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샐린저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베일 속에 숨긴 세계적인 소설가가 새롭게 등장했다. 성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 그의 소설 ‘나폴리 4부작’은 막장과 페미니즘을 한데 아우르며 전 세계적으로 ‘페란테 열병’을 일으키고 있다.
[한길사 제공]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제롬 샐린저(Jerome D. Salinger)는 신비주의 작가의 대표 격이다. 그는 미국 뉴햄프셔주 코니시에서 은수자(隱修者)처럼 평생을 보냈다. 그의 생전에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전기를 펴내자 소송을 걸었다. 책에 인용된 신상 정보, 사적 편지와 아울러 자신이 거론된 인터뷰 기록을 죄다 지워버렸다.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은둔 생활은 샐린저를 능가한다. 세상에 공개된 그의 사진은 단 두 장. 그마저 공개한 친구와는 절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격변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을 ‘사람아! 아, 사람아’ ‘시인의 죽음’ ‘하늘의 발자국 소리’ 등 3부작으로 펴낸 다이허우잉(戴厚英)의 별칭은 ‘안개속의 꽃’이다.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다.
맨부커상 놓고 ‘채식주의자’와 경합
1월 12일 한파가 몰아치던 날 저녁,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 공간 ‘순화동천’에서 한 이탈리아 작가를 위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그의 대표작 ‘나폴리 4부작’을 펴낸 한길사 김언호 대표, 마르코 델타 세타 주(駐)한국 이탈리아 대사, 작품을 옮긴 김지우 번역가,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가 자리했다. 130석 남짓한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네 권 합쳐 2436쪽, 벽돌만 한 소설책을 주제로 한 행사에 정작 주인공이라 할 저자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이국(異國)의 독자들이 주인공 없는 ‘비(非)정상 행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뭘까? 이탈리아와의 물리적 거리, 내한(來韓) 경비 문제…. 상식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어느 누구도 작가의 진짜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작품 외에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작가. 그는 2016년 ‘타임’ 주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도 높다. 나폴리 4부작은 2014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후보로 꼽혔다. 2015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 문학상 스트레가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같은 해 ‘타임’은 ‘올해 최고 소설 1위’, ‘가디언’은 ‘작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심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경합했다.
“제발 정체를 밝혀주세요”라는 세상에게 작가는 말한다.
“책이 출간되고 난 후부터는 저자가 필요 없다고 믿는다. 책에 대해 할 말이 남아 있다면 독자를 찾아 나서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작가가 나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엘레나 페란테는 데뷔 때부터 작가가 사용하는 필명. 엘레나는 제우스의 딸 헬레나를, 페란테는 ‘과감한 여정’을 뜻한다. 그는 모든 미디어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전속 출판사 대표하고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인터뷰도 서면으로만 한다.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1950년 전후 이탈리아 나폴리 출생, 대학에서 고전문학 전공, 문학과 외국어에 조예가 깊음, 외국 생활 경험이 길다는 정도다. 모두 확인된 사실이 아니고 추측이거나 정황 증거다. 성별조차 확실하지 않다. 여성이지 않겠느냐고 다수의 독자가 추측할 뿐이다. 반면 로마대학은 “텍스트 분석기법으로 작품을 분석한 결과 남성 작가”라고 주장한다.
언론이 추적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2016년 10월 이탈리아 경제지 ‘일 솔레 24오레’ 탐사보도 전문기자 클라우디 가티는 아니타 라자(Anita Raja)를 엘레나 페란테로 지목했다. 라자의 부동산 기록과 그의 전속 출판사 ‘에디지오니 e/o’의 수입·지출 기록을 증거로 제시했다. 출판사 송금 자료 분석 결과 2014년부터 라자에 대한 인세 지급액이 크게 늘었고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지급할 만한 금액이었다는 것이다.
가티가 지목한 라자는 로마에 거주하는 번역가로, 나폴리 출신 저명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Domenico Starnone)의 아내다. 출판사는 기사의 사실관계 확인을 거부했다. 라자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문학계도 ‘불필요한 작가 신상 털기’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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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해리 포터’
[한길사 제공]
“나폴리 4부작을 쓰는 동안 나는 사건, 캐릭터, 감정, 터닝 포인트를 다시 다듬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계획적인 일도 하지 않았다”는 엘레나 페란테의 말에서 짐작하듯 이 연작 소설은 지극히 사적(私的)인 소설이다. 동시에 시대소설이다. 책을 읽다 보면 격동의 이탈리아 현대사 한복판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 든다.
한편 나폴리 4부작은 페미니즘 문학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엘레나 페란테는 말한다. “우리는 남성의 상징 시스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남성은 여성의 상징 시스템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세상이 여성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나아가 남성들은 의심 없이 그들의 시스템 안에 있는 현재의 우리를 인정해야 한다.” 작품은 여성의 시선과 입을 빌려 남성 중심의 세상을 묘사한다. 여성 독자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당연하다. 사라 넬슨 아마존 편집장은 “미국 여성에게 페란테의 존재는 어린이들에게 해리 포터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번역 작품에 대해 평이 인색한 영미권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돼 런던 사우스웨스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로즈극장 무대에서 상연됐다. 미국 HBO와 이탈리아방송협회(RAI)는 드라마로 제작하는 중이다. 출간됐거나 출간 예정인 국가가 47개국에 달한다.
나폴리 4부작은 강렬하고 독하다. 전염성도 높다. ‘페란테 열병(Ferrante Fever)’은 전 세계에 유행 중이다. 사랑, 우정, 불륜, 강간, 이혼, 미성년자 성교, 폭력, 범죄 조직 등 이른바 ‘막장 드라마’ 요소를 고루 갖추고 독자를 빨아들인다. 읽기 시작하면 다음 권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힐러리 클린턴도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 나폴리 4부작의 1권을 펼쳤을 때 책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작가가 묘사한 모든 장면에서 감정의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다. 프랑스 ‘르몽드’는 “페란테는 마약 같다. 단어, 메타포 그리고 외설적 표현까지”라고 썼다.
한국 독자의 ‘페란테 앓이’도 이어지고 있다. 2016년 7월 1권 출간 후 2017년 12월 4권 완간까지 한국 내 번역·출판을 맡은 한길사에는 “다음 권을 빨리 출간해달라”는 격려성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팔렸고, 국내에서는 2월 중순 현재 4권 합쳐 18쇄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