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난임부부가 시험관아기 시술 후 이식하고 남은 난자나 배아를 의학연구용 기증은 물론, 다른 난임부부에게 공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기증은커녕 당사자의 배아조차 5년 이상 냉동보관할 수 없다. 불행한 일로 자식을 잃는다 해도 동결보존한 배아가 없어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말 나온 김에 쓴소리 좀 하자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공공 정자은행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남성 불임이 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공공 정자은행 설립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정자 기증자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만혼으로 인해 고령의 난임 여성들이 자신의 부족한 난자로 더 이상 임신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미국 난임병원에서는 출산을 마친 젊은 난임여성의 잉여 난자에 한해 자발적인 난자 기증 분위기가 활발하지만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일이다. 어떤 이유든 간에 한국의 난임부부들은 자신들만의 정자와 난자를 이용해 시험관시술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생명윤리법은 정자와 난자의 매매를 금지하고 있으며 선의의 기증까지도 까다롭게 제한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난자의 문제로 인한 난임일 경우 세 부모(세포질 공여) 아기까지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비단 유전 질환이 아니더라도 고령 여성의 경우 부실 난자로 인해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더라도 임신이 여간 힘들지 않다. 정자와 난자가 합체된 수정란은 에너지발전소 격인 미토콘드리아의 도움을 받아 세포분열이 되어야 하는데, 고령 여성의 난자 80~90%는 미토콘드리아에 문제가 많다. 영국의 세 부모 아기가 바로 미토콘드리아에 문제가 있는 여성이 자신의 핵(DNA)은 그대로 두고 다른 여성의 난자에서 건강한 미토콘드리아를 이식받아서 시험관아기 시술을 통해 출산에 성공한 사례다. 이 기술은 극심한 난소기능 저하 여성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화두다. 인구 감소는 국가의 존폐에 관한 문제라서 더 그렇다. 국가적으로 출산을 장려하고 난임 시술비와 육아비 등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줘도 출산율이 요지부동인 나라도 많지만 출산율이 서서히 증가세로 돌아선 나라도 적지 않다. 반전의 키워드는 자식을 얻는 방식에 대해 제도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혁신을 추진했다는 데 있다.
상상해보자. 만약 우리 정부가 첫째아이에 한해 난임 시술비 의료보험 혜택을 나이 제한 횟수 제한 없이 제공한다면, 난임병원에서 잉여난자를 기증할 길이 열린다면, 정자은행에 기증자가 늘어난다면,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건강한 독신녀에게 정자은행 정자를 이용한 임신이 가능해진다면, 우리 사회에 아이 울음소리가 지금보다는 좀 더 울려 퍼질지 모른다.
한국인은 혈통에 관한 한 보수, 그 자체다. 반드시 나의 DNA를 가지고 있어야 자식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이다. 수십 년 키워온 자식도 내 유전자가 아닌 게 밝혀지면 외면해버리는 내용이 드라마에서 예사롭게 나온다. 사회가 급변하고 다양화하고 있는데 의식은 외딴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식이란 무엇인가? 부부의 유전자(DNA)를 담아서 태어난 핏줄이다. 유전자는 세포를 어떻게 만들라는 명령을 담은 설계도라고 해두자. 정자와 난자는 각각 설계도(DNA)의 50%를 갖고 만난다. 난자는 정자로부터 받은 50% 설계도로 100% 설계도를 완성해 핵 속에 간직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난자의 세포질을 이용해서 설계도대로 온몸의 살과 피를 만들어낸다. 즉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몸 세포 출처는 난자란 얘기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60조 개 세포가 핵을 제외하고 오로지 난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이해하면 정자은행을 이용한 출산을 도저히 못 받아들일 것도 아니다.
정복을 통한 민족이동의 역사를 살아온 서양에서는 인종우월주의는 있을지언정 혈통에 대해서는 유연하다. 냉동정자의 병원 간 이동을 위해 특별 제작된 자전거가 유럽의 각 도시를 누빌 정도라면 짐작이 될 것이다. 영국 부부가 독일 정자은행을, 프랑스 싱글여성이 영국 정자은행을, 독일 부부가 미국 배아은행을 이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오로지 친자(親子)에 목을 매는 한국인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33억 개의 염기서열 중 단 0.01%의 차이로 서로 간의 모습이 달라진다. 다른 말로 감수분열이 된 생식세포에 담긴 유전자에게서 2의 23제곱(838만 8608) 가지 경우의 수가 같아야 나와 똑같은 개체가 생겨날 수 있다. 지구상에 인종과 외모, 질병 등의 차이는 0.05% 정도의 DNA 염기서열 차이에 불과하다. 심지어 침팬지와 인간의 DNA염기서열이 2~3%밖에 다르지 않다니 놀라울 따름 아닌가.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어디에도 단일민족 국가는 거의 없다. 외부의 침략이 거의 없었던 섬나라 일본조차 순수 본토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8%에 불과하단다. 단일민족 국가의 경우 자연발생적 근친혼을 통해 여러 가지 열성 유전자가 발현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된다. 러시아 왕가의 혈우병,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걱턱, 일본 본토인의 삐뚤삐뚤한 치열 등이 모두 특정 가계에 열성 유전병 인자가 근친혼을 통해 나타난 실례다. 서로 다른 DNA가 만나야 열성인자가 사라지고 유전병에서도 해방이 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다.
바야흐로 유전자 편집 시대다. 머지않아 염색체 구조나 유전체 작동 방식 등이 완전히 해부되어 부모 없이 자식이 태어날지 모른다. 부부만의 자식을 낳기 위해 최신의 의술로 노력해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부부만의 힘으로 안 될 때에는 선진국에서처럼 여러 기회가 허락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출산 장려를 위한 정책들이 과학의 발전만 참고하지 말고 시대의 다양성 코드를 읽고 반영했으면 좋겠다.
이성구
● 1961년 대구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 대구마리아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