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외적 막기’보다 ‘내 자리 지키기’

아부의 기술, 아첨의 정치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입력2015-08-20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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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신과 아첨꾼은 백지 한 장 차이다. 간신은 아부와 아첨에 능수능란하고, 아부와 아첨이 지나치면 간신이 되는 법이다. 난국일수록 간신들이 판을 치고, 아부와 아첨을 일삼는 이들이 넘쳐난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난국이 따로 없다. 이럴 때일수록 아부와 아첨에 능한 이들을 멀리해야 한다.
    ‘외적 막기’보다 ‘내 자리 지키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특이한 기록이 많다. 오늘날로 치면 테러리스트에 대한 기록인 ‘자객열전(刺客列傳)’이 있는가 하면, 코미디언들의 기록이라 할 ‘골계열전(滑稽列傳)’도 있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아부와 아첨을 서슴지 않은 아부꾼 내지 아첨꾼에 관한 ‘영행열전(영幸列傳)’이라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영행열전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속담에 ‘힘써 농사짓는 것보다는 풍년을 만나는 것이 낫고, 착하게 벼슬살이하는 것보다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빈말이 아니다. 여자만 미모와 교태로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벼슬살이에도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다.

    정계와 관계에서 편히 잘살려면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서한 왕조에 들어와서 갖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황제에게 잘 보여 출세한 자들을 열거했다.

    이들 아첨꾼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 고조 유방은 성품이 사납고 강직해 아첨꾼들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군주였다. 하지만 적(籍)이라는 아첨꾼을 총애해 늘 곁에 둘 정도였고, 대신들이 보고를 올릴 때면 이자를 통해야만 했다. 유방의 아들 혜제(惠帝) 주변엔 굉이란 아첨꾼이 있었다.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젊은 예비 관료 대부분이 굉처럼 새털로 꾸민 모자와 조개껍데기로 장식한 허리띠에 분을 바르고 다니면서 공공연히 굉의 패거리로 행세할 정도였다.

    사마천은 두 아첨꾼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순종하고 아부하는 것으로 황제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권력자가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자기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비위를 맞추는 아부꾼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아부와 아첨의 정치가 통치자를 흔들고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간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눈치 못 채게 전달하라

    ‘외적 막기’보다 ‘내 자리 지키기’
    권력이 제왕 1인에게 집중된 왕조 체제에서는 정직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보다 아부와 아첨을 통해 부와 권력을 차지한 아부꾼들이 득세했다. 그에 따라 놀라운 아부와 아첨의 기술들이 창안됐다.

    ‘첨유지술(諂諛之術)’이라고 하는 이 기술의 핵심은 상대가 눈치채지 않게 어떤 표현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 장의(張儀)가 초나라에서 식객으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장의는 초나라 왕의 태도에서 자신을 점점 멀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에게 냉담한 것은 물론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감정도 악화돼갔고, 심지어는 시종들 사이에서도 자신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장의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 초왕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귀국에서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북쪽 위나라 군주를 만날까 합니다.”

    “좋소. 원한다면 가시오!”

    “덧붙여 한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대왕께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위나라에서 가져다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금은보화나 상아 등 모든 게 우리 초나라에 흔한데, 위나라의 무엇이 필요하겠소?”

    “그렇다면 대왕께서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무슨 소리요?”

    “정(鄭)이나 주(周)나라는 중원에서도 아름다운 여자로 유명해서 흔히 사람들이 선녀로 오인할 정도지요.”

    장의는 이 대목을 유달리 강조했다. 당시 초나라는 남방의 후진국으로, 문화가 앞선 위나라 등 중원 지역의 나라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것을 갖고 있던 차였다. 그러자 초나라 왕은 더 이상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왕은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초나라는 남방에 치우쳐 있는 나라요. 중원의 여자가 그렇듯 아름답다는 것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소. 그러니 신경 써서?.”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그러면서 초나라 왕은 장의에게 보물 등 자금을 두둑이 줬다. 왕후 남후(南后)와 초나라 왕이 총애하는 후비 정수(鄭袖)가 이 얘기를 듣고는 속으로 매우 초조해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사람을 통해 장의에게 많은 황금을 보냈다. 말로는 ‘여비에 보태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미녀를 초나라로 데려오지 말라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였다. 남후와 정수는 ‘초나라에서는 귀한 존재’로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장의의 계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는 길을 떠나기 전에 초나라 왕에게 자신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요즘 같은 난세에 길을 떠나면 언제 다시 왕을 뵐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사오니, 아무쪼록 술자리를 한번 마련해주십시오.”

    초나라 왕은 장의를 위해 송별회를 마련했다. 술자리가 거나하게 무르익을 무렵 장의가 갑자기 절을 하며 “더 이상 이런 자리는 없을 것 같사오니, 원하옵건대 왕께서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는 분들로부터 술을 한잔 받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곧 남후와 정수를 불러 장의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두 여자를 본 장의는 탄성을 지르며 초나라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또다시 넙죽 절을 했다.

    “이 몸 장의, 대왕께 사죄하옵니다.”

    “무슨 소리요?”

    장의는 이 대목에서 또 한 차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달콤한 말을 내뱉었다.

    “이 장의, 천하를 두루두루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들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그런데 위나라에 가서 미녀를 얻어 오겠다고 했으니, 대왕을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이렇게 절세가인을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초나라 왕에게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미녀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니 왕을 속인 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후비를 극찬하는 말을 들은 초나라 왕은 화를 내기는커녕 “개의치 마시오. 나 역시 천하에 저들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라며 장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남후와 정수는 일찍부터 고만고만한 칭찬에 싫증이 나던 차에, 장의와 같은 비중이 있는 인물로부터 칭찬을 듣고 보니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장의는 이처럼 교묘한 아첨술로 초나라 궁정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상대의 필요한 부분을 만족시켜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무작정 후한 예물과 아부로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부의 기술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던져준다’는 ‘투기소호(投其所好)’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거나 비위를 맞춘다는 의미의 이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양모(陽謀)와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음모(陰謀)를 모두 포함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외적 막기’보다 ‘내 자리 지키기’
    재물 탐하다 ‘혼수품’ 신세

    기원전 658년 진(晉)나라 대부 순식(荀息)은 굴지(屈地)에서 나는 좋은 말과 유명한 수극(垂棘)의 옥을 우공(虞公)에게 뇌물로 주고 우나라의 길을 빌려 괵을 멸망시킨 다음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투기소호’의 모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좋은 본보기다. ‘가도벌괵(假道伐괵)’이란 고사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순식은 우공이 재물을 탐내고 이득이 생기는 일이라면 의리쯤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에게 뇌물을 먹이는 한편 감언이설로 그를 칭송했다. 우공은 진나라가 친구의 나라이지, 다른 야심을 가진 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우공은 궁지기(宮之奇)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라는 망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혀, 진나라 헌공(獻公)의 딸이 시집가는 데 딸려가는 혼수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 노릇을 한 제나라 환공의 측근으로 수조(竪조), 역아(易牙), 개방(開方) 세 사람이 있다. 모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숨기고 갖은 궁리를 다해 권력을 잡으려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아부, 뇌물, 부추김, 감언이설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환공의 환심과 신임을 얻는 데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세 살 아들 삶아 바쳐

    수조는 환공을 옆에서 보살피는 직책상의 이점을 한껏 활용했다. 환공의 생활 습관과 기호를 소상하게 알아내 환공이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환공은 이런 수조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했다.

    역아는 요리에 아주 능했다. 그는 먼저 환공의 애첩 장위(長衛)의 총애를 얻은 다음 환공에게 접근해 신임을 얻었다. 언젠가 한번은 환공이 농담으로 “사람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며 “사람 고기 맛은 어떤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를 들은 역아는 세 살 난 제 친아들을 삶아서 그 고기를 환공에게 갖다 바쳤다. 환공은 역아가 자신을 위해 친자식까지 희생했다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친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갸륵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역아는 환공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개방은 환공이 여자를 밝힌다는 사실을 알고는 위(衛)나라 의공(懿公)의 딸이 아름답다며 환공에게 추천했다. 이에 환공은 의공의 두 딸을 차례로 첩으로 삼았고, 따라서 개방도 환공의 총애를 받게 됐다. 제나라 환공은 수조, 역아, 개방에게 홀려 혼탁한 생활에 빠졌다. 결국은 자신도 비참하게 굶어 죽는 화(禍)를 자초했다. 죽기 직전에 깨달았다고는 하나 때는 이미 늦었다.

    봉건사회에서 군주는 독재권을 마구 휘둘렀고 신하는 오로지 그 명령에만 따랐다. 민주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간신배나 소인배치고 아부와 음모 등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군주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통치자의 신임을 얻으려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투기소호’가 음모로 사용될 때는 더욱 보편적인 양상을 띠고 등장한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투기꾼 정객들의 뛰어난 장기였다. 이런 음모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만 존재한다면 언제든지 활용될 여지가 있었다.

    “발칙한 것, 코를 베어라!”

    ‘외적 막기’보다 ‘내 자리 지키기’
    중상모략은 아부꾼이나 아첨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는 ‘중상제인(中傷制人)’이라 하는데 ‘중상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의 격동기이던 전국시대에 갖은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이 난무했고,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중상모략에 관한 역사적 고사가 많이 기록돼 있다.

    이웃나라 임금이 초나라 왕에게 미녀를 선물했다. 초나라 왕은 이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초나라 왕의 애첩들 중에 정수(鄭袖)라는 여자는 새로 온 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옷, 장식품, 가구, 이불 등을 아낌없이 내줬다. 그 관심의 정도는 초나라 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초나라 왕을 감동시켰다.

    “여자는 미모로 남자를 휘어잡으려 하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강한 것이 일반적인데, 정수는 내가 그녀에게 잘 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보다 더 그녀를 잘 보살피는구나. 마치 효자가 부모를 공경하듯, 충신이 임금을 섬기듯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다니 좋은 여자로고!”

    초나라 왕이 정수를 칭찬하고 있을 때, 정수는 조용히 그 미녀를 찾아가 이런 말을 했다.

    “왕께서 너를 무척이나 아끼시지만 오직 한 가지, 네 코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천으로 코를 가리고 왕을 뵙는 게 좋을 것이야.”

    미녀는 정수의 충고에 아주 감격해하며, 그 후 왕을 만날 때면 늘 천으로 코를 가렸다. 초나라 왕은 아주 의아해 하다가 어느 날 정수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어째서 나를 볼 때면 천으로 코를 가리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괜찮으니 말해보라.”

    “대왕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만?.”

    “뭐야!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

    초나라 왕은 즉시 미녀의 코를 베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 고사는 ‘전국책’과 ‘한비자’ 등에 실려 있다. 신임을 잃게 만드는 데 흔히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중상모략이다. 그러나 중상모략을 상대가 알아차리면 그 작용과 효과는 보잘것없어지며, 심지어 원래 의도와 완전히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남의 칼을 빌려 상대를 죽인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은 아부꾼이나 아첨꾼들의 단골 메뉴다. 자신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타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상대를 제거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로 속고 속이는 술수로, 지난날 부패한 관료 사회 내지 민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계략이다.

    ‘빌리는 법’의 오묘함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紅樓夢)’ 제16회에서 “우리 집안의 모든 일은 그 할망구가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뭐가 좋겠어? 조금만 잘못해도 ‘빗대어 욕하는’ 잔소리란…. 산에 앉아서 호랑이가 싸우는 구경이나 하고,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고, 바람을 빌려 불을 끄고, 남의 어려움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하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모른 척하고, 이 모두가 전괘자(全掛子)의 수완이지”라고 말한 대목이 좋은 예다.

    차도살인은 모략과 관련된 많은 저서에 그 이론과 실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예컨대 ‘병경백자’와 ‘차자(借字)’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힘이 달리면 적의 힘을 빌리고, 죽이기가 힘들면 적의 칼을 빌려라. 재물이 부족하면 적의 재물을 빌려라. 장군이 부족하면 적장을 빌리고, 지혜와 모략으로 안 되면 적의 모략을 빌려라.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적을 꼬드겨 대신 하게 하는, 즉 적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적으로 적을 빌리고, 적이 빌린 것을 다시 빌리고 해서 적으로 하여금 끝까지 빌린 것을 모르게 하고, 적이 알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위해 빌린 것으로 알게 하는 것. 이것이 ‘빌리는 법’의 오묘함이다.

    ‘한비자’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정(鄭)나라 환공(桓公)이 회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회나라의 영웅호걸, 충신, 명장, 지혜가 뛰어난 자, 전투에 용감한 자들을 조사해서 명단을 작성했다. 일단 회나라를 쓰러뜨리면 이들에게 그 나라의 좋은 땅과 벼슬을 나눠주겠노라 내외에 공포했다. 그런 다음 환공은 회나라 국경 근처에 제단을 차리고는 작성한 명단을 땅에 묻은 뒤 닭과 돼지의 피로 제사를 올리며 영원히 약속을 어기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회나라 임금이 이 얘기를 듣고는 국내에서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 정 환공이 작성한 명단에 들어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다. 환공은 이 틈을 타 회나라를 공격해 힘 안 들이고 빼앗았다.

    “코피 쏟으며 일하겠습니다”

    ‘한비자’에 ‘식여도(食餘桃)’란 의미심장한 고사가 전해진다.

    위나라에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미자하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의 명이라 속여 임금이 타는 수레를 타고 나가 어머니를 보고 왔다. 위나라 법에 따르면 임금이 타는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러나 왕은 “효성스럽구나! 어머니를 위해 발이 잘리는 형벌을 무릅쓰다니”라며 되레 미자하를 칭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미자하가 임금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 하나를 따서 맛을 보니 무척 달았다. 미자하는 한입 베어 먹고 남은 복숭아를 임금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임금은 매우 기분 좋다는 듯이 “나를 몹시 사랑하는구나! 자신의 입맛은 잊고 나를 생각하다니”라며 미자하를 칭찬했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봐주지 않는다. 미자하의 용모가 시들어가면서 임금의 귀여움도 점점 시들해졌다. 미자하가 무슨 일로 잘못을 범해 위나라 왕에게 죄를 짓자 임금은 “너는 그 옛날 내 수레를 멋대로 탔고, 또 내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기도 했지”라고 말했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 ‘먹다 남은 복숭아’ 우화를 통해 한비자는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인간의 애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칭찬을 듣고 나중에는 죄를 얻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사랑이 미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을 때는 하는 언행 모두가 임금 마음에 들고 더 가까워지지만, 일단 임금에게 미움을 사면 아무리 지혜를 짜내서 말을 해도 임금 귀에는 옳은 말로 들리지 않을뿐더러 더욱 멀어진다. 그러므로 말을 올리거나 논의를 펼칠 때는 군주의 애증을 미리 살핀 다음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부와 아첨의 정치는 우리 정치판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삼권분립이 엄연한 나라에서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앞에서 “코피를 쏟으며 일하겠습니다”라며 닭살 돋는 아부를 하고, 대통령은 이에 대해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십니까”라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간신’되는 건 시간문제

    다음은 북제 시대 때의 대간신 화사개(和士開)와 군주 고담(高湛)이 주고받은 기막힌 대화다.

    “전하께서는 하늘나라 사람이십니다.”

    “경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오.”

    송나라 문제(文帝)가 낚시를 나갔다가 도무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푸념하자 옆에 있던 왕경이란 아첨배가 잽싸게 이런 말을 했다.

    “고기를 낚는 사람이 너무 깨끗해서 물고기란 놈이 감히 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가들의 언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부와 아첨꾼들이 간신으로 변모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역사는 생생하게 입증한다. 조직을 배신하고 나라를 파는 간신의 가장 큰 장기가 아부와 아첨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은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은 겁나지 않아도 자기 자리 흔들리는 것은 겁을 내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요즘 우리 정치가 그래서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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