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權)’은 저울추의 이름이다. 사진은 진나라 때 ‘권’의 실물.
자신이 모시는 군주(리더)와 공을 다투면 틀림없이 군주의 단점을 떠들게 돼 결국은 욕을 당하게 된다. 친구와 공을 다투면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事君數, 斯辱矣 ; 朋友數, 斯疎矣).
오늘날로 보자면 이 말은 적절치 않다. 누가 세웠건 모든 공을 군주에게 돌리라는 봉건적, 수동적 사유 방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세우지 않은 공을 가로채거나 남이 세운 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백성과 다투는 정치가 가장 못난 정치라 했듯이, 부하들과 공을 다투는 리더가 가장 못난 리더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명구는 부하가 아닌 리더의 처지에서 되새겨봐야 한다. 지금 우리네 집권당의 상황이 영락없이 이 꼴이다. 양보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권력을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권력투쟁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권력은 ‘균형추’

진나라 내분과 순식의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삽화.
권력(權力)이란 단어에서 ‘권(權)’은 저울추를 말한다. 달고자 하는 물건의 무게를 알기 위해 저울의 균형을 잡는 추다. 따라서 권력은 힘을 나눈다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Balance of Power’다. 힘을 나눌 줄 알아야 무게를 정확하게 달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고자 하는 무게가 바로 민심이다. 따라서 민심을 제대로 달려면 권력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정치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정치가들은 권력을 그저 움켜쥐는 것으로만 아는 단세포적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어쨌거나 관건은 민심의 향방이다. 저들이 민심을 깔보든 말든 칼자루는 민심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가 민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포함한 권력을 얼마나 저울에 내려놓느냐에 달렸다는 말이다. 명나라 때 충신 방효유(方孝孺)는 이런 말을 남겼다.
흥하는 군주는 남이 말을 해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망하는 군주는 남이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한다(將興之主, 惟恐人之無言 ; 將亡之主, 惟恐人之有言).
위정자와 정치가의 흥망을 바른말의 수용 여부와 연계한 명언이다. 바른말이 무엇인가. 바로 민심이다. 바른말, 민심에 귀를 기울여라. 민심은 항상 말할 준비가 돼 있다.
권세가 다하면 멀어진다
기원전 697년 중원의 정(鄭)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여공 돌(突)은 채(蔡)나라로 도망갔다가 역을 거점으로 재기를 노렸다. 기원전 680년, 여공 돌은 정나라를 공격해 대부 보하(甫瑕, 또는 부하(傅瑕))를 사로잡고는 자리와 이권 따위로 유혹해 자신의 복위를 맹서하게 했다. 보하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돌을 맞아들이겠다고 맹서했다. 보하는 약속대로 정자영과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 돌을 맞아들여 복위시켰다.
약 20년 만에 자리를 되찾은 여공 돌. 하지만 그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보하가 군주를 모시는 데 두 마음을 품었다며 그를 죽이려 했다. 보하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진(晉)나라의 대부 이극(里克)은 헌공(獻公)이 총애하던 여희(驪姬)가 낳은 두 아들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잇따라 죽이고 진(秦)나라에 망명해 있던 공자 이오(夷吾)를 맞아들여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즉위 후 이극에게 “그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군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두 명의 진나라 군주를 죽였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대의 군주가 될 수 있겠나”라며 이극에게 죽음을 강요했다. 그때가 기원전 650년으로 보하가 여공 돌에게 죽음을 강요받은 지 30년 후다.

맹자는 걸주(桀紂)의 멸망이 백성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왼쪽) 민본(民本) 사상을 정리한 ‘맹자’는 통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책이다.(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