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4-01-23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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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 포함한 삼국시대는 세계 유일의 금관 공동체
    • 대일항쟁기 ‘니시하라’라는 고물행상한테 구입
    • 1000여 년 이상 무덤에 있다 출토된 금관인 것은 확실
    • 동북공정에 맞서려면 금관을 연구하라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이다. 왕관이 아니라 금관 분야에서. 금관이란 금판을 기본으로 만든 관(冠)을 가리킨다. 청동이나 구리로 만들거나 금도금한 ‘금동관’ 등은 금관으로 치지 않는다. 천이나 말총, 자작나무 껍질 등으로 기본을 만들고 보석이나 금붙이를 ‘꾸미개(관식·冠飾)’로 단 유럽 왕실의 화려한 왕관도 금관으로 보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의 수는 13개다. 그중 9개가 한국에서 출토돼 현재 8개가 한국에 있다. 한국에서 출토된 9개 중 신라 것이 6개, 가야 것이 3개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 꾸미개는 나왔어도 완전한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의 무덤은 ‘처절할 정도’로 도굴을 당했기에, 꾸미개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

    이러한 한국이 금관 수를 하나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전 세계에 14개가 있는데, 10개가 한국에서 나와 9개를 보유하게 됐다”라고. 추가된 것이 보통 금관이 아니다. 소장자가 고구려 금관으로 주장하는 데다, 이 금관을 최초로 조사한 상명대 사학과의 박선희 교수도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최근 경인문화사에서 출간한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란 저서에서 이 금관을 고구려 것이라고 판정했다.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겠지만 이들의 주장과 판단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우리는 최초로 고구려 금관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현대 기술로 정교히 제작된 ‘가짜’라면 정반대의 결과를 맞는다. 제3의 결과도 나올 수 있다. 더 많은 전문가가 고구려가 아닌 다른 왕조의 금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른 왕조란 백제를 지칭하는데, 이러한 결론이 나오면 우리는 최초로 백제 금관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최초로 공개된 ‘고구려 금관’. 유물수집가이자 문화재 전문가인 김모 씨가 공개했다. 평남 강서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일항쟁기 소금판매업을 한 김 씨 조부가 구입해 집안에서 보관해온 것이라고 한다. 신라나 가야 금관과는 세움장식의 모양이 다른 게 눈에 띈다. 오른쪽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불꽃 무늬 모양의 금제(金製) 관(冠) 꾸미개.

    우리 금관은 머리 위에 올리는 ‘관테’(과거에는 꼭 한자를 썼기에 ‘대륜·臺輪’으로 표기했다)와 관테 위에 세워놓는 ‘세움장식’(立飾·입식), 그리고 관테와 세움장식에 달아 화려함을 더해주는 ‘달개장식’(瓔珞·영락)으로 구성된다. 신라 금관이 ‘날 출(出)’자 모양의 나뭇가지형 세움장식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야 금관의 세움장식도 나뭇가지 형으로 보이나 신라 것과는 형태가 다르다.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관 꾸미개는 일렁이는 ‘불꽃 무늬’ 모양이다.

    이번에 공개된 금관의 세움장식이 불꽃 무늬에 가깝다. 그러니 ‘최초로 나온 완전한 백제 금관이 아니냐’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장자와 최초 판단자가 고구려 금관이라고 주장하니 이를 수용하기로 한다. 사상 최초로 나온 고구려 금관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금관에 대한 정리를 한다.

    통일 이후 금관을 만들지 않아

    우리나라 금관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다. 통일신라부터는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 삼국 통일 직전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동맹을 맺은 후 중국식 제도와 복식을 도입하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는 중국식 관복과 관모가 정착됐으니 금관과 금동관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국에는 가야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4국시대로 불러야 하는데 관례에 따라 그냥 삼국시대로 부른다.

    신라의 금관 6개는 대일항쟁기 일제가 발굴한 금관총·금령총·서봉총 금관, 광복 후 우리가 발굴한 천마총·황남대총 금관 그리고 ‘교동 금관’이다. 이 가운데 가장 고졸(古拙)한 것이 1960년대 경주 교동에서 도굴돼 밀거래 직전 관계당국에 압수된 ‘교동 금관’이다.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신라의 여섯 금관. 왼쪽부터 다섯 개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금관이다. 모두 나뭇가지 모양을 단순화한 ‘날 출(出)’자형 세움장식을 우뚝 달고있다. 오른쪽은 나뭇가지 모양을 ‘뫼 산(山)’자 형으로 단순화한 세움장식이 달려 있는 교동 금관.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가야 금관. 위에서부터 리움금관, 오구라금관, 호림금관. 리움 금관은 ‘현풍도굴사건’으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최종 구입한 리움 금관에는 ‘날 출(出)’자형 신라 금관 처럼 곡옥(曲玉)이 달개장식으로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도굴됐기에 객관적으로 출토지를 증명할 수 없는 유물에는, 출토지로 주장되는 곳 앞에 ‘~라고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 자를 붙인다. 교동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는 금관은 ‘전(傳)교동 금관’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전’자를 떼어낸다. 알려지는 출토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면 소장한 곳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신라 금관은 관테 위에 ‘날 출(出)’자 형태의 세움장식 여러 개가 우뚝 서 있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교동 금관만은 ‘뫼 산(山)’자 형태에 가까운 ‘세움장식’ 세 개만 삐죽 올라와 있다. 미적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것이다. 교동 금관은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가야 금관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학자들은 교동 금관이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일제가 발굴한 최초의 금관인 금관총 금관은 국보로 지정됐다. 그다음으로 발굴해낸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은 최초가 아니기에 보물로 지정됐다. 반면 광복 후 우리가 처음으로 발굴해낸 천마총 금관과 두 번째 발굴해낸 황남대총 금관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이는 국보 지정에도 ‘최초냐 아니냐’ ‘우리가 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교동 금관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도굴된 탓인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다른 판단도 해볼 수 있다. ‘고졸하다고 해서 반드시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추측이다. 이는 기술이나 물자가 부족하면 후대에 했더라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제작 시기를 알려면 이 금관과 함께 나온 동반유물을 조사해봐야 하는데, 교동 금관은 도굴로 세상에 나왔으니 당연히 동반 유물이 없다. 그래서 국보나 보물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신라 금관보다 단순한 가야 금관

    가야 금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전(傳)고령 금관’, 일명 ‘리움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가야가 있었던 경북 고령군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여 ‘전고령 금관’으로 불린다. 여러 차례 거래되다 최종적으로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매입해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돼 있기에 ‘리움 금관’이라고도 한다. 이 금관은, 도굴 세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1963년의 ‘현풍도굴사건’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사건은 경북 달성군 현풍면 농민을 포함한 일단의 도굴꾼들이 현풍면을 비롯한 경북 일대의 고분을 대놓고 도굴해 출토품을 밀거래하다 대구경찰에 검거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규모가 컸고 귀중한 유물을 다수 밀거래했기에 ‘현풍도굴사건’으로 불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검찰에 송치돼 조사받던 중 한 도굴꾼이 “금관이 발견돼 다른 도굴꾼 몰래 빼돌려 매매했다”고 자백했다. 광복 후 이 땅에서 최초로 금관이 나왔다는 자백인지라 온 나라가 주목했다(천마총 금관은 1973년 발굴됐다).

    당국은 “그 금관은 매각돼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회장이 구입해 1971년 중앙박물관에서 자신의 호를 딴 ‘호암컬렉션’전을 하면서 공개했고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이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교동 금관처럼 반드시 불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 백자의 99%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진품으로 판정하고 제작시기를 추정하면 당당히 국보로 지정된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일본 도쿄(東京)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을 한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매입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오구라는 문화재 환수 운동을 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거론하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오구라가 죽자 1981년 그의 아들이 기증해 도쿄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 금관을 둘러싼 최대의 궁금증은 출토지다. 오구라는 경남 창녕군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을 주로 수집했기에 이 금관도 창녕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에 ‘전(傳)창녕 금관’으로 부를 수도 있다. 창녕에는 ‘삼국유사’에 후기 6가야 중의 하나라고 기록된 ‘비화(非火)가야’가 있었으니, 이 금관도 가야 금관으로 분류됐다. 이 금관에서는 풀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솟은 듯한 세움장식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3대 사립 박물관으로는 리움미술관과 고 전형필 선생의 유물을 모은 간송미술관, 그리고 수집가로 유명한 윤장섭 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호림박물관이 꼽힌다. 호림박물관도 가야시대 것으로 주장하는 금관을 갖고 있다. ‘호림 금관’으로 불리는 이 금관은 아주 단순한 모양이다. 장식 없는 관테에, 앞에는 나무줄기 형상의 세움장식, 뒤에는 더 작은 세움장식 하나가 있다.

    원산에서 큰돈 번 조부가 구입

    호림박물관 측은 이 금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증언이나 자료 없이 가야 금관이라고만 주장한다. 윤장섭 선생 자녀를 포함한 박물관 측에 수차 연락했지만 응답이 없거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호림박물관은 문화재청에 평가나 감정을 요구한 적이 없기에 이 금관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가야 금관은 매우 수수하다. 그래서 신라 금관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가야 금관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금관을 만들기 전 두 나라는 모두 금동관을 제작했으니, 그 기술이 각자의 금관 제작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고구려 금관은 평남 강서군에서 도굴 형태로 출토됐다고 하니 ‘전(傳)강서 금관’으로 부를 수 있다. 이 금관의 출토 경위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소장자 김 씨(익명 요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일항쟁기 함남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조부가 ‘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한 ‘서원용성(西原用成)’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금관을 아버지(1917년생, 97세)로부터 전해 받았는데 여기엔 사연이 있다. 그는 조부모를 본 적이 없다. 원산에서 만주로 소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해 큰돈을 모은 조부모는 광복 후 월남하지 못했고, 그는 6·25전쟁이 끝난 1960년대 초 출생했기 때문이다. 조부모는 6남매를 뒀다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남이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아버지)은 일본 주오(中央)대를 다니게 하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성남중에 다니게 했다.

    광복 후 바로 분단이 됐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서울 신길동 집에 거주했다. 할아버지가 골동품 수집에 대단한 취미가 있어 상당한 유물을 수집했으며 둘째 아들을 공부시킬 때부터 서울 집에 상당 부분을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이 유물을 감추고 피난 갔다. 서울 수복 후 돌아와보니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남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인 동생을 잃었다(행방불명). 그리고 한참 지나 그가 태어났다. 재산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도 골동품을 수집했다.

    그는 “철이 든 뒤로 우리 집에 골동품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중요한 것만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이 금관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큰 취미가 없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라고 말했다. K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화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도 유물 수집을 시작한 것.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기에 먹고사는 일로 급급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문화재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즐겨 사용한다. 외부인을 만날 때는 ·#52059;·#52059;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명함을 내놓는다. 또 다른 K대에서 문화재보존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집에는 유물이 넘쳐나기에 그는 3대에 걸쳐 수집한 유물을 고려대 중앙박물관, 단국대 석주선기념관, 상명대 계당박물관, 전북 부안의 청자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동북공정 보며 고구려 금관에 주목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김 씨 조부에게 전강서 금관을 판매한 고물행상 서원용성(‘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의 명함 전면과 뒷면.

    15년 전 그는 인연 있는 상명대 사학과 교수팀과 도예지 답사에 갔다가 함께 온 박선희 교수와 인사를 했다. 둘은 ‘주체성 있는 역사’에 관심이 일치했기에 가끔 만나면 토론을 하며 교분을 쌓아갔다. 그리고 2003년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펼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는 집에 고구려 금관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중국에서는 금관이 단 한 점도 나온 게 없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처럼 고구려도 금관을 제작했다면, 고구려가 우리 문화권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라는 생각을 한 것. 그는 금관을 싸놓은 보따리에 들어 있던 명함을 떠올렸다.

    그 명함 전면엔 ‘古物行商(고물행상)’이라는 직업명과 ‘西原用成(서원용성)’이란 이름, ‘京城府 鐘路區 明倫町 三丁目 七七番地(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란 주소가 찍혀 있었다. 뒷면에는 ‘江西郡 普林面 肝城里 金冠(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금관)’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대일항쟁기의 고물행상은 골동품상이다. 이는 조부가 ‘니시하라’라는 일본 성을 쓰는 골동품상으로부터 (평남)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된 금관을 매입했다는 뜻이었다.

    강서군에는 고분이 많은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 고분들은 고구려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 때문에 일제는 그곳의 고분을 집중 조사해 그 결과를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정리해놓았다. 조선고적도보는 지금도 고구려 고분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힌다. 금관은 삼국시대에만 제작됐고, 이 금관은 강서군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는 고구려 금관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더는 추적하지 못했다.

    중국 조사 ‘고구려 금관 있었다’

    5년이 지난 2008년 박선희 교수가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란 책을 출간했다며 한 권을 보내왔다. 복식사(服飾史) 전공인 박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꼬깔(‘절풍’으로 부르기도 한다)’류의 모자를 써왔는데 여기에서 금관이 유래했다고 정리했다. 이 책을 읽어본 김씨가 박 교수를 만나 집에 보관해둔 고구려 금관을 보여주었다. 무릎을 “탁” 친 박 교수는 그때부터 고구려 금관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輯安)시에는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 고구려 고분이 즐비하다. 2003년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은 그곳에서 그들이 ‘마선 2100호’로 명명해놓은 대형 고구려 무덤을 발굴했다. 장군총처럼 계단식(4단)으로 돼 있는 무덤인데 장군총과 달리 허물어져 있었다. ‘당연히’ 도굴당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돌을 긁어내며 정밀 조사를 하자 550여 점의 유물과 유물 조각이 수습됐다. 그중에 금관에 달았을 것이 분명한 작은 금판의 달개장식이 여럿 나왔다.

    봉건시대에도 도굴은 엄금했기에, 도굴꾼들은 금제품을 발굴하면 바로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청자나 백자는 그대로 유통시켜도 금붙이만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우그러뜨린 다음 녹여서 금덩이로 만들어 거래한 것. 무덤에 들어간 도굴군들은 횃불 등을 켜놓고 이 짓을 했으니, 우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작은 금붙이들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물고고연구소가 그것들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천추(千秋)묘’라는 별명이 붙은 ‘마선 1000호’ 고분을 재조사해 금으로 만든 달개장식과 금동으로 만든 달개장식, 금동으로 만든 관테 조각을 찾아냈다. ‘우산 541호’로 지정해놓은 광개토태왕릉도 정밀 재조사하자 금제 달개장식과 금동제 달개장식, 금동제 관테 등이 출토됐다. 그 양이 매우 많아 한데 모아놓자 한보따리에 이르렀다. 이는 두 무덤에 금관과 금동관이 있었는데 오래전에 도굴당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 자료를 수집한 박 교수는 고구려 고분에는 금관과 금동관이 부장됐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대일항쟁기에 처음 도굴된 고구려 무덤이라면 금관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과학적인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전강서 금관에는 달개장식 하나가 떨어져 있었는데 이를 공주대로 보내 진짜 금인지부터 가려보기로 한 것이다. 공주대 연구팀은 성분 분석 후 ‘금 78.5%, 은 19.1%, 기타 1.6%’라는 결과를 보내왔다. 금동관이 아니라 금관임을 확인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금 성분이 78.5%라는 데 주목했다.

    금관의 때는 위조할 수 없다

    김 씨는 “현대는 기술이 발전했기에 이러한 순도의 금은 만들지 않는다. 현재 금관을 만든다면 금 함유율이 99%, 적어도 90%가 넘는다. 은이나 동은 섞여 있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이어 두 사람은 금관 몇몇 곳에 끼어 있는 새까만 ‘때’에 주목했다. 순금은 녹이 슬지 않는다. 그러나 1000년 이상 무덤에 들어 있으면 시신과 공기 중의 유기물이 썩으면서 금관에 점처럼 침착(沈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때’는 녹이 아니기에 화학처리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덤은 갇힌 공간이라서 공기가 적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많은 산소를 소모하고 나면 산소가 거의 사라져 금속의 부식이 억제된다. 그 때문에 쇠로 만든 제품은 발굴하는 순간 갑자기 많은 산소와 접촉하게 돼 순식간에 부식된다. 이를 막기 위해 발굴자들은 금속품은 발굴하자마자 바로 화학처리를 한다. 이를 역이용해 지금은 금속을 화학처리해 1000여 년간 부식이 억제되다 갑자기 녹슨 것처럼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영악한 골동품상들은 이 방법으로 가짜 금속 유물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기물이 변한 침착물만큼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1000년 만에 발굴한 무덤이면 1000년간, 1500년 만에 발굴한 무덤이면 1500년간 소량의 유기물이 붙어 침착해가면서 만들어진 때는 현대 기술로도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일본 도쿄박물관도 침착물이 붙은 상태로 오구라 금관을 내놓았다. 김 씨는 “이 금관에도 제거되지 않는 침착물이 붙어 있다. 이는 이 금관이 1500여 년간 무덤에 갇혀 있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김 씨와 박 교수는 이 금관이 신라나 가야 금관과는 세움장식이 다르고 강서군에서 출토됐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시하라 명함의 손글씨를 제외하고는 이 금관이 강서군에서 출토됐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는 상태다.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던 기자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강서군의 보원면과 학림면을 통합해 ‘보림면’으로 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보림면은 1914년 이후 등장했다. 그렇다면 니시하라는 1914년 이후 이 명함을 사용한 것이 된다.

    기자는 일제가 강서군 일대의 고분 등을 조사 기록한 ‘조선고적도보’ 등을 찾다가 2010년 동북아역사재단이 4권으로 편찬한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이라는 도록을 보게 됐다. 이 재단의 김현숙 연구위원과 경북대 고고인류학과의 정인성 교수팀이 제작한 이 도록에는 조선고적도보 등을 토대로 일제가 조사한 간성군의 무덤 목록이 기재돼 있었다. 그중에서 간성리 고분으로 무덤 천장에 연꽃 무늬 그림이 있었다고 해서 일제가 ‘연화총(蓮花塚)’으로 명명한 것 하나가 있었다.

    니시하라는 누구인가

    연화총 조사는 ‘조선고적도보’를 만든 세키노 다다스(關野貞·1867~1935)와 훗날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을 조사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의 기초를 다진 야스이 세이이치(谷井濟一·1880~1959)가 시도했다. 두 사람은 고조선사도 펴냈는데 그때 ‘낙랑군 등 한4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비정해 지금도 우리는 한4군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배우고 있다. 중국의 많은 사료는 한4군이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갑갑한 ‘반도사관’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1912년 9월 12일 연화총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미 도굴당해 쇠로 만든 못 하나만 발견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렇다면 ‘1912년 이전 누군가가 연화총을 도굴해 이 금관을 갖고 있다가 1914년 이후 김 씨 조부에게 판매한 것일까’ ‘아니면 간성리에 있는 다른 고분을 도굴해 꺼낸 것일까’ 등의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니시하라의 주소지인 명륜정은 지금 명륜동이다. 대일항쟁기 명륜정은 성균관이 가까이 있어 조선인이 많이 살았다. 일본인은 명동과 용산 일대에 몰려 살았다. 니시하라의 이름인 ‘용성(用成)’은 일본인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고 조선인 이름에서 많이 보이는 한자다. 그렇다면 성은 일본식으로 바꾸고 이름은 그대로 쓰는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고물행상이 이 금관을 김 씨 조부에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한 시기가 1940년부터이므로 니시하라는 1940년 후 이 금관을 김 씨 조부에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기자는 여기까지 추적했다.

    삼국시대는 금관-금동관 공동체

    주체성 있는 역사를 추적하는 사람들은 평남 강서군을 고구려 영역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들은 백제가 대륙에 있다가 북한을 거쳐 경기-충청-호남지방으로 남하했다고 본다. 이들은 “강서군 일대의 고분은 중국 지안 일대의 고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며 이 무덤들을 백제 것으로 보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뿌리(동명왕)에서 나왔기에 유사성이 강한데, 일본인 학자들이 백제 영역을 경기-충청-전라도로 비정해놓은 사관에 갇혀, 강서군 고분을 고구려 것으로 쉽게 비정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지금 한국 사학계는 강서고분군(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각종 유물을 낙랑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낙랑군은 그 지역에 없었는데 왜 낙랑유물로 규정하는가. 그 유물은 강서지역에 있던 백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시기 고구려는 보다 북쪽인 지안과 랴오양(遼陽) 등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수용하면 전강서 금관은 백제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2003년 중국의 재조사 결과는 고구려도 왕릉에 금관을 넣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고구려는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어 전강서 금관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니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말려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제가 만든 고조선사와 고구려사에 갇혔고, 지금은 중국이 만드는 고조선-고구려사에 휘둘린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중국과 완전히 구분되는 금관-금동관 공동체였다는 것을 우리 역사학계는 왜 외면하는가. 김씨와 박 교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무능과 무소신을 감추기 위해서인가. 이제는 역사학계가 나서서 이 금관에 대한 정밀조사를 하고 니시하라의 정체를 추적해야 한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규정하고 싶다면….

    (이 금관을 찍은 동영상 등 보다 많은 정보는 blog.donga.com/milhoon에서 소개한다).

    다른 나라가 소장한 금관

    틸리아테페, 사르마트, 이시크, 진국공주 금관


    다른 나라의 금관 가운데 셰계적으로 유명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테페(Tillya Tepe)’ 6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이 금관은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해에 발굴됐다, 소련 강점기와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최근 세계인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두 번째는 흑해 북쪽에 있는 로스토프 지역 노보체르카스크 호흐라치 무덤군(群)에서 출토된 ‘사르마트(Sarmat) 금관’이다. 사르마트인들은 금 세공에 능했던 스키타이인들과 교류하고 싸웠던 종족이다. 일부 학자들은 사르마트인들을 스키타이 종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 금관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 번째가 알마타 동쪽에 있는 이스크(Issyk)의 적석(積石)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황금 옷과 황금 검, 황금 모자로 치장한 전사(戰士) 시신에 씌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시신은 사라져 전사의 체구가 작다는 것만 확인했다. 전사에게 씌운 것이라 투구에 가까운 모양이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네 번째가 중국 내몽골자치구 철리목맹(哲理木盟)에 있는 요(遼)나라 진국(陳國)공주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도 이시크 금관처럼 머리에 눌러써서 뒷머리까지 덮어버리는 투구형이다.

    우리 금관과 전혀 다른 형인데 이러한 것도 금관으로 본다면 우리 금관은 더 늘어난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고깔 형태의 금관모도 출토됐기 때문이다.

    요나라는 중국으로 볼 수 없다. 북방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한족이 세운 송(宋)나라를 공격해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과 만주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 시기 중국의 정통은 송나라가 이었다. 진국공주 무덤의 유물은 전부 프랑스 기메(guimet) 박물관에 있다. 이 박물관은 신라 금동관도 소장하고 있다.

    백제와 가까웠던 일본에서는 아직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 금동관 신라형 금동관은 여럿 출토됐다. 후지노키(藤ノ木) 고분에서는 전강서 금관과 비슷한 불꽃 무늬 또는 가지 많은 나무모양으로 볼 수 있는 세움장식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일본은 우리 금관-금동관 문화권의 아류로 판단된다.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틸리아테페, 사르마트, 이시크의 황금전사(머리에 쓰인 것을 금관으로 본다), 진국공주 금관(왼쪽부터). <출처 위키피디아와 http://blog.naver.c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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