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이후엔 팀원들이 가장 많은 지지를 표시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시제품(prototype) 4가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각각 이동편의, 계산편의, 수납편의, 안전에 초점을 맞췄다. 3시간 만에 완성해야 했으니 결과물은 조악했다. 그러나 각각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어떤 장단점을 가졌는지 확인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시제품을 기초로 완성품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기능을 골라내 정교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둘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시제품 만들기(prototyping)’는 브레인스토밍만큼이나 아이디오를 상징하는 절차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끄집어낸 아이디어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실물 크기로 만들어보는 작업이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물체로 표현하면서 팀원들은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며 마감의 압박을 이겨낸다.
아이디오를 설립한 데이비드 켈리 회장이 자주 하는 말이 “손으로 생각하고, 뭔가 만들거나 시도해본 다음에 얘기하라, 그 반대로 하지 말고”다. 그는 톰 켈리 공동대표의 형이다. 톰 켈리 대표는 “어떤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에 관한 프로젝트라면, 팀원이나 고객에게 실제 해보임으로써 아이디어를 구체화해볼 수 있다”고 했다.
셋째, 넷째 날은 시제품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반영해 설계도를 완성하고, 실물을 제작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째 날 아침 스포츠카처럼 미끈하게 빠진 카트가 완성됐다. 곡선으로 된 뼈대에 바구니 6개를 2단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형태였다. 식품을 담은 비닐봉투도 편리하게 걸 수 있도록 했다. 손잡이 부분에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어린이 의자를 설치하고, 안전띠도 달았다. 주어진 닷새를 다 쓰지 않고도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팀원들은 그날 오후 모두 휴식을 취했다.
“똑똑한 사람과 의논하라”
방송이 나간 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신형 카트보다 아이디오의 작업 방식에 더 쏠렸다. 그전에도 집단 창의성이나 비즈니스 혁신에 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눈으로 확인해준 건 아이디오가 처음이었다. 이후 아이디오엔 혁신적인 제품은 물론 제조 공정 및 기업문화를 새로 디자인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기업들엔 브레인스토밍과 프로토타이핑이 유행처럼 번졌다.
아이디오는 1978년 데이비드 켈리가 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에 세운 작은 디자인 회사로 출발했다. 켈리는 오하이오 주 버버턴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카네기멜론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1973년 보잉사에 입사하면서 보잉 제조공장이 있는 시애틀로 옮겨왔다. 사회 초년병으로 보잉 747기 내부 설계 작업에 참여한 그는 승객들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 중 하나인 ‘lavatory occupied(화장실 사용중)’ 표시등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후 세계 최초로 금전등록기를 개발한 NCR로 이직했다. 그러나 이내 대기업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스탠퍼드대 제품디자인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그는 보잉사 재직 당시 인근 스탠퍼드대에 제품디자인 프로그램이 있는 걸 알고, 인간의 특성을 고려한 테크놀로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학창 시절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자신을 스탠퍼드대가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NCR 본사가 있는 오하이오 주로 떠났다. 그런데 합격 소식이 전해져 스탠퍼드대가 있는 팰러앨토로 돌아왔다. 이후 지금까지 팰러앨토를 근거지로 살고 있다.
1977년 석사과정을 마쳤을 때, 스탠퍼드대 학위를 갖고 일자리를 구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생활이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직접 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자금도 인맥도 없었던 그는 평소 멘토로 여기던 밥 매킴 스탠퍼드대 교수에게 찾아가 함께 일할 동료를 추천받았다.
매킴 교수의 도움으로 켈리는 스탠퍼드대 출신의 딘 허비와 ‘허비 켈리 디자인’을 열었다. 팰러앨토의 의류상가 2층에 사무실 두 칸을 얻고, 스탠퍼드대 졸업생 4명을 엔지니어로 고용했다. 번듯한 사업계획서 같은 것도 없이 사무실부터 열었던 터라 처음엔 스탠퍼드대 교수들이 주는 일감을 받아 처리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독서기계와 의료기기 등을 디자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일마저 없을 때 직원들은 갖은 재료와 소품들을 이용해 희한한 물건을 만들고 짓궂은 장난을 쳤다.
당시 팰러앨토엔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신생기업이 많았다. 켈리는 한가할 때면 스탠퍼드대 동창이 운영하는 다른 디자인회사에 가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자기 회사 사정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 그 회사가 애플과 거래를 하던 터라 스티브 잡스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이후 켈리는 애플 제품 일부를 맡아 디자인했고, 덕분에 회사 인지도가 올라갔다. 애플 제품을 디자인하는 곳이 어디인지 사람들이 궁금해한 것.
켈리는 “잘 모르는 문제나 힘든 결정을 앞두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주위의 모든 똑똑한 사람과 의논하라”고 말한다. 그가 매킴 교수나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동창에게 터놓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허비 켈리 디자인회사는 세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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