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공장.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세계 D램 시장을 70% 가까이 점유한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75조 원과 17조 원의 반도체 매출을 올려 8조7000억 원, 5조1000억 원대 영업이익을 냈다. 두 회사의 D램 세계시장 점유율을 합치면 66.6%(삼성전자 40.9%, SK하이닉스 25.7%). 두 회사의 존재감이 워낙 강해 ‘콘크리트 점유율’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초격차!’와 ‘반도체 내재화’
그러나 ‘빛나는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최근 ‘반도체 위기론’이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은 한국의 위상을 위협하는 외부의 공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기술력이 몇 차원 앞선 미국은 기술 격차를 더 벌려가고, 후발주자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올 기세다. 반면 반도체 관련 연구개발( R&D) 등 정부의 지원은 날로 축소되고, 그 여파로 반도체 인력은 제대로 양성되지 않고 있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에 취해 뿌리가 흔들리는 걸 못 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요즘 삼성전자 반도체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외치는 건배사가 ‘초! 격! 차!’라고 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 재직 시절 일본도 성공하지 못한 무결점 실리콘웨이퍼 기술을 개발한 한국 반도체 신화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요즘 ‘메모리 진출’을 선언한 중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박 교수는 “최근 한국의 반도체 실적이 좋은 이유는 D램 공급업체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외에는 없기 때문”이라며 “여기에 중국이 뛰어들면 D램 시장은 또 한 번 잔혹한 치킨게임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러한 위기감에 삼성전자가 건배사로 ‘초(超)격차’를 외칠 만큼 중국이 따라올 수 없도록 기술 격차를 벌려놓자며 마음을 다잡는다는 얘기다.
중국은 300억 달러에 가까운 반도체 국부펀드를 조성해 자국 기업 육성 및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업계엔 ‘중국의 반도체 쇼핑이 끝날 줄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가장 주목되는 기업은 칭화유니그룹(紫光集團). HP의 네트워크 장비 자회사 H3C(지분 51%)와 미국 하드디스크업체 웨스턴디지털(지분 15%)에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일본 도시바·샌드디스크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칭화유니그룹은 지난 7월 ‘미국의 자존심’ 마이크론(세계 3위 메모리업체)에 인수를 제안, 세계 반도체 업계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중국은 기업만 사들이는 게 아니다. 전 세계 반도체 인력이 중국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대만 D램 산업계의 리더로 평가받는 찰스 카오 난야 사장이 칭화유니그룹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대만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돈과 시간은 중국 편?
중국이 ‘반도체 내재화’에 나선 것은 욕심이 아니라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평가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3400억 달러 규모인데, 이 중 중국이 소비하는 것이 2100억 달러다. 컴퓨터, TV, 휴대전화 등 반도체가 들어가는 제품 대다수가 중국에서 생산되기 때문. 이승우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의 연간 유가 수입액이 1300억 달러인데 반도체 수입액은 2000억 달러”라며 “그런 중국 처지에서 반도체는 당연히 자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고 여긴다”고 설명했다.
지난 9월 중국 반도체 업계를 돌아보고 온 KB투자증권은 관련 보고서에서 중국 산업 관계자들이 메모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메모리 산업에 반드시 진출한다 △주류 메모리 업체와의 제휴 혹은 메모리 업체 지분 인수가 필요하다 △투자 자금에 대한 제한은 없다.’
중국이 언제부터 메모리 반도체 양산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다양하다. 학계나 시장이 “돈과 시간은 중국 편”이라며 생각보다 가까울 미래로 여기는 쪽이라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들은 “반도체는 돈과 기술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다소 먼 미래로 본다.
중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기업 인사는 “반도체는 밤새워서라도 해내겠다는 집단적 집념이 필요한 산업인데, 중국인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과 협업하는 대만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 전했다. 반면 박 교수는 “중국은 2~3년 내에 메모리 양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며 “초기에 생산되는 저성능 제품을 군대 등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무시 못할 강점을 활용해 프리미엄 제품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이 ‘메모리 강자’라면 인텔 등 미국 기업은 ‘비(非)메모리 강자’다. 그런데 지난 8월 인텔은 마이크론과의 합작으로 새로운 메모리 기술 ‘3D 크로스 포인트(X-Point)’를 발표, 메모리 시장 진입을 선언했다. 이 기술은 D램과 낸드플래시의 장점만 결합한 것으로, 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이 개발된다면 D램과 낸드플래시로 양분된 기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인텔은 이 기술의 상용화 시점을 내년으로 잡았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3D 크로스 포인트는 메모리 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폭발력을 내재했다. 비단 인텔뿐만 아니라 IBM, 휴렛팩커드 등도 구글 등이 원하는 인공지능 구현에 다가간 반도체, 대형 컴퓨터를 노트북만한 크기로 만들 수 있는 기술 등을 한창 개발하는 중이고 일부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래에는 D램 자체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
중국이 한국을 추격 중이라면, 미국은 한국에 유리한 현재의 ‘판’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래저래 한국 반도체 업계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인력도 줄고, 지원도 줄고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반도체 대장정’에 나선 것은 1985년 정부가 ‘반도체산업 종합육성대책’을 수립하면서부터다. 정부가 이끌고, 기업이 투자하고, 학계가 뒷받침한 결실로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겨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이 1990년대 들어 한국으로 넘어왔다. 국내 반도체 학계 원로인 김형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신화를 이룬 것은 결국 사람”이라며 “1970년대 초반 학번들로 유학 후 반도체에 투신한 이윤우, 황창규, 임형규, 진대제, 권오현 등 반도체 1세대가 아니었다면 현재와 같은 성공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 또한 서울대 71학번으로 반도체 1세대에 속한다. 정년퇴직을 2년 앞둔 그는 “내 후임으로 반도체 교수가 뽑히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43명 중 반도체 전공은 5명뿐이다. 반도체 전공 교수를 마지막으로 뽑은 것은 15년 전.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사정이라고 한다.
대학에 반도체 교수의 씨가 마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대학이 두뇌한국21(BK21) 등의 영향을 받아 논문 실적 위주로 교수를 채용·평가하다보니 반도체 연구자들이 불리해졌다. 반도체는 성숙한 학문이라 새로운 이론을 고안해 세계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가 쉽지 않다. 또한 정부가 반도체를 ‘이미 완성된 산업’으로 판단하고 각종 연구비 지원을 줄여나가는 것도 대학의 반도체 교수 ‘홀대’에 한몫했다. 황철성 교수는 “어쩔 수 없이 나노 등 연구비가 몰리는 분야로 연구 방향을 튼 반도체 전공 교수들도 있다”고 했다.
반도체 교수들 사이에선 ‘30대 교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돈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올 초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 합류한 이윤명(34) 조교수는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도 국내 대학에서 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반도체 전공 유학생들은 주로 미국 반도체 회사에 취업한다”고 전했다. 박재근 교수는 최근 다녀온 국제반도체소자학회(IEDM) 논문 심사에서 목격한 일을 들려줬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 10여 개 대학이 IEDM에 논문을 제출했다. 올해는 한양대와 서울대, 카이스트밖에 없었다. 중국이 제출한 논문의 숫자가 국내 논문보다 예닐곱 배 많았다.”
장비 등 저변 키워야
교수가 없으니 반도체 인력 양성에도 제한이 걸린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가 2008년 배출한 석·박사는 100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난해에는 40명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반도체를 전공하지 않고도 삼성반도체(삼성전자 DS부문)에 박사급 인력으로 채용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고 한다.
“국내 유수 대학 교수들에게 실력 있는 박사급 인재를 소개해달라고 하면 고개를 젓는다. 쓸 만한 인재는 삼성이 싹쓸이해간다고.”(이문용 원익IPS 부회장)
원익IPS는 매출액 4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증착장비 및 장치업체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장 출신인 이 부회장은 “반도체 장비업체는 R&D가 핵심인데, 이를 맡길 인재 확보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석·박사급 반도체 인력이 적게 배출되는 상황에서 그나마도 다들 삼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장비 분야는 국가적 차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다. 반도체 공장을 하나 짓는 데 15조 원이 투입되는데, 그중 건설비는 3조 원에 그치고 나머지 12조 원은 장비 마련에 쓰인다. 장비 국산화 비율은 20%에 불과한데, 그나마 부가가치가 높은 전(前)공정장비보다는 후(後)공정장비에 몰려 있다. 최근 완공한 SK하이닉스 M14 공장의 경우 총 투자비 15조 원 중 해외에서 반도체 장비를 사오는 데 10조 원 이상을 썼다.
인텔이 앞서 거론한 3D 크로스 포인트 기술을 개발한 데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Intermolecular Inc.’의 기여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황 교수는 “미국은 반도체 인력이 인텔, IBM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관련 분야로 진출해 서로 시너지를 낸다”며 “우리나라도 인력이 충분히 양성돼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물론 장비업체 등 저변으로도 진출해야 반도체 산업의 내실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력을 다 가져간다는 삼성에도 고민은 있다. 신입 직원들을 재교육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그룹이 공채 전형에서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없애고 서류 전형을 부활한 것도 이런 고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성 관계자는 “SSAT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서류 평가에서 직무 관련 전공 지식을 얼마나 쌓았는지 보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 한국공학한림원 주최 코리아리더스 포럼에서 이봉주 삼성반도체 인사팀장(전무)은 이렇게 밝혔다.
“업무 평가에서 상위 20%에 든 사람들의 고(高)성과 요인이 대학 시절 전공과목을 많이 듣고 해당 과목의 점수도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 하반기 채용부터는 전공과목을 얼마나 많이 듣고 점수가 얼마나 좋은지를 주로 볼 생각이다.”
운동 마니아인 R군.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스포츠 의류를 갈아입고 달리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R군의 심장 박동 수와 달린 거리, 이동 코스 등이 옷에 기록된다. 티셔츠 위에 얇게 프린트된 메모리 덕분에 옷이 컴퓨터로 변신한 것이다. R군은 태블릿PC를 잘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넓은 화면이 마치 작은 수첩처럼 작아졌다.
2017년 R&D 예산 0원
위의 글은 산업통상자원부 블로그에 실린 산업기술 R&D 우수사례 중 두 번째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의 도입 부분으로, ‘휘어지는 메모리’ 덕분에 이러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예시다. 정부는 2004년부터 7년간 산자부 주도로 차세대 메모리 개발 사업을 벌였다. 총 사업비는 593억 원으로 정부가 322억 원, 기업이 271억 원을 투자했다. 이 사업으로 특허가 2365개 확보됐고, 논문은 622건이 나왔다. 이 사업 단장을 맡았던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반도체 관련 대형 프로젝트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요즘 들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벌이는 R&D 사례를 찾아볼 수 없고, 정부 단독으로 벌이는 R&D 사업도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줄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기공식과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는 2017년 이후 반도체 연구개발( R&D) 사업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 정부는 일반예산으로 반도체 R&D를 지원해오다가 이명박 정부 때 지식경제부가 관리하는 정통기금으로 재원을 바꿨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들어 정통기금 관리 주체가 미래부로 변경되면서 산자부 관할 아래 있는 반도체가 더욱 ‘찬밥’ 취급을 받게 된 셈이다. 국가 R&D 사업 실무를 맡고 있는 한 팀장급 인사는 “박근혜 정부 들어 ‘창조경제’를 주창하면서 소프트웨어 등 ICT 쪽으로의 쏠림이 너무 심하다”고 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 아니라 메모리 강국이다. 메모리보다 훨씬 시장 규모가 크고 이익률이 높은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존재감이 없다시피 하다. 비메모리, 반도체 공정장비 쪽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한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잘하고 있으니 미래 기술도 이들 기업에 알아서 하라는 것은 반도체 산업의 저변을 포기하는 꼴이다. 디스플레이 분야도 기업이 잘한다고 국가가 손놓았다가 중국에 따라잡히지 않았나. 국가 R&D 기금은 주로 대학과 중소기업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렇게 저변에 투자해 함께 커나가야 하는데…. 실무자로서 안타깝다.”
“1등은 지키기가 어려운 것”
마이크론 인수를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중국은(마이크론이 ‘관심 없다’고 이례적으로 공식 발표) 전략적 제휴로 방향을 선회했다. 메모리 분야 선두주자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역량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미국 기업들은 중국이 내민 손을 잡고 있다. 인텔은 칭화유니그룹 지분 20%를 인수했고 NXP, 퀄컴 등은 중국과 협력관계 맺기에 나섰다.
국내 기업들은 아직 중국에 손을 내밀지 않고 있다. KB투자증권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고 촌평했다. 다들 중국에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괜찮지만, 누구 하나가 중국과 연대한다면 다른 기업은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철성 교수는 최근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인텔리서치센터를 방문했다가 인텔이 15년 전부터 극자외선(Extreme Ultra Violet, EUV) 노광장비를 개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고 했다. 노광장비는 반도체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대당 1000억 원이 넘는다)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 ASML이 공급한다. EUV는 현재 벽에 부딪힌 반도체 미세화를 가속화할 수 있는 대안으로 ASML이 상용화 기술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황 교수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EUV 노광장비 개발을 오랜 기간 끌어왔다는 데서 인텔의 저력을 느꼈다”며 “이런 게 퍼스트 무버(First Mover)”라고 말했다.
미국은 달아나고 중국은 쫓아온다. 해를 거듭해 쪼그라진 국가 R&D 사업은 내후년엔 아예 없어질 지도 모른다. 반도체 1세대들은 자기 후임을 만들지 못한 것을 걱정하며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다. ‘반도체의 위기론’은 아직 수면 아래에 있지만, 언제든 물 위로 올라와도 놀랍지 않을 일이다. 김형준 교수는 “1등은 되기보다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