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호

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판사에게 형량이란

검사·변호인 사이 중심 잡기

  •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입력2018-03-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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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사재판에서 최후변론은 검사와 변호인의 한판 줄다리기와 같다. 

    • ‘공동체의 질서’를 중시하는 검사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변호인이 열과 성을 다해 변론을 펼칠 때 판사는

    • ‘중립적 심판자’로서 합리적 형량을 정하고자 고심한다.

    2014년 방영된 MBC 법률드라마 
‘개과천선’의 한 장면. [동아DB]

    2014년 방영된 MBC 법률드라마 ‘개과천선’의 한 장면. [동아DB]

    형사재판에서 증거조사 절차가 끝나면 검사와 변호인이 차례로 마지막 변론을 하는데 이를 ‘최후변론’이라 한다. 검사가 먼저 한다. 검사는 다른 때에는 변론을 앉아서 하더라도 최후변론만큼은 서서 한다. 보통은 짧게 구형만 한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 앞에 중요한 사정을 덧붙이기도 한다.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해서 징역 2년을 구형합니다”라는 식이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다투는 사건이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는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검사처럼 유죄 이유를 길게 설명하기도 한다. 

    검사의 구형에 판사가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구형보다 낮은 형을 선고할 수도 있고 더 높은 형을 선고할 수도 있다. 나는 검사가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 군납비리 사건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해서 그 판결이 언론에 제법 크게 보도된 적도 있다. 장병들이 먹는 먹을거리에 대한 입찰에서, 관련 중소기업조합 이사장이던 피고인이 조합의 회원사들을 들러리 세우고 자기 처 명의의 회사가 손쉽게 낙찰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심심찮게 벌어져왔기 때문에 장병들이 먹는 음식, 입는 옷의 품질이 민간의 것보다 조잡한 경우가 생긴다고 보았다.

    전관예우는 있는가

    우리 사회에는 윤리 기준에 대한 이중 잣대가 곳곳에 존재한다. 사회적으로는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하는 엄정한 판·검사를 원하지만, 자기와 친분이 있는 판·검사에게는 적극적으로 청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 판·검사가 막상 자기 사건을 냉정하게 처리하면 피도 눈물도 없다거나, 인간미가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면서 비난한다. 내가 초임 판사일 때 법원장님은 반듯하고 공정하고 인품도 높은 분이라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판사가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어느 사석에서 들으니 그 원장님이 집안 친척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집안 사건 청탁을 모두 거절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다 보니 가령 변호사가 판사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로 지속적으로 동창 모임에 참석하는 사이라는 등의 친밀한 사적 인연이 있는 경우에는 판사도 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든, 냉정하게 판단하든 간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나도 10여 년 판사 생활 동안 개인적 인연이 있는 변호사들 사건을 적지 않게 처리했다. 앞서 말한 검사 구형보다 두 배 높은 실형을 선고한 사건도 나와 인연이 깊은, 내가 존경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 선배가 변호를 맡은 사건이었다. 존경하는 분이기에 이해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의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이던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도 기억이 오래간다. 전과 많은 필로폰 사범이라 통상 1년 6월 안팎의 징역형에 처했을 사안이었다. 그런데 피고인이 간암 말기였다. 살날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변호인은 여생을 가족과 보낼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인이 나와 개인적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형을 선고했을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한 가정적 상상이 불가능했다. 유사한 마약 사범 중에서 말기암 피고인인 선례도 찾기 어려웠다. 판결 선고하는 아침까지 형량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징역 10월을 선고했는데 피고인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법정에서 돌아오면서 그 변호인이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 철없이 좌충우돌하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10여 년 판사 생활 동안 내 판단력이 모자라서 오판이나 아쉬운 판단을 한 것은 부지기수이겠지만 적어도 뇌물이나 부정한 청탁을 받고 해서는 안 되는 판결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한 사건만은 아직까지도 과연 내가 그때 좋은 결정을 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잊을 수 없는 판결

    그것은 도박이 가능한 성인오락실을 운영한 범인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건이었다. 기존에도 이런 사건이 두 차례 있었는데 두 차례 모두 영장을 발부했다. 도망 우려나 증거인멸 우려와 같은 구속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동료이자 선배인 판사가 그와 같은 종류의 사건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지속적으로 발부해오고 있었고, 나는 당시 형사단독을 처음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내 판단에 자신이 없어서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1년쯤 뒤에 그동안 같은 법원에서 일하던 선배 판사가 변호사 개업을 하자마자 어느 성인오락실 관련 사건을 수임한 후 법정에 나와서 구속영장이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도 이미 증거가 다 확보돼 있고 피의자가 자백하고 있어서 증거인멸 우려나 도주 우려 등 구속사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제는 좀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기존에는 내가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것이었다. 발부하자니 소신에 반하고, 기각하자니 전관예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그 두 차례 구속영장을 기각했었어야 했다. 결국 나는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때의 내 판단이 옳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판단이 있은 뒤로는 훨씬 더 신중하게, 그리고 남이 아닌 내 판단을 내리고자 애쓰게 되었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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