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고도 낯선 나라로 여겨지던 멕시코가 최근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픽사·디즈니가 내놓은 멕시코 배경의 애니메이션 ‘코코’, 그리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방송가에서 종횡무진 활동 중인 멕시코 청년 크리스티안 부르고스 덕분이다. ‘코코’는 2월 초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한 외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를 지금까지 다섯 번 관람한 크리스티안을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코코’ 이야기를 들었다.
[지호영 기자]
크리스티안 부르고스(25)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한 말이다. 눈썹을 치켜올린 채 싱긋 웃는 표정이 여러 TV 프로그램을 통해 본 딱 그대로다. 멕시코에서 나고 자란 크리스티안은 2014년 12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불과 3년여 만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멕시코 출신 방송인이 됐다. 이제 그는 ‘이 사람 멕시코인 맞아?’라는 의문이 들 만큼 한국어와 한국 생활에 익숙하다.
크리스티안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 여의도 IFC몰 지하에 있는 극장 CGV였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그곳에서 잠시 ‘코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하자 그는 미로 같은 상점가를 능숙하게 헤쳐 나가 근처에 있는 조용한 카페로 기자를 이끌었다.
“제가 멕시코에서는 길치였어요. 한국에 온 뒤 오히려 길을 아주 잘 찾게 됐죠. 처음에 진짜 많이 헤맸는데, 길을 자꾸 잃다 보니 언제부턴가 모르는 길이 없어졌어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크리스티안이 한 얘기다. 한국어도 그렇게 익혔다고 한다. 처음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하지만 틀려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어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관용어와 축약어까지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한국어의 달인’이 됐다. 이만큼 달려온 지난 몇 년이 많이 힘들었던 걸까. ‘코코’를 볼 때마다 눈물을 참느라 고생한다는 크리스티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졌다.
메리골드가 전해준 고향의 기억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멕시코 사람들은 매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죽은 자들의 날’을 기념한다. 이때가 되면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 메리골드(금잔화) 꽃길을 밟고 산 자들의 땅으로 건너와 후손을 방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코코’에서 미구엘은 바로 이 시기에 오히려 자신이 망자들의 공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갖가지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처음 ‘코코’를 보던 날 첫 장면에서부터 울컥했어요.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메리골드 꽃길이 눈앞에 펼쳐지잖아요. 그 꽃은 멕시코 사람한테 일종의 국화(國花)거든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죠. 그런데 바로 이어 ‘빠뻴 삐까도(papel picado)’라고 하는 멕시코 전통 종이 장식이 또 화면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건 멕시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 만들어보는 ‘죽은 자들의 날’ 장식품이에요. 저도 종이를 겹겹이 접은 뒤 오려내 빠뻴 삐까도를 만들곤 했죠.”
아직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크리스티안을 순식간에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의 추억 속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깨달았고, 이내 코끝이 시큰해지며 목이 멨다고 한다.
알고 보니 크리스티안은 지난 3년여간 한 번도 고향에 간 적이 없다. 갓 스무 살 넘은 어린 아들이 불쑥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 걸 말리지 못한 채,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건네던 부모님 또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동안 크리스티안에겐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마련한 한국행 비행기표
‘코코’의 주인공 미구엘은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꿈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가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그토록 음악을 하려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구엘 또한 그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어쩌면 영화 속 미구엘은 크리스티안의 어린 시절 모습과 닮아 있다. 그가 왜 한국행을 열망했는지는 그조차 알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본 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낯선 외국어의 리듬과 성조가 음악처럼 귀에 들어와 박히더니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점점 궁금해졌다. TV 프로그램 속에서 한국인들이 걷고 놀고 이야기 나누는 모든 장소에 직접 가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크리스티안은 한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 고향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한국 관련 행사들을 찾아다녔다. 혼자 한식당에 찾아가 한국어로 음식을 주문해보기도 했다.
“그때 한국인 사장님이 저를 좀 좋게 보신 것 같아요. 멕시코 애가 더듬더듬 한국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셨는지 제게 당신 아들딸을 소개해주셨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한국인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졌어요.”
하지만 한국은 너무 멀었다. 그곳까지 날아가 TV에서 본 장소들을 돌아다니려면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 그때 구인광고 하나가 크리스티안의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 지방도시에 있는 한 광산에서 한국어-스페인어 통역사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 기업이 그 광산을 인수했고, 한국인 관리자와 멕시코인 노동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였다. 두 나라 말을 다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6개월간 수소문했으나 실패한 광산 채용담당자는 크리스티안이 연락을 하자마자 ‘당신을 채용하고 싶다’고 했다. 2013년 겨울의 일이다. 크리스티안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바로 부모님께 “광산에 가서 한국에 갈 돈을 벌겠다”고 ‘통보’하고 지방도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Seize Your Moment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때는 누군가 계속 제 귀에 대고 한국어로 ‘크리스티안, 어서 와’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웃음). 광산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한국에 가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버텨내려 노력했죠.”
이제 겨우 기초 한국어를 습득한 상태였던 당시의 크리스티안에게 광산에서 오가는 전문용어를 통역하는 건 적잖이 고역이었을 게다. 각종 안전사고로 동료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광산 생활 초기에 크리스티안을 힘들게 한 또 다른 문제는 두 나라 말을 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그가 감당해야 한 ‘중재자’ 구실이었다. 당시 한국인 관리자들은 멕시코 노동자들이 한국인처럼 열심히 일하기를 바랐다. 반면 멕시코인은 그것을 무리한 요구로 여겼다. 그 사이를 조율하면서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한국과 멕시코의 가교 구실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금씩 일에 익숙해지자 ‘두 나라를 다 사랑하는 내가 양국 사람에게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도 갖게 됐다. 그러자면 어서 한국에 가야 했다.
“광산에서 꼭 1년을 일한 뒤 부장님께 ‘저 한국에 가야 해서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동안 모은 돈이면 한국에서 6개월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회사에서는 ‘월급을 원하는 만큼 올려주겠다’며 붙잡으려 했지만 제 마음은 확고했죠.”
크리스티안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가 1주일을 머문 뒤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북관계에 대한 심상찮은 뉴스가 연일 외신을 장식하던 때라 부모님이 “꼭 지금 가야겠느냐”고 말렸지만 역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코코’의 미구엘도 그랬다. 이 영화에서 저승은 해골들의 공간이다. 오직 미구엘만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그 안에 머문다. 메리골드 꽃잎과 가족의 축복이 있으면 그도 안전하게 ‘산 자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저승의 가족들이 미구엘을 이승에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음악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미구엘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저승에 살고 있는 델라 크루즈를 만나면서 미구엘의 여정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세계 최고 멕시코 대사의 꿈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한국에 도착한 첫날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공항 밖을 나서는데 세상이 온통 하얗더라고요. 눈이 내리고 있었던 거죠. 진짜 눈을 본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어찌나 신이 나던지, 가방을 한쪽에 놓아둔 채 맨손으로 눈을 모아 뭉치며 한참을 뛰어놀았어요. 내가 한국에 왔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죠.”
멕시코의 가족들이 우려하던 ‘북한의 공격’ 같은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처음 계획한 6개월의 한국 체류 기간이 끝날 무렵 한 어학원에서 스페인어 강사로 일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크리스티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얼마 후 방송 출연 섭외가 왔다. 이번에도 크리스티안은 자신 앞에 온 기회를 꽉 붙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 ‘결정적 순간’들을 거치며 크리스티안은 한국에서 살려했던 자신의 꿈을 이뤘다. 이제는 더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언젠가 ‘주한 멕시코 대사’가 되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대사님이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여전히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목소리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크리스티안은 2월 말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멕시코를 방문한다. 4박 6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께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꿈을 이루려고 얼마나 노력했고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있는지 다 말씀드리고 오겠노라고 했다.
“‘죽은 자들의 땅’에서 돌아온 미구엘이 가족과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대목을 극장에서 볼 때처럼, 아마 또 눈물을 참느라 무척 고생하겠죠. 부모님 앞에서는 좀 울어도 괜찮을까요(웃음)? 지금까지는 괜찮았는데 출국일이 정해지니 점점 더 부모님이 그리워져요.”
그래도 그는 채 일주일도 되기 전 한국에 돌아올 것이다. 이곳에 그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미구엘이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을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멕시코 대사가 된 크리스티안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지금은 미지수다. 분명한 건 지금 크리스티안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시장 통을 질주하면서도 리듬에 맞춰 춤을 추던 미구엘처럼 활기차고 신나게 말이다.
브루노 피게로아 주한 멕시코 대사
“더 많은 한국인이 멕시코의 매력 알게 되길”
[홍중식 기자]
‘코코’ 영화를 어떻게 봤나.
“무엇 하나를 꼽기 어려울 만큼 전체적으로 좋았다. 제작진이 이 영화에 멕시코 문화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히 담아내고자 노력했다고 들었다. 수년간 멕시코 곳곳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스토리를 구성했다는 게 느껴졌다.”
특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
“멕시코 사람들이 ‘셈파수칠(Cempasuchil)’이라고 부르는 메리골드 꽃이 화면을 가득 수놓았던 부분이다. ‘셈파’는 죽음, ‘수칠’은 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죽음의 꽃’이라는 이름의 이 꽃을 멕시코 사람들은 매우 사랑한다. ‘죽은 자들의 날’이 되면 망자가 후손에게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묘지와 집 근처에 이 꽃을 뿌린다.”
멕시코에서는 실제로 ‘죽은 자들의 날’을 크게 기념하나.
“그날이 되면 멕시코 모든 가정에 크든 작든 조상들을 위한 제단을 만든다.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그들이 생전에 즐겨 먹던 음식을 올리고 ‘빠뻴 삐까도’라고 하는 종이로 주위를 장식한다. 나도 어린 시절 늘 식구들과 함께 ‘죽은 자들의 날’을 기념했다. 외교관이 돼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게 된 후에도 그날을 위한 상자를 늘 갖고 다닌다. 그 안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사진, 그들의 이름을 새긴 해골 모양 소품, 그리고 빠뻴 삐까도 등이 들어 있다. 지난해 한국에 부임한 뒤 추석이 우리들의 ‘죽은 자들의 날’ 풍습과 유사한 데 깜짝 놀랐다. 우리는 제단 위에 테킬라를 올려두는데 한국인은 한국 술을 올린다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실제 멕시코의 생활상과 비슷한가.
“영화에 보면 미구엘의 할머니가 집안의 큰 어른 구실을 한다. 멕시코에서는 실제 그런 경우가 많다. 어릴 때 우리 집에도 아버지의 누나가 같이 살았고, 그가 우리 가족 모두의 ‘할머니(큰 어른)’였다. 또한 우리 집의 중심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미구엘이 증조할머니를 ‘코코’라고 친근하게 부를 때마다 내가 ‘삐띠따’라고 부르던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미구엘의 할머니들이 화가 날 때면 신발을 벗어 들어 상대를 응징하는 것도 내가 기억하는 삐띠따의 모습과 꼭 닮았다. 멕시코에서는 슬리퍼를 ‘라 창클라(la chancla)’라고 하는데, 여성들이 자녀를 훈육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그거다. 멕시코 사람 가운데 라 창클라에 맞아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웃음).”
‘코코’에서 주인공 미구엘은 자신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가족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멕시코에서 음악 싫어하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멕시코 분위기는 어떤가.
“멕시코 사람들은 음악에 태어나고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다. 말로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태어날 때, 결혼할 때, 세상을 떠날 때 늘 음악과 함께한다. 1월 첫 주 멕시코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잠시 놀랐다. 한국에 몇 달 살았다고,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멕시코에 며칠만 있으면 누가 큰 소리로 노래해도 신경도 쓰지 않게 된다. 멕시코는 그런 곳이다(웃음).”
‘코코’를 보고 멕시코에 관심을 두게 된 한국인에게 추천할 여행지가 있나.
“‘코코’의 배경은 멕시코 내륙지방이다. 10~11월 건기에 가면 어디서나 웅장한 협곡과 맑은 하늘, 짙푸른 녹음을 즐길 수 있다. 그 무렵 곳곳에 피어나는 메리골드 꽃도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한국인의 시선을 빼앗을 것이다. ‘코코’에 감동을 받았다면 아예 ‘죽은 자들의 날’ 기간에 맞춰 멕시코를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멕시코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기 때문에 그 무렵이면 어디에서나 가정에서 만든 ‘뼈다귀 모양 빵(pan de muerto)’ 등 특별한 음식을 맛보고 전통문화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칸쿤 등 멕시코 해안지역을 여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륙에도 마초아칸(Michoaca′n), 와하카(Oaxaca), 푸에블라(Puebla), 할리스코(Jalisco) 등 멋진 여행지가 많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