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0일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사진 중앙)과 조산구 코자자 대표(오른쪽)가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촌 일대를 걷고 있다.
2013년 10월 30일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선도하는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 한국을 방문, 한옥 숙박을 공유하는 벤처 ‘코자자’가 운영하는 한옥에서 점심식사를 한 것이 화제가 됐다. 코자자가 ‘구글문화연구원’에 한옥 관련 콘텐츠를 제공한 것이 이런 인연으로 이어졌다. 한옥을 방문한 슈미트 회장은 “다음 한국 방문 때는 꼭 한옥에서 자겠다”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이 ‘깜짝 방문’ 덕분에 코자자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창업 2년차 신생 벤처 코자자의 조산구 대표는 새해 49세가 된다.
20~30대 청년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벤처 창업 시장에 40~50대 베이비부머 세대가 도전장을 내고 있다. 그간 베이비부머는 ‘치킨집’으로 대표되는 생계형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전문성 없이 이미 포화 상태인 자영업 시장에 뛰어들어 폐업과 재창업을 반복하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최근의 베이비부머 창업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2000년 초반 닷컴 열풍의 주역인 그들은 은퇴 후 IT 관련 지식과 사회 경험을 십분 발휘해 고부가가치 창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서툴지만 성실하게
조산구 코자자 대표는 KT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했고 2010년 LG유플러스 상무로 재직하다 2011년 창업했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를 차리겠다고 했을 땐 대부분 “이 엄동설한에 왜?”라는 반응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둔 두 아들을 생각하면 대기업에 있는 것이 백번 나았지만 그는 “모바일 시장이 뒤바뀌는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창업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 결국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주차장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벤처 ‘모두의 주차장’을 만든 강수남(50) 대표 역시 세계적인 미디어그룹 타임워너에서 15년간 근무하다 2008년 돌연 창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40대 중반이던 그는 문득 ‘10년 후면 은퇴할 나이’임을 새삼 깨닫고 재빨리 제2의 인생 설계에 나섰다.
최근 베이비부머가 창업 전선에 뛰어든 데에는 IT업계가 유난히 정년퇴직 연령이 낮고 이직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기술자의 실질 퇴직연령은 45~46.4세로 일반 제조업 연구개발·기술직군보다 5년 이상 빠르다. ‘30대 대표, 20대 팀장’이 일반적인 벤처 업계에서 40대만 넘으면 대표 외엔 갈 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50대 이상의 스마트폰 활용도가 높아진 것도 베이비부머 ICT 창업 열풍에 기여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스마트폰 사용자 수가 2011년 9.5%에서 2012년 46.8%로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많은 경영자일수록 안정성을 중시하고 위험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병희 한양대 경영대 교수는 ‘시니어 벤처기업의 경영특성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40대 이상이 설립한 시니어 벤처는 청년 벤처보다 비교적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전과 모험이 내재된 벤처 시장에 중장년층이 뛰어들기란 태생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강수남 대표는 “혼자만 생각하면 괜찮아도 가족을 생각하면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사업에 성공할 수 없기에 가능한 많은 준비 끝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창업 문턱이 낮아지면서 IT 관련 경력이 없는 ‘IT 초보 베이비부머’들도 ICT 창업에 도전한다. 지난 11월 초 사업자등록을 마친 초보 벤처 ‘낭낭공방’ 정언랑(45) 대표는 지난해 스마트폰을 구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휴대전화는 전화 받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디지털 문맹’이었다. 재미로 갤럭시노트에 그림을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모바일 메신저로 보냈더니 반응이 좋았다. 정 씨는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린 후 ICT 기술을 통해 머그컵 등 일상용품에 그림을 새기면 어떨까?’라는 구상을 하게 되면서 창업 시장에 도전했다.
정 대표는 “무작정 사업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IT 관련 전문용어를 들으면 낯설고 생소하다. 하지만 이젠 최소한 ‘누구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겠다’는 걸 안다”며 “지금까지의 삶이 IT와 관계없었기에 서툴지만 오히려 더 꾸준히 노력해 주부들에게 희망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만 39세 이하만 청년?
‘디지털 문맹’에서 ‘ICT 창업가’로 거듭난 ‘낭낭공방’ 정언랑 대표.
전국 최초의 시니어 벤처 특화센터인 경기도 수원시 시니어 창업지원센터는 2012년 5월 개소 후 현재까지 70여 개 시니어 벤처를 지원하고 있다. 자금을 직접 지원하진 못하지만 무상으로 사무실을 임대해 고정비 부담을 줄여주고 박사급 인력 4인이 상시 전문화한 컨설팅을 지원한다. 수원시 시니어 창업지원센터 김승철 팀장은 “은퇴 이후 창업은 단순히 아이템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전공 분야에서 5~10년 노하우를 쌓고 제품 분석 및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베이비부머 창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니어 실업률을 낮추고 고령층 부양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수원시가 지원하는 벤처 중에는 대표가 75세인 ‘노인 취업 알선 벤처’도 있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해도 베이비부머들이 20~30대 젊은 동료들과 동등하게 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강수남 대표는 “젊은 동료들과 함께 일하려면 ‘직원들이 나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몫은 꼭 해내야 한다. 절대 ‘꼰대’처럼 굴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젊은 동료들과 친해지기 위해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오랜 사회 경험을 통해 쌓아놓은 인적 네트워크는 베이비부머 창업자에게 큰 무기가 된다. 이와 관련해 강 대표는 “지인들에게 무조건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양방향으로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일방적 도움만 구하다가 오히려 친구들과도 소원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베이비부머의 ICT 창업이 줄을 잇고 있는 데 반해 정부 지원은 여전히 ‘39세 이하’의 청년 창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베이비부머의 창업이 상대적 불평등을 받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중소기업청이 발간한 ‘2013년 창업지원사업 백서’에 따르면 2013년 만 39세 이하 업자에게는 2170억 원이 지원되지만 만 4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창업 지원금은 49억 원에 불과하다. 코자자 조 대표는 “정부에서 ‘청춘의 나이’를 정해놓은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비판했다. 이런 현실에서 청년이 아닌데 창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묻자 조 대표는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그 마음가짐을 뜻한다. 청춘은 나아가는 용기, 안일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정신력을 뜻한다.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에게서 청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