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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그리스인 호마타스 교수와의 50년 우정

아테네여, 델포이여, 친구여~ 영원하라!

  • | 이종수 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그리스인 호마타스 교수와의 50년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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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뉴시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뉴시스]

2017년 성탄절 밤 12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가족으로부터 온 성탄절 축하전화겠지 하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전화번호 앞자리에 0030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다. 국제전화였다. 

“여보세요 여기 존이야. 크리스마스 축하해. 하느님의 축복 많이 받아.” 

그리스 아테네대학에서 정년퇴직한 호마타스 교수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나도 말이 많아졌다. “가족 모두 잘 있지? 애들 가족은? 그리스는 파산 상태는 면했나?” 

그가 말했다. “나는 잘 있어. 우리가 언제 만났지? 며칠 전 연구소로 전화 걸었는데, 비서로부터 대학 연구소를 그만두신다고 들었어. 건강에 문제가 있나?” 

나는 6·25전쟁을 겪다 보니 늦은 나이인 30세에 독일 유학을 떠났다. 일반적인 학생보다 10년 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10년 더 길게 의학을 위해 활동해야겠다고 다짐했고, 80대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 나이로 90세 문턱을 넘게 됐다. 늙으면 몸을 중고차처럼 수리해가며 활동해야 한다. 한 달 전 아주 건강하게 살아오던 15년 손아래 매제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무리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일 욕심이 많아. 파란만장한 내 인생에서 정력을 쏟아온 간 연구도 계속하고 내가 체험한 인생 이야기도 책으로 쓰고 싶고, 어려운 나라의 의학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20여 년 도와온 일도 속도를 내고 싶고…. 그러나 늙은 몸에 무리가 되지 않게 짐을 덜었어. 잊지 않고 크리스마스에 기억해줘 고마워.” 

살다보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는 비극도 겪지만, 호마타스 교수와의 관계처럼 수십 년 지기들과 교유하며 사는 생의 기쁨도 누리게 된다. ‘친구가 스스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 구절을 잔인한 반세기의 외국 생활을 뒤로한 오늘 더욱 절감한다.

호마타스 교수와 첫 만남

1968년 9월 초 나는 오후 늦게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공항에 내렸다. 독일 본대학병원 외과과장이 내게 LA의 주립 캘리포니아대학병원과 덴버의 주립 콜로라도대학병원, 그리고 뉴욕의 컬럼비아대학병원을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당시 본대학병원은 장기이식과 관련한 새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중요한 연구·조사 역할을 맡긴 것이다. 

덴버에 도착한 3일 후 오전에 병동 회진을 따라다니고 있는데 180cm가 넘는 키에 아주 날씬한 외국인 의사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난 그리스 아테네대학에서 왔어요. 오늘 내 숙소에서 점심 같이할까요?” 

호마타스 교수는 덴버에 온 지 6개월이 됐다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점심시간에 나는 그의 숙소로 갔다. 그는 동양 사람은 쌀밥을 먹어야 한다며 쌀로 밥을 지어 오징어젓갈과 같이 차려내 나를 대접했다. 그리고 작은 잔에 까맣게 끓인 터키식 커피에 그리스에서 가져왔다는 단맛이 강한 젤리를 내놓았다. 쓴 커피에 그리스 과자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그러잖아도 며칠 동안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속이 불편했는데 쌀밥에 젓갈을 곁들여 먹고 나니 소화불량 증세가 없어졌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그리스인 특유의 명랑하고 태평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박사, 여기 병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시찰 나온 사람이 많아 외국서 온 펠로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요.” 

호마타스 교수는 이 병원의 제니라는 아일랜드계 간호사와 친한 사이였다. 어느 일요일 그는 아침부터 그 여자의 차에 나를 태워 덴버 부근의 로키산맥 쪽까지 드라이브도 해주었다. 또 내가 어느 곳을 좀 가봤으면 하고 원하면 그 차로 데려다주곤 했다. 

나는 그리스인이라면 그때까지 4명밖에 알지 못했다. 첫째는 중학교에서 기하를 배울 때 알게 되는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모르고 기하학을 알 수 없고 기하학을 모르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없다. 더욱이 독일 유학 전 젊은 나이에 고등학교 수학교사 생활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해결한 나에게 피타고라스는 개인적 인연은 없지만 특별한 그리스인인 것은 분명하다.

비운의 그리스 역사

내가 두 번째로 만난 그리스인은 히포크라테스다.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 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 그리스의 의성 히포크라테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즉 그 사람 자체보다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 때문에 더 널리 알려졌다. 유럽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그 선서문의 10개 조항 중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는 문구를 항시 마음속에서 외쳤다.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의학 지식을 ‘히포크라테스의 인체’라는 저서에 종합한 그는 간염 분야에서도 황달이 담즙의 흐름에 이상이 있어 발생한다는 사실을 당시에 이미 발견했다. 내 전공인 간 질환의 어느 분야를 더듬어봐도 히포크라테스가 나타난다. 이것이 그와 내가 아주 가까운 이유다. 

그다음이 1959년 독일 유학 1년째에 학생기숙사에서 만난 아타나스포로스 부부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유학 왔는데, 항시 명랑하고 부드러워 피타고라스의 의식구조를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이 아타나스포로스의 부인으로부터 그때까지 전연 알지 못했던 그리스의 역사적 비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지만 기원전 146년 고린도 전쟁 때 로마에 패망해 외국의 지배를 받는 운명 속에 들어갔다. 1829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오스만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까지 2000년 가까이 타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20세기 초반에도 이탈리아의 통치 아래 고통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1952년 비로소 국가헌법을 제정하고 독립국가로서 평화를 찾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그리스인은 기원전 9세기에 제정한 그리스문자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그리스어를 지켰고, 민속 문화를 지켜온 장한 민족이다.

호마타스 교수의 발레리나 애인

호마타스 교수까지 합하면 5명의 그리스인이 은연중에 이 나라에 대한 나의 친밀감을 이어주었다. 약 8주 후에 나는 덴버를 떠나고 호마타스 교수는 다음 해 봄에 그리스로 돌아가면서 나의 집에도 잠시 들렀다. 

1972년 6월, 나는 국제간이식학회를 독일 본에서 개최했다. 미국 덴버에서 받은 호마타스 교수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학회에 그를 초대하고 그의 연구 분야인 ‘장기 보존’ 세션의 좌장으로 위촉했다. 그는 세계 각국 대학에서 온 학자들 앞에서 좌장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어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그가 덴버에서 제니의 차로 로키산맥을 관광시켜준 일을 잊지 않고 학회가 끝난 뒤 그를 태우고 라인강 서안 지역을 안내했다. 6월 라인 강변이 너무 아름다워 그에게 특히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고 한다. 

그해 7월 초 그는 나에게 아테네대학에서 강연을 해달라며 초청장을 보냈는데 항공권이 첨부돼 있었다. 세계의학회에서는 이와 같이 서로 상대방의 학문을 존경하며 초청 강연을 부탁하는 아름다운 관습이 있다. 나는 5명의 그리스인과는 2000년 이상 시차를 두고 사귀어왔지만-내 식으로 표현하면 그렇다- 그리스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공항에 호마타스 교수가 애인과 같이 마중 나왔다. 30대 중반의 날씬한 발레리나였다. 

“이종수 박사, 지난번에 독일에 초대해주어 감사했어요. 그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은 제 애인 샤샤입니다. 아테네국립극장의 프리마발레리나입니다.” 

공항을 나온 우리는 호마타스 교수 집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아테네대학병원으로 갔다. 오후 7시반경 콘퍼런스를 마치고 병원을 나와 도중에 샤샤를 데리고 다 같이 필로파포스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리고 석양의 아테네시를 바라볼 수 있는 한 식당의 옥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크로폴리스와 우소 술

“저기 보세요. 저것이 그 유명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예요. 해가 저물어갈 때의 경치가 아름답죠.” 

샤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크로폴리스는 언덕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광선 속에 번쩍이고 있었고, 파르테논 신전이 지중해 해안의 맑고 푸른 저녁하늘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녀는 “닥터 리, 아테네에서 이 야경을 볼 때는 반드시 ‘우소’를 마셔야 해요. 우소 석 잔!” 하며 그리스 액센트가 섞인 영어로 나에게 설명했다. 

“우소는 그리스에서만 양조할 수 있어요. 이것은 포도주를 양조하기 위해 포도를 으깨서 짜고 난 찌꺼기를 발효시켜 증류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소 술을 모르면 그리스를 모른다고 해야죠.” 

우소를 마신 뒤 오후 9시반경 우리는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식당가 프라카로 갔다. 이 시간이면 독일에서는 저녁식사가 끝나는데 그리스에서는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프라카는 수백 개의 식당이 밀집해 있음에도 관광객으로 초만원이었다. 샤샤는 나에게 스브라키를 들라고 권했다. 이것은 돼지고기살 숯불구이다.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가 식당 내에 넘쳐흘러 나는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양의 치즈가 우리나라 김치와 마찬가지다. 서민들에게는 양의 치즈와 빵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온 음식은 모두 올리브유로 조리됐고 식탁 위에는 여러 종류의 올리브가 놓여 있었다. 호마타스 박사는 올리브는 특히 심장혈관 질환 예방에 좋은 식품이라며 권했다. 

다음 날 나의 강의는 오전 10시 반부터 90분 동안 예정돼 있었다. 나는 인체 간이식에 대해, 특히 이식에서 혈액형과 장기 보존의 문제 등에 대해 강연했다. 그때만 해도 새로운 분야의 학문이기에 질문도 많았고 박수도 많이 받았다. 

이어서 나는 외과교수들과 같이 점심을 들기 위해 피레우스항으로 갔다. 아테네의 남쪽 사로니코스만 연안에 있는 피레우스항은 아테네의 관문이며 그리스 최대 항구다. 지난날 강대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인이 이 항구에서 해외로 도피했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포세이돈 신전

약 30분 자동차로 달리니 미크로리마노에 닿았다. 아테네의 혼잡도 소음도 아랑곳없고 바닷바람이 여름의 태양열을 받아 뜨거운 내 이마를 식혀줌과 동시에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바다냄새를 실어왔다. 해변에는 식당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밀집해 있었다. 우리는 바닷가에 놓인 한 식당의 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지중해에서 잡힌 생선을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집이었다. 

“닥터 리, 이리 와요. 먹고 싶은 생선 하나 골라요.” 

나는 서울이나 인천의 활어 가게처럼 물속에서 요동치는 생선을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식당 주인은 나를 식당 안으로 끌고 가더니 수십 칸의 서랍을 하나씩 열어서 내게 얼음 속에 보관돼 있는 생선을 보여주며 무엇을 들겠느냐고 했다. 서랍마다 종류가 다른 생선이 들어 있었다. 호마타스 박사의 권유에 따라 한 놈을 골랐다. 다른 교수들도 고르고 있었다. 약 30분 후에 숯불에 구운 생선이 나왔는데,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은 생선 숯불구이였다. 거기에 올리브유와 레몬을 뿌려서 와인과 같이 먹는다고 했다. 

“우리 그리스인은 수천 년 전부터 신선한 생선을 섭취해왔고, 생선에 다른 조미료는 사용하지 않아요.” 

이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그들의 식생활이다. 올리브나무와 레몬나무는 그리스와 같이 돌산이 많은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거기에 바다가 있고 돌산에는 염소가 잘 살 수 있으니 여기에서 이 민족의 이와 같은 건강한 자연식 식생활이 발달했다. 

이날 오후 나는 호마타스 교수와 같이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지점에 있는 발칸반도의 최남단, 즉 아티카반도의 끝에 있는 스니온곶의 포세이돈 신전 유적을 방문했다. 그리스 어디를 가나 유적 대부분이 파괴되고 돌기둥만 몇 개 남아 있었는데, 스니온곶의 포세이돈 신전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신전은 34개의 기둥으로 이뤄졌는데 수천 년간 격렬한 전쟁의 포화에서 파괴되고 남아 있는 몇 개의 기둥만이 석양에 반사돼 그 긴 세월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게해역에서 적이 그리스를 공격해올 때 이곳은 최전방 방어진지였다고 호마타스 박사는 말했다.

고대 세상의 중심 델포이

나는 그 후 약 4일간 호마타스 교수와 아테네대학병원을 오가며 그리스식 일상을 관찰했다. 오전 6시 반 또는 7시에 시작한 병원 일은 오후 1시에 끝난다. 한낮의 기온이 높은 관계로 다른 지중해 연안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휴식을 취했다. 대부분이 점심 식사 뒤에 낮잠을 잔다. 그리고 오후 5시부터 오후 업무가 시작된다. 저녁 식사는 오후 9시 또는 10시에 시작되니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후 1시가 되면 나와 호마타스 교수는 아테네대학병원에서 출발해 샤샤를 픽업하고 해변에서 수영을 했다. 당시 아테네의 부유층은 대부분 해변가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아테네 국립극장의 프리마발레리나인 샤샤도 해안선에서 1km도 안 되는 위치에 곱게 단장한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수영하러 가기 전 근처 식당에 들러 생선을 골랐고, 해수욕한 뒤 식당으로 가면 숯불구이 생선이 요리돼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점심을 먹고 별장으로 가면 샤샤는 나를 방 한 칸에 몰아넣으면서 낮잠을 자라고 강요했다. 

아테네 명소 아크로폴리스는 샤샤의 안내를 받아 돌아봤다. 기원전 6세기경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이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군의 침공을 받아 파괴되고 그 후에 로마제국, 오스만 터키, 그리고 베네치아군 등에 의해 파괴됐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란 원래 고대 그리스 각 도시의 요새를 뜻하는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웅대하고 유명하기에 오늘날 아크로폴리스 하면 아테네를 떠올리게 됐다고 샤샤는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즉 기원전 467년에서 406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은 높이 156m의 평평한 암반 위에 니케 신전, 에레크티온 신전, 파르테논 신전 등을 세웠다. 아크로폴리스는 최초에 왕궁이 있던 곳이다. 왕이 그 높은 곳에서 시민들을 위압통치했다. 그러나 고대 민주주의의 아테네에서는 그곳이 신들을 모신 곳으로 변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네 여신상을 이곳에서 가장 웅장한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7시에 호마타스 교수와 나는 또다른 유적지 델포이로 떠났다. 호마타스 교수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길에서 차를 모느라 애를 썼다. 우리는 4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델포이에 도착했다. 델포이는 고린피스만 북쪽 파르나스산 중턱 약 700m 높이에 있는데, 그 아래 폴레이스토스 강이 흘러서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델포이가 가까워질수록 산자락이 우리가 가는 길을 높이 에워쌌다. 델포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어 ‘자궁’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에 델포이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부터는 아폴로 신을 숭배하게 됐다.

자기 자신을 알라

이윽고 우리는 아주 작은 마을 아리아르토스를 지나면서 길가 상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커피가루를 태워놓은 것처럼 쓴맛이 강한 터키식 커피였다. 내가 마시기를 주저했더니 호마타스 교수는 “이것이 커피의 원조입니다. 이 맛을 알아야 발칸반도에서 살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커피 양은 아주 적어 몇 모금 마시자 금세 잔이 비었다. 

“여기서 몇 분 달리면 레바티아가 나오는데 그다음이 델포이의 성지입니다. 기차를 타면 레바티아까지 옵니다.” 

이 델포이의 성지 유적은 중세에 지진 등으로 매몰되었고 그 성지 유적 위에 카스트리란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이 1500년 이상 델포이를 망각하고 있었는데 1892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우리가 오늘 보게 된 고대 델포이의 유적을 발굴했다고 한다. 

우리는 드디어 2475m 높이의 파르나소스산 중턱에 위치한 델포이 성지에 도착했다. 나는 호마타스 박사의 뒤를 따라 아폴론 성역으로 들어가서 아폴론 신전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보물전이 즐비했다. 

이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373년에 건축한 건물인데 현재는 6개의 도리아식 둥근기둥과 그 신전의 기초석만 남아 있다. 원래는 38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은 유독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아폴론 신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이 봉헌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폴론의 신탁은 아주 중요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져 좋은 수입원 구실을 했다. 많은 희사금과 신탁료 덕분에 이 신전이 지진에 의해 여러 번 파괴됐어도 재건될 수 있었다. 신탁은 서기 394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금했는데 그때까지는 유럽 및 중동지역 왕들이 여기에서 신탁 받기를 원했다. 고대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가 지은 비극 ‘오이디푸스 왕’도 신탁을 받으러 보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폴론 신전의 입구 벽에는 그 유명한 격언이 새겨져 있었다. 그 진리는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호마타스 교수는 자랑했다. ‘1. 자기 자신을 알라. 2. 대부분의 사람은 좋지 않다. 3. 연습이 모든 일에 중요하다. 4. 시간을 아껴 써라. 5. 과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 6. 바쁘면 돌아가라. 7. 아무도 자기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다.’

생활의 목표는 돈과 사랑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 [동아DB]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 [동아DB]

아폴론 신전 유적을 한참 쳐다보다 우리는 약 5000명이 들어갔다는 야외극장으로 갔다. 극장은 언덕 위에 위치했으며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다. 호마타스 교수는 극장 바닥의 중심에 서서 소리를 지르며 날더러 극장의 여러 좌석에 가서 들어보라고 했다. 중심에서 하는 말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들렸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 확인해봐요. 어디서 들어도 음향이 다 같게 들리도록 설계됐어요.” 

그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극장에서 한참 걸어서 아래로 내려와 우리는 아테네 여신의 성역에 이르렀다. 여기도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돌들만 남아있었다. 아테네 여신의 신전은 원래 원형이지만 20개의 도리스형 기둥 중 현재 3개만 서 있는데 이 기둥이 델포이 그림엽서의 대표 그림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델포이나 보이는 것은 전부가 부서진 돌덩어리들이었다. 

오후 늦게 점심 식사를 하고 우리는 아테네로 출발했다. 호마타스 교수는 내게 그리스 시골을 보여주기 위해 풀레이토스강 골짜기로 내려가 해변 길을 따라 안티키라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나갔다. 호마타스 교수는 가는 도중 들른 식당에서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만 보면 그 자리에서 진찰을 하고 자기 명함을 주었다. 그리고 “아테네의 ○○의사가 그 병에 관해서 잘 보는 분이니 그리로 가보세요” 하며 주선을 했다. 나로선 대학교수가 지나치게 직업 선전을 한다는 감이 있었다. 

“닥터 리,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생활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뿐이에요.” 

자신이 이렇게 내과 환자들을 친구인 내과교수에게 보내면, 그 친구는 수술해야 할 환자가 있을 경우 자신에게 보내온다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인의 의식구조는 2000년 이상 지속된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가혹한 오스만터키의 지배하에서도 그리스인은 비록 고급 관직에 임용은 안 됐어도 상업만은 탁월하게 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식당을 발견하지 못하자 호마타스 교수는 시골마을의 한 집을 무조건 찾아갔다. 그가 이 근처에 식사할 곳이 있느냐고 묻자 그 집주인은 근처에는 식당이 없으니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초대했다. 주인은 우리나라 시골에서처럼 뜰 앞에 모닥불을 피워서 모기떼를 쫓아내고 그 불에 긴 쇠꼬챙이에 끼운 양고기 기름덩어리를 굽고 있었다. 빵 한쪽에 기름진 양고기와 올리브 몇 개를 먹었고, 포도주 몇 잔을 들었다.

농가의 따뜻한 인심

“참 간단한 식사죠. 그리스의 시골 사람은 이렇게 빈한하게 살아요. 그러나 인심은 좋아요. 양고기 기름덩어리지만 이것이 모두 그리스의 진미예요.” 

양을 잡아 좋은 고기는 모두 팔고 주인은 남은 찌꺼기인 기름덩이만 먹는다. 포도주는 흙냄새가 나고 모닥불에 구운 기름덩어리에서는 양 냄새가 심했으나 그리스의 친절한 시골 인심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며칠 후 나는 그리스를 떠났다. 호마타스 교수 그리고 샤샤의 정성이 참으로 고마웠고, 나는 흐뭇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로부터 6년간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다.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고 매일 싸우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 성공하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늘 빌었다. 

1978년 나는 다시 국제학회의 회장으로서 독일 본(Bonn)에서 학회를 개최했다. 

“존(호마타스의 이름), 그간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서로 병원 일로 바쁘게 뛰다보니 소식 전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시간만 지나갔군요. 제가 이번 9월에 본에서 국제학회 회장으로서 다시 학회를 열게 됐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1972년 때처럼 좌장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우정이 다시 꽃피고 재회하기를 빕니다.” 

이 편지에 대한 회답이 왔다. 

“이 교수, 제가 오래 소식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간 제게도 변화가 많았어요. 제가 치과를 전공하는 여의사와 결혼해서 벌써 딸애를 하나 두었어요. 저를 또 학회에 좌장으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가족이 전부 같이 독일로 가서 뵙겠습니다.” 

호마타스 교수는 가족과 같이 독일에 왔고, 성장한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부인은 역시 생활력이 강한 치과의사였다. 1972년 때처럼 그는 학회가 끝나자 그리스에 와서 강연을 한 번 해달라고 초청했다. 그때는 내가 병원 일이 너무 밀려서 그리스에 갔다가 2박만 하고 돌아왔지만 아테네에 도착하던 날 당시 그리스의 교육부 장관이 저녁 만찬을 주최해주었다. 그런데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급히 갈 일이 생겼다며 농림부 장관이 대신 호스트로 나왔다.

보물단지에 실크로 싸두고 싶은 우정

이 만찬은 호마타스 교수의 옛 여자친구인 샤샤가 주선한 것이었다. 샤샤는 호마타스 교수와 헤어진 뒤 부호의 부인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친구로서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호마타스 부인과도 서로 이해하며 친구로 지낸다고 했다. 내가 초대되어 방문한다고 하니 샤샤가 그리스 정부에 이야기해 정부 차원에서 영접했다고 한다. 이날 저녁 만찬은 아테네에서 약간 떨어진 교외의 숲 속에서 있었다. 샤샤는 남편과 같이 왔다. 

“존으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참 진정한 국제적 우정을 가지고 계신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번 영접은 저희 남편이 주선했습니다. 아주 훌륭하신 분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옛날과 비교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샤샤의 얼굴에는 늘 아름다운 웃음이 배어 있었다. 오후 10시가 다 돼가는데 장관은 여전히 참석하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과 달리 그리스는 만찬이 9시나 10시에 시작돼요. 배가 고프시지요?” 샤샤가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마침내 키가 작은 농림부 장관이 도착했다. 

“훌륭하신 교수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래 한국에서 오셨다는데 독일에서 많은 활약을 하시고, 우리 그리스학회와도 끊임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여러 사람과 헤어져 호텔로 왔다. 다음 날 아테네대학병원에서 강연하고, 다시 대학에서 하루를 보낸 뒤 독일로 돌아왔다. 아테네 공항에서 샤샤에게 전화로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샤샤, 훌륭하세요. 결혼하시고도 호마타스 교수와 좋은 친구가 되어 제게도 이런 성대한 만찬을 베풀어주셨으니 평생 감사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벌써 3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호마타스 교수와는 연말이나 신년 초에 가끔 전화를 주고받는다. 역시 내가 존경하고, 아끼고 싶은 평생의 친구여서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고 그 우정을 실크로 싸서 보물단지에 넣어두고 싶다. 우리의 호흡이 계속되는 날까지.

이종수
● 1929년생
●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 저서: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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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수 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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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호마타스 교수와의 50년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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