈보다 ‘마음’을 저축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드라마는 한 가장이 정년퇴직 당일 저녁, 온 가족이 함께하는 만찬 자리에서 아내로부터 보기 좋게 이혼을 당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드라마가 인기를 끈 결정적 요인은 누가 봐도 번듯한 남자주인공 캐릭터에 있다. 폭력적이거나 무능력하지 않고 이혼당해 마땅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노년 신사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다. 중견기업 중역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그의 정년퇴직은 분명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더없이 자랑스러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는 가족과 ‘소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으면 가족 모두가 좋고, 자신이 싫으면 가족도 다 싫어할 거라는 오만, 가족 구성원이 자기의 생각과 통제 속에서만 행복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당시 황혼이혼에 내몰린 일본 남성들의 공통적인 착각이자 ‘실수’였다. 소통 부재가 불러온 가족 해체, 그것은 이제 일본뿐 아니라 우리 이웃, 내 가족의 뼈아픈 자화상이 되고 있다. 최근 2~3년 사이 한국에서도 비슷한 콘셉트의 드라마들이 속속 방영돼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을 보면 황혼이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참고 살 이유가 없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늘그막에 무슨 이혼이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히 평균수명 증가는 황혼이혼을 고려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삶의 질이 윤택해지고 의료 수준이 높아지면서 50~60대는 더 이상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30여 년 세월을 새롭게 준비해야 할 터닝포인트로 바뀌고 있다. 더욱이 황혼이혼을 결심하는 부부는 대개 자녀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더 이상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아야 할 이유마저 크게 줄어든다. 오롯이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혼 시 여성에 대한 재산분할 비율이 높아진 것 또한 과거엔 막연하게만 생각됐던 황혼의 홀로 서기를 결심하게 하는 이유다. 황혼이혼의 경우 젊은 세대의 이혼과 달리 자녀 양육권이나 양육비 문제로 싸울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노년에 대비하기 위해 재산분할, 위자료 등 경제적 부분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과거 20~30%에 불과했던 전업주부 재산분할 비율이 최근엔 여성의 자산증대 기여도에 따라 50%까지 높아진 사례가 많은 데다, 분할연금제도에 이어 공무원 출신 남편의 퇴직연금도 분할자산에 포함하라는 판례까지 나오면서 황혼이혼 이후 여성의 경제적 자립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현행법상 혼인기간이 5년 이상이면 국민연금은 이혼 시 별도의 재산분할청구를 하지 않아도 노령연금 수급권자가 됐을 때 배우자였던 사람의 노령연금을 분할 지급받을 수 있다. 분할연금액은 혼인기간에 해당하는 연금액의 절반이며, 연금수급연령 도달 후 3년 이내에 신청하면 된다. 다만 분할연금 청구권 발생 연령인 60세 이전에 배우자였던 사람이 사망하거나 재혼을 했다면 수령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이러한 법·제도적 맹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데다, 선진국에선 이혼 시 퇴직금이나 주택연금, 개인연금까지 분할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경우가 많아 한국도 이런 흐름에 편승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여성에 대한 재산분할 비율이 높아진 것이 직접적인 경제활동을 해온 남편 처지에선 억울할 수도 있지만 아내의 가사노동과 육아, 자산증대 기여도 등은 이혼 시 재산분할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위자료는 황혼이혼이라고 해서 더 많이 받기보다는 잘못의 경중(輕重)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다. 외도를 했거나 폭행 등이 이혼사유로 전제되면 위자료 액수는 당연히 늘어난다.
남편 이혼 청구도 늘어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이혼 이후의 삶을 좀 더 안정적이고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것일 뿐, ‘이 사람과 참으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결정적 이유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황혼이혼의 가장 큰 원인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가부장적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의 권위와 의견이 가정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던 과거와 달리 우리 사회의 가족 역시 구성원 간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가족의 의식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가부장적 사고에만 사로잡힌 가장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가족에게 결코 달가울 리 없다. 특히 아내 처지에선 퇴직 후 더는 경제활동을 못하게 된 남편이 가사를 분담하기는커녕 아내를 수족 부리듯 하며 시어머니마냥 시시콜콜 잔소리만 해대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와 억압으로 다가올 수 있다.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건 언제나 아내 쪽일 것이라는 사회통념도 깨지고 있다. 여성의 경제적 능력과 권리 신장이 빠르게 이뤄지는 만큼 남성도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와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을 벗고픈 욕구 등으로 이혼을 고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 최근엔 평생 생활비와 교육비 요구에 시달린 남편의 이혼 청구가 받아들여진 판례가 나오는 등 황혼이혼 형태도 점차 다양해지는 추세다.
양소영법률사무소 양소영 변호사는 황혼이혼을 고민하는 부부 대부분이 평생 상대의 참을 수 없는 부분을 감내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기에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지치고 힘든 상태라고 전한다.
“얼마 전 아픈 부인을 간병하다 부인의 짜증을 견디지 못한 남편이 이혼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상처 받은 피해자인 셈이죠. 서로 보듬어달라고 애원하다 이혼에 이른 사례니까요. 두 사람에게 조금만 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다정한 부부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로 인한 실망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갈등도 이혼 계기가 되지만, 배우자의 부정행위나 폭행 등 극단적 상황으로 인한 이혼도 적지 않다. 이 경우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당연히 치료가 필요하다. 특히 피해를 당한 쪽 대다수는 심각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어 반드시 치료가 선행돼야 한다. 양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조건 참고 살아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혹한 경우죠. 이들에겐 적당한 시간 동안 별거와 상담치료가 절실합니다. 심각한 우울증을 동반한 사례가 아니어도 성격이나 가치관 차이로 사사건건 부딪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공동 목표 하나 때문에 서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경우 적절한 심리 상담이 필요해요. 가정법원에서도 이들에겐 이혼 이전에 상담을 받거나 부부 캠프에 참여할 것을 권합니다. 특히 남편의 경우 부인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참다못한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나서야 ‘아, 정말 아니구나!’ 하면서 심각성을 깨닫는 경우가 있어요.”
상담치료나 부부 캠프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부부도 있는 만큼 이혼 결정 전 부부 상담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막상 이혼 위기가 닥쳤을 때 선뜻 부부 상담에 응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양 변호사의 설명이다. 부인이나 남편 어느 한쪽이 부부 상담을 제안하면 제안받은 쪽은 마치 상대가 자신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이 경우 설령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적절한 상담과 치유가 이뤄지기 힘들다.
이에 대해 부부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모든 상담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아내의 권유로 마지못해 부부 상담을 결정한 남편의 경우 대부분 ‘그 사람(상담가)이 우리 관계를 고쳐준대?’ ‘그 사람이 나보다 널 더 잘 알 거 같아?’라는 식으로 상담 과정 자체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냅니다. 그런 부정적 태도는 상담하는 동안에도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이 상담가야?’라는 삐딱한 마음으로 상담에 임하면 서로의 진심을 알아채기 어려워지니까요. ‘전문가라니까 어디 한번 얘기해보세요. 나만 잘못한 거요?’라고 잘잘못을 따지려드는 것도 좋지 않은 태도예요.
이런 부부의 경우 아내 역시 옆에서 ‘남편이 잘못한 거 맞죠?’라고 응수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듭니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을 가리고 편을 들어주는 건 상담가의 몫이 아닙니다. 상담의 목적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 있으니까요.”
진심과 소통은 통한다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해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것도 황혼이혼을 결심한 부부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부분의 싸움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보다 서로 간의 문제와 오해가 얽히고설켜 발생하는데, 오래된 부부의 경우 그렇게 쌓이고 쌓인 응어리가 단단하게 응축돼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으므로 미처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 특히 우리 사회에선 아내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거나 덜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황혼이혼을 결심한 부부라면 오랜 시간 둘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가 오간 적이 없는 단절관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두 사람만의 힘으로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남편이 진심 어린 말을 하며 아내를 살갑게 대하려 해도 수십 년 동안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온 아내 처지에선 남편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럴 땐 남편이 먼저 나서서 상담 등을 통해 소통교육을 받아보는 것도 화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강 소장의 조언이 이어진다.
“남편이 이런저런 제안을 하기도 하고 변화를 시도하려 노력하는데, 아내가 계속해서 과거에 남편이 잘못한 점을 들춰내며 윽박지르고 밀어냅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과거는 어떻게든 돌이킬 수 없지요. 모처럼 잘해야지 마음먹었다가도 아내의 매몰찬 말에 모멸감을 느낀 남편은 변화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시 허탈해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편과 아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 대화의 방법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남편이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 계좌’에 추억 쌓기
물론 남편 처지에서도 할 얘기는 많겠지요. 하지만 그에 앞서 당신의 아내는 정말 딱 한 사람, 당신만 믿고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 정말 힘들었겠네. 나 한 사람만 바라보고 시집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내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 미안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내의 마음을 녹이는 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아내 분도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전, 남편이 조금이라도 반성과 변화의 기색을 보인다면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마세요. ‘예전엔 내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이라도 잘하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이런 점은 참 고맙고 앞으로 이런 점은 좀 더 고쳤으면 좋겠어요’ 같은 칭찬과 격려의 화법이 남편을 진심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강 소장은 황혼기에 접어든 남편이 젊은 세대처럼 가사를 분담하고 양육을 함께 할 만큼 크게 변하긴 어렵겠지만,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부부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기다리기보다 한 끼 정도는 스스로 차려 먹고 치우는 정도, 쓰레기 분리수거쯤은 직접 하는 것, 집 안에서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기보다 바깥으로 나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저축’하는 것이다.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혼 확률이 낮아진다는 게 강 소장의 충고다. 부부가 함께한 추억을 ‘감정 계좌’에 비유하자면, 추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두 사람의 관계를 해칠 만한 엄청난 사건이 생긴다고 해도 ‘계좌 잔고’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런 추억이 없다면 사소한 사건으로도 마이너스 계좌로 전락해 이혼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남편과 아내, 가족 구성원이 함께하는 동호회를 결성해보세요. 굳이 거창한 걸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산책이든 배드민턴이든 스포츠댄스든 함께 할 시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요. 아내는 회장, 남편은 총무, 자녀는 회원, 이런 식으로 직책을 정해 마치 동호회를 즐기듯 가족모임을 결성하면 의외로 재미가 쏠쏠합니다. 관계가 돈독해지는 계기도 되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
함께 사는 게 정 못마땅하고 힘들다면 당분간이나마 별거를 고려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너무 지긋지긋하고 힘드니 깔끔하게 갈라서는 것만이 최선일 듯해도 기대와 달리 이혼 이후의 삶은 녹록지 않아 힘겨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서는 쓸쓸한 경험이 되레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의 장점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이혼하고 싶다’의 저자인 김영희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은 자신도 젊은 시절, 1년 365일 중 360일 이혼을 생각했을 만큼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이어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고통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선지 그는 이혼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는 부부들의 숱한 사연을 접할 때마다 그보다 더한 사연을 지닌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하게 된다고 한다.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그가 남편을 만나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혼을 앞둔 이들을 조율하는 조정위원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인생이 언제나 평탄하고 행복하기만 했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조언과 조정안을 내놓을 만큼의 심성을 갖추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남편에게 고맙기도 하다.
“남편 성격이 불 같은 반면 저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같은 심성을 지녔어요. 서로 잘 맞을 리 만무했지요. 술과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남편이라 이때껏 월급봉투 한번 손에 쥐여주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지금은 저 남자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챙기고 예뻐해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 뒤쪽에 산이 있어요.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서면 성격 급한 남편은 언제나 쏜살같이 먼저 올라가버려요. 같이 손잡고 나긋나긋 걷는 법이 없죠. 그런데 그렇게 후딱 올라가다 한 번씩 저 위에서 돌아서서 중턱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열심히 가리킵니다. 돌부리 조심하라고. 그게 그 남자 나름의 표현 방식인 거예요.”
젊은 시절 배우자에게 향했던 원망과 분노가 이처럼 애틋한 정(情)으로 바뀌기까지 김 위원 부부가 기울인 노력은 적지 않다. 김 위원은 부부의 이러한 노력을 ‘정(情)테크’라고 일컫는다. 재산만 모으고 쌓는 게 아니라 정도 재테크처럼 증식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밥 먹을 때도 혼자 입에 밀어 넣기에 급급하기보다 한 번쯤 아내의 숟가락에 반찬 하나 집어 올려주는 것, 반찬이 마음에 안 들어도 잔소리를 늘어놓기보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 훨씬 건강하고 맛있다” “사 먹는 반찬은 너무 맵고 짠데 당신이 만든 음식은 간이 딱 적당해서 좋다”는 식의 사소한 칭찬들이 하나하나 정을 쌓고 만들어간다는 것.
배우자를 ‘대접’하라
“비싼 가방, 다이아몬드 반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날 이혼조정을 위해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가다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내가 요즘 자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거예요. 아내가 처음부터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았대요. 그래서 말했죠. ‘아저씨, 지금 당장 백화점 앞 매대에서 1만 원이면 살 수 있는 화사한 색의 스카프를 사다 부인께 갖다드려 보세요. 드릴 때 그냥 툭 던지지 마시고 ‘차를 몰고 가다 길거리에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 여자를 봤는데, 그 여자 목에 두른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는 게 그렇게 멋있더라고. 그걸 보니 당신 생각이 나서 샀어’ 이렇게 얘기해보라고요. 여자는 남자와 달리 작은 마음 씀씀이에도 크게 감동받고 오래오래 마음에 간직하죠.”
아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아내를 진심으로 기쁘게 하는 일이 의외로 참 사소하다는 것을 남편이 잘 알지 못하는 데서 더 큰 괴리가 생긴다는 게 김 위원의 생각이다. 가령 늘 허름한 옷차림의 아내에게 ‘꼬라지가 그게 뭐야?’라고 핀잔하는 게 황혼기에 접어든 보통의 우리네 남편이라면 ‘당신 구두가 낡았네, 하나 새로 사자’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내 가슴엔 그 따뜻한 마음이 10년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길거리에 핀 꽃을 바라보는 부인에게 쓸데없는 데 관심을 둔다고 타박하기보다 길거리에 핀 꽃 한 송이라도 가져다주는 게 때론 사업을 잘하고 정치를 잘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 상대를 대접함으로써 스스로를 대접하는 것, 그게 정테크의 기본이다.
남편에게서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하던 김 위원의 마음을 다독인 것 역시 남편의 작고 사소한 배려였다. 초콜릿이 무척 귀하던 시절, 허쉬초콜릿을 좋아하는 김 위원을 위해 남편은 김 위원의 고향집을 방문할 때 그 초콜릿을 잊지 않고 사왔다고 한다. 그래서 허쉬초콜릿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의 마음이 담긴 애틋한 선물로 김 위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실.
양소영 변호사는 부부의 현명한 은퇴 설계가 황혼이혼을 막는 최고의 예방책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한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적 측면에서 훌륭한 재테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황혼기는 부부 두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도 소중하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특히 요즘처럼 자녀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엔 확실한 은퇴 설계와 리스크 관리가 필요합니다. 어느 기자 출신 작가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는 60대에 투자를 잘못해 전 재산을 날리고, 결국 다른 사람의 무덤 관리인으로 살게 됐더군요.
상담을 하다보면 간혹 성급한 은퇴 준비로 배우자가 반대하는 무리한 투자를 하거나 배우자와 상의 없이 큰 결정을 했다 사기당해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를 만나곤 합니다. 현실적으로, 30~40대라면 실패해도 재기 가능성이 있지만 50대에 쓰러지면 대개는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은퇴자금은 절대 무리한 투자에 사용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은퇴 설계를 배우자와 상의해가며 찬찬히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황혼이혼의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겠죠.”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이 이혼으로 입게 되는 경제적 손실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일반적으로, 결혼 20년차 중산층 부부는 수입 대부분을 자녀 양육비와 교육비에 투자하는데, 그러다보면 노년에 남은 건 달랑 집 한 채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혼을 이유로 집마저 반으로 나누고 나면 부부는 졸지에 저소득층으로 전락한다. 재산 증여를 너무 일찍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들의 부양을 기대하고 재산을 증여했다가 ‘배신’당해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효도계약’이라 불리는, 부양을 전제로 한 재산 증여에 관한 소송은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기각된다.
“자식에게 너무 일찍 재산을 증여하는 건 되레 자식이 독립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막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세금을 절약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증여했다가 되돌리지 못해 낭패를 당하는 사례도 많으니 부득이 자녀에게 일찍 재산 증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차용증을 받고 빌려주는 형태를 권합니다. 이자를 받아 생활비로 쓰는 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은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