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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를 아시나요

힐러리 예찬 HBO 드라마 제작 ‘독한’ 이탈리아 소설

  •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엘레나 페란테’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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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샐린저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베일 속에 숨긴 세계적인 소설가가 새롭게 등장했다. 성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 그의 소설 ‘나폴리 4부작’은 막장과 페미니즘을 한데 아우르며 전 세계적으로 ‘페란테 열병’을 일으키고 있다.
[한길사 제공]

[한길사 제공]

‘호밀밭의 파수꾼’ ‘향수’ ‘사람아! 아, 사람아’.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고전 반열에도 오른 작품이다. 하나 더. 저자들은 대중과 거리를 둔 ‘은둔의 삶’을 살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제롬 샐린저(Jerome D. Salinger)는 신비주의 작가의 대표 격이다. 그는 미국 뉴햄프셔주 코니시에서 은수자(隱修者)처럼 평생을 보냈다. 그의 생전에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전기를 펴내자 소송을 걸었다. 책에 인용된 신상 정보, 사적 편지와 아울러 자신이 거론된 인터뷰 기록을 죄다 지워버렸다.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은둔 생활은 샐린저를 능가한다. 세상에 공개된 그의 사진은 단 두 장. 그마저 공개한 친구와는 절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격변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을 ‘사람아! 아, 사람아’ ‘시인의 죽음’ ‘하늘의 발자국 소리’ 등 3부작으로 펴낸 다이허우잉(戴厚英)의 별칭은 ‘안개속의 꽃’이다.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다.

맨부커상 놓고 ‘채식주의자’와 경합

1월 12일 한파가 몰아치던 날 저녁,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 공간 ‘순화동천’에서 한 이탈리아 작가를 위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그의 대표작 ‘나폴리 4부작’을 펴낸 한길사 김언호 대표, 마르코 델타 세타 주(駐)한국 이탈리아 대사, 작품을 옮긴 김지우 번역가,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가 자리했다. 130석 남짓한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네 권 합쳐 2436쪽, 벽돌만 한 소설책을 주제로 한 행사에 정작 주인공이라 할 저자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국(異國)의 독자들이 주인공 없는 ‘비(非)정상 행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뭘까? 이탈리아와의 물리적 거리, 내한(來韓) 경비 문제…. 상식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어느 누구도 작가의 진짜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작품 외에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작가. 그는 2016년 ‘타임’ 주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도 높다. 나폴리 4부작은 2014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후보로 꼽혔다. 2015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 문학상 스트레가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같은 해 ‘타임’은 ‘올해 최고 소설 1위’, ‘가디언’은 ‘작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심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경합했다. 



“제발 정체를 밝혀주세요”라는 세상에게 작가는 말한다. 

“책이 출간되고 난 후부터는 저자가 필요 없다고 믿는다. 책에 대해 할 말이 남아 있다면 독자를 찾아 나서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작가가 나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엘레나 페란테는 데뷔 때부터 작가가 사용하는 필명. 엘레나는 제우스의 딸 헬레나를, 페란테는 ‘과감한 여정’을 뜻한다. 그는 모든 미디어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전속 출판사 대표하고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인터뷰도 서면으로만 한다.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1950년 전후 이탈리아 나폴리 출생, 대학에서 고전문학 전공, 문학과 외국어에 조예가 깊음, 외국 생활 경험이 길다는 정도다. 모두 확인된 사실이 아니고 추측이거나 정황 증거다. 성별조차 확실하지 않다. 여성이지 않겠느냐고 다수의 독자가 추측할 뿐이다. 반면 로마대학은 “텍스트 분석기법으로 작품을 분석한 결과 남성 작가”라고 주장한다. 

언론이 추적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2016년 10월 이탈리아 경제지 ‘일 솔레 24오레’ 탐사보도 전문기자 클라우디 가티는 아니타 라자(Anita Raja)를 엘레나 페란테로 지목했다. 라자의 부동산 기록과 그의 전속 출판사 ‘에디지오니 e/o’의 수입·지출 기록을 증거로 제시했다. 출판사 송금 자료 분석 결과 2014년부터 라자에 대한 인세 지급액이 크게 늘었고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지급할 만한 금액이었다는 것이다. 

가티가 지목한 라자는 로마에 거주하는 번역가로, 나폴리 출신 저명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Domenico Starnone)의 아내다. 출판사는 기사의 사실관계 확인을 거부했다. 라자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문학계도 ‘불필요한 작가 신상 털기’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두 여성의 투쟁적 삶 다뤄

레누와 릴라. ‘나폴리 4부작’은 동갑내기 두 소녀의 평생에 걸친 우정과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한길사 제공]

레누와 릴라. ‘나폴리 4부작’은 동갑내기 두 소녀의 평생에 걸친 우정과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한길사 제공]

‘얼굴 없는 작가’ 엘레나 페란테에 관해 확인된 사실은 작품 출간 이력이 유일하다. 1992년 ‘성가신 사랑’으로 데뷔했다. 10년 공백 끝에 2002년 ‘버려진 나날들’을 발표했다. 4년 후 ‘어둠의 딸’을 출간하며 이른바 ‘나쁜 사랑 3부작’을 완간했다. 

엘레나 페란테가 본격적인 필명을 얻게 된 것은 2011년이다. 그해 나폴리 4부작의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 냈다. 연이어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1년에 한 권씩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1권은 ‘레누’와 ‘릴라’라는 두 여성의 유년기와 사춘기 우정이 주제다. 주인공 레누와 친구 릴라는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 소꿉친구. 시청 수위의 딸 레누는 순종적인 성격의 노력파 모범생. 구두 수선공의 딸 릴라는 거칠고 도발적이지만 천재성을 타고났다. 

늘 노력하지만 친구의 명석함을 따라갈 수 없는 레누에게 릴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Muse)다. 릴라는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한다. 레누는 이에 자극받아 공부하지만 친구의 탁월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학업뿐만 아니다. 릴라는 자랄수록 아름다워지고 아우라까지 발하며 뭇 남성의 이목을 끈다. 이를 보며 레누는 뚱뚱한 데다 안경까지 낀 자신을 자책하며 열등감을 느낀다. 경제력 탓에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꿈이 좌절되는 릴라와 꿈을 이루는 레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환경에 반응하며 요동친다. 둘의 우정은 사랑과 미움, 동정과 질투가 한데 뒤섞인 흙탕물 같다. 

2권은 릴라의 불행한 결혼과 이혼이 주제다. 가정 형편 때문에 릴라는 구두 수선공 아버지 일을 돕는다. 그녀는 일에서도 눈부신 재능을 발휘해 집안의 성을 딴 ‘체룰로 구두’를 만든다. 식료품점 주인 스테파노는 릴라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며 구혼한다. 한데 그에게 릴라의 열정이 담긴 구두는 사업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스테파노는 구두를 나폴리 마피아 조직의 일원에게 팔아넘긴다. 결혼식장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릴라는 신혼여행에서 분노를 표출한다. 돌아온 것은 스테파노의 폭력. 릴라는 첫날밤 신랑에게 강간당하는 신부 신세가 된다. 부유하지만 천박한 스테파노와의 결혼 생활 속에서 릴라는 세속적이고 영악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반면 학업을 지속한 레누는 피사의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솔페리노 다리에서 릴라의 흔적이 담긴 공책을 모두 버린다. 레누는 자신과 릴라를 비교하지 않고 진정한 ‘엘레나 그레코’ 본연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엘레나 그레코는 작가이자 평론가로 데뷔한 레누의 필명이다. 

3권은 새로운 이름, 새로운 자아를 찾은 레누의 성공과 일탈이 주제다. 대학을 졸업한 레누는 피렌체에서 명문가 출신 대학교수 피에트로와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첫 출간한 소설도 호평받는다. 두 딸도 얻는다. 작품 활동과 육아를 병행하게 된 레누의 몸과 마음은 지쳐간다. 겉보기에는 행복한 결혼 생활은 하루하루가 권태의 연속일 뿐이다. 결국 레누는 가정을 버리고 첫사랑을 찾아가 일탈을 벌인다. 같은 시기, 스테파노와 이혼한 릴라는 외아들을 데리고 나와 햄 공장에서 일하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명석한 릴라는 당시만 해도 낯선 컴퓨터에 눈떠 ‘시대를 앞선 여성’이 되고, 노조를 조직해 햄 공장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에 나선다. 

4권은 중년을 거쳐 노년에 접어든 레누와 릴라 이야기다. 피에트로와 결별한 레누는 나폴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에게 나폴리는 곧 부모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릴라를 더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릴라와 레누는 한 지붕 아래 살게 되고, 둘의 사이는 다시 가까워진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출산한다. 새로운 우정을 회복했지만 사랑과 미움, 동정과 질투의 감정은 여전히 교차한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들은 용수철처럼 팽팽하게 두 사람 사이를 가까워지게도 멀어지게도 한다. 레누는 자신의 딸 임마와 릴라의 딸 티나를 비교하며 다시금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여성들의 ‘해리 포터’

[한길사 제공]

[한길사 제공]

주인공 레누와 릴라는 외견상 상반된 존재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을 지녔다. 둘 다 지식욕, 글쓰기에 대한 욕망,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작가 레이첼 커스크(Rachel Cusk)는 “하나의 완벽한 여성이 둘로 나뉜 것 같지만 사실 레누와 릴라는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이기도 하다”고 평한다. 릴라가 없으면 레누는 존재할 수 없고 레누가 없는 릴라도 마찬가지다. 두 요소 중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나폴리 4부작을 쓰는 동안 나는 사건, 캐릭터, 감정, 터닝 포인트를 다시 다듬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계획적인 일도 하지 않았다”는 엘레나 페란테의 말에서 짐작하듯 이 연작 소설은 지극히 사적(私的)인 소설이다. 동시에 시대소설이다. 책을 읽다 보면 격동의 이탈리아 현대사 한복판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 든다. 

한편 나폴리 4부작은 페미니즘 문학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엘레나 페란테는 말한다. “우리는 남성의 상징 시스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남성은 여성의 상징 시스템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세상이 여성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나아가 남성들은 의심 없이 그들의 시스템 안에 있는 현재의 우리를 인정해야 한다.” 작품은 여성의 시선과 입을 빌려 남성 중심의 세상을 묘사한다. 여성 독자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당연하다. 사라 넬슨 아마존 편집장은 “미국 여성에게 페란테의 존재는 어린이들에게 해리 포터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번역 작품에 대해 평이 인색한 영미권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돼 런던 사우스웨스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로즈극장 무대에서 상연됐다. 미국 HBO와 이탈리아방송협회(RAI)는 드라마로 제작하는 중이다. 출간됐거나 출간 예정인 국가가 47개국에 달한다. 

나폴리 4부작은 강렬하고 독하다. 전염성도 높다. ‘페란테 열병(Ferrante Fever)’은 전 세계에 유행 중이다. 사랑, 우정, 불륜, 강간, 이혼, 미성년자 성교, 폭력, 범죄 조직 등 이른바 ‘막장 드라마’ 요소를 고루 갖추고 독자를 빨아들인다. 읽기 시작하면 다음 권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힐러리 클린턴도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 나폴리 4부작의 1권을 펼쳤을 때 책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작가가 묘사한 모든 장면에서 감정의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다. 프랑스 ‘르몽드’는 “페란테는 마약 같다. 단어, 메타포 그리고 외설적 표현까지”라고 썼다. 

한국 독자의 ‘페란테 앓이’도 이어지고 있다. 2016년 7월 1권 출간 후 2017년 12월 4권 완간까지 한국 내 번역·출판을 맡은 한길사에는 “다음 권을 빨리 출간해달라”는 격려성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팔렸고, 국내에서는 2월 중순 현재 4권 합쳐 18쇄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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