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渝 두 얼굴의 山水之城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5-10-22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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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쓰촨에 속했지만, 충칭은 쓰촨과는 꽤 다르다. 땅은 덥고, 사람은 다혈질이고, 음식은 맵다. 이런 충칭이 중국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로 비상 중이다. 고층빌딩 숲이 빚어내는 야경이 홍콩과 닮아 ‘작은 홍콩’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 속에서 개발 바람으로 고향 잃은 이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간다.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구릉지대에 있는 홍야동(洪崖洞)의 야경

    충칭에서 서양 여행자들과 함께 훠궈(火鍋, 중국식 샤부샤부)를 먹으러 갔다. 서양인들은 대체로 매운 것을 못 먹는 데다가 충칭 훠궈는 맵기로 유명해서 ‘조금 매운맛(微辣)’으로 시켰다. 곧 새빨간 훠궈가 나왔다. 입에 대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매워 종업원을 불렀다.

    “우린 조금 매운 걸 시켰는데요, 잘못 나온 거 아닌가요?”

    “이게 조금 매운 거예요.”

    쓰촨 훠궈도 맵기로 유명하지만 충칭 훠궈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매웠다. 이게 조금 매운 거라면 ‘극도로 매운맛(加麻加辣)’은 도대체 얼마나 매울까. 론리 플래닛이 충칭 훠궈를 ‘물로 된 불(liquid fire)’이라고 한 것은 꽤나 적절한 표현이다. 훠궈만큼이나 화끈한 사람들이 사는 곳, 이곳이 충칭이다.

    발칙한 다혈질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충칭의 약칭은 ‘변할 유’ 자다. 충칭은 장강의 지류인 자링(嘉陵)강의 옛 이름 유수를 따서 수나라 때 유주라 불렸다. 강 이름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이 된 데서 보듯 충칭은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다. 남송의 황태자 조돈이 이 지역 왕이 된 지 한 달 만에 광종으로 즉위했기에 ‘경사가 두 번 겹쳤다(雙重喜慶)’는 뜻에서 충칭(重慶)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겹경사 도시’인 셈이다.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歸蜀途)’ 중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란 절창이 귀에 익을 것이다. 파(巴)는 충칭이고, 촉(蜀)은 쓰촨성이다. 쓰촨성과 충칭은 파촉 문화권으로 묶일 만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지역으로 묶기에는 뚜렷한 자기만의 개성이 있다.

    쓰촨은 험준한 산악지대 안에 펼쳐진 거대한 평야지대로, 외부와 접촉하기는 힘들고 내부는 풍요롭다. 풍족한 환경에서 산을 울타리 삼아 조용히 숨어 살 수 있다. 그러나 충칭은 거친 강물로 에워싸인 험한 구릉지대다. 안이나 밖이나 다 척박한지라 충칭의 문화는 쓰촨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다소 거칠고 극단적인 성향을 보인다.

    쓰촨도 흐린 날이 많아 ‘촉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蜀犬吠日)’란 말이 있지만, 충칭은 ‘안개의 도시(重慶霧)’로 유명하다. 산과 강이 빚어낸 안개는 여름이 되면 찜통더위로 변해 중국 ‘3대 화로(충칭, 우한, 난징)’ 중 하나가 된다.

    촉(蜀)은 머리로 실을 뿜는 벌레, 즉 누에를 본뜬 글자고, 파(巴)는 길다란 몸에 머리가 달린 동물, 즉 뱀을 본뜬 글자다. 촉인들은 누에를 숭상했고 파인들은 뱀을 숭상한 만큼, 두 지역은 초창기부터 색깔이 달랐다.

    쓰촨인이 활달하다면 충칭인은 다혈질인 편이다. 명랑하고 외향적인 면은 쓰촨인과 비슷하지만,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한다. 충칭인들은 두세 마디 말다툼을 하자마자 이내 주먹이 나가기 일쑤라 ‘야만적인 한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불과 1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조조의 40만 대군을 유린한 용장 감녕이 충칭 출신이다. 쓰촨 여자들이 발랄하다면, 충칭 여자는 다소 제멋대로인 성격이 발칙한 매력(?)을 더한다.

    쓰촨과 일맥상통하면서도 극단적인 성향은 음식에도 나타난다. 충칭은 쓰촨처럼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맵게 먹는다. 충칭 음식을 먹다보면 구강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입안이 얼얼해진다.

    유비, 장비의 영욕 서린 곳

    충칭의 지형도를 보면 이 지역의 중요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충칭은 자링강과 장강의 두 줄기 거대한 강물을 낀 반도형 구릉지대로 ‘산수지성(山水之城)’이라 불린다. 장강은 충칭에서 자링강과 합쳐져 크게 용틀임하며 대륙을 가로지른다. 반도라 물길과 육로 교통이 모두 발달했고 쓰촨, 후베이, 장쑤, 상하이 등 핵심 지역과 통한다. 높은 구릉지대여서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도 쉽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도 쉽다. 거친 장강은 천연의 참호였고, 높은 지역에 버티고 선 충칭은 철옹성이었다.

    충칭은 한나라 때 강을 끼고 있어 강주(江州)로 불렸다. 강주는 촉의 관문으로 오랜 난세에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치 않은 요충지다. 유비가 촉을 공략할 때 장비가 물길을 따라 도달한 곳이 강주성이고, 당시 강주성을 지키던 이는 백전노장 엄안이다.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용맹을 천하에 떨치던 장비도 강주성을 힘만으로는 빼앗지 못해 계략으로 엄안을 사로잡고 의로써 엄안을 감복시켜 유비의 수하로 들게 했다. 장비는 지(智)·인(仁)·용(勇)을 모두 발휘해 장수로서의 원숙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줬고, 무난하게 촉을 접수한 유비는 황제에 오른다. 충칭은 유비와 장비에게 영광의 장소였다.

    그러나 영광의 장소는 이내 오욕의 장소로 바뀐다. 형주에서 조조를 위협하며 승승장구하던 관우가 손권에게 뒷치기를 당해 전사하자 의형제 유비와 장비는 동오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간다. 장비는 관우가 죽은 뒤 연일 폭음하고 부하들을 닦달하다가 결국 자던 중에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삼국지 최고의 용맹을 자랑하던 장수로선 무척 허망한 최후였다.

    복수를 하기도 전에 장비마저 잃은 유비는 제갈량을 비롯한 모든 중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군을 이끌고 동오로 진군한다. 그러나 오의 샛별 육손에게 대참패를 당한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 3대 대전 중의 하나인 이릉대전이다. 이릉(후베이 이창)에서 패한 유비는 강주성 외곽 백제성(白帝城)으로 간신히 도망친다. 촉의 모든 국력을 긁어모은 대군을 잃어버려 신하와 백성을 대할 면목도 없고,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도 없던 유비는 결국 백제성에서 죽음을 맞는다.

    얻은 것, 잃은 것

    장강을 따라가는 싼샤(三峽) 크루즈 여행은 충칭을 출발해 장비의 사당 장비묘, 유비가 최후를 맞은 백제성을 거쳐 유비가 참패를 당한 이창에서 끝을 맺는다. 촉한의 굴욕사나 다름없는 루트다. 그러나 짚신을 짜던 일개 청년이 황제가 된 성공 스토리,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얻으려던 아름다운 꿈, 의형제들과의 의리를 지키다 끝내 좌절하고만 비극은 여전히 중국인, 아니 삼국지의 모든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유비의 대군은 초기에 엄청난 기세로 쾌진했다. 그 결과 전선이 길게 늘어지고 병력이 분산돼 육손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유비를 격퇴했다. 장제스는 이 전략을 중일전쟁에서 활용했다. 유비는 충칭에서 동쪽으로 진격했지만, 장제스는 충칭을 거점으로 일본의 서진을 막았다.

    장제스는 충칭을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로 정하고 대일전선을 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옮겨갔다. 광활한 대륙을 활용해 적의 김을 빼는 육손의 전법은 1700년 뒤에도 성공한다. 일본은 단숨에 만주, 상하이를 점령하며 중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대륙 깊숙이 들어갈수록 예기가 꺾였다. 더욱이 충칭의 지세(地勢)는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기는 쉬우나 밖에서 안을 점령하긴 어려웠다. 짙은 안개와 잦은 비 때문에 공군으로 공습하기도 어렵고, 산과 강으로 에워싸여 육군으로 진군하기도 어려웠다.

    충칭은 국민당 임시수도가 되면서 한층 발전한다. 공업뿐만 아니라 정치와 학문도 발전해 종합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한때 쓰촨성의 일부로 편입됐지만 1997년 다시 승격돼 서부 유일의 직할시로 중요한 위상을 자랑한다.

    충칭의 싼샤는 10위안권 지폐의 뒷면에 실릴 만큼 중국을 대표하는 명소다. 그런데 싼샤댐이 건설되면서 자연경관이 크게 변했다. 수면이 자그마치 160m 이상 상승하는 바람에 예전처럼 웅장한 기풍이 사라졌다. 유비가 최후를 맞은 백제성도 삼면이 장강에 접하고 한쪽이 산으로 이어지는 요새였지만, 댐 건설 후 수위 상승으로 사면이 강에 에워싸인 섬이 됐다. 또한 약 2000개 마을이 사라졌다. 장강 물길을 따라 꽃핀 마을과 문화, 역사가 통째로 물에 잠겼다. 대신 1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생겼다.

    싼샤댐은 오늘의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 위로는 지상 최대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계 최고의 발전량을 자랑한다. 물 밑으로는 방대한 수몰지구가 묻혔다. 거대한 물량과 압도적인 수치, 경제발전을 자랑하는 중국의 이면에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희생당하는 중국인들이 있다.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충칭은 장강 싼샤(三峽) 크루즈 여행의 출발점이다. 관광객의 승선을 기다리는 유람선들.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백제성(白帝城). 쓰촨 요리보다 훨씬 매운 충칭 훠궈(왼쪽부터).

    싼샤댐과 ‘스틸 라이프’

    충칭의 싼샤박물관은 중국이 자랑하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싼샤댐이 건설되면서 홍수가 방지되고, 풍부한 발전량으로 동부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며(西電東送), 물류경제가 발전하고 있다고 부각한다. 선각자 쑨원의 숙원사업을 이룬 공산당의 치적을 홍보한다. 물 밑에 어떤 마을들이 있었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2006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자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三峽好人)’는 원래 미리 기획된 영화가 아니다. 자장커는 화가 친구 리샤오둥의 부탁으로 싼샤 노동자를 그리는 리샤오둥의 모습을 담으러 함께 싼샤에 갔다. 싼샤는 댐 건설을 앞두고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고, 리샤오둥은 현장 인부 11명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 중 한 명이 벽에 깔려 죽었다. 리 일행은 그의 가족을 찾아 죽음을 알렸다. 가족들은 슬퍼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이웃에도 모두 일하러 객지로 떠난 가족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죽는 사람이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과 슬픔으로 일하기 힘들어진 리 일행은 태국 방콕으로 떠났다. 리는 방콕에서 11명의 태국 여자를 그려 중국인이 좋아하는 음양대칭을 맞추고 죽은 자의 원혼을 위로했다. 그런데 때마침 태국에 수해가 났고, 여자 모델 한 명이 수재가 난 고향을 찾으러 갔다. 싼샤나 태국이나 물난리가 난 상황은 비슷하지만, 하나는 그 때문에 고향이 사라졌고, 하나는 고향을 찾았다. 삶의 터전이 파괴됐더라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시 모이고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돌아갈 곳 자체가 사라진다면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2000년이나 된 도시가 2년 만에 사라지고 가족을 잃고 사람이 죽어가지만 아무도 말을 못하는 상황. 자장커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스틸 라이프’를 찍었다. 싼샤 노동자 한산밍은 아내와 딸을 찾아 16년 만에 아내의 고향에 온다. 그러나 쓰촨성이던 곳이 충칭시로 행정구역 자체가 바뀌었고, 찾아간 곳은 이미 장강 저 깊이 잠겼다.

    한국 드라마는 뭘 만들든 멜로가 되고, 중국 드라마는 뭘 만들든 무협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자장커는 제시한다. 자장커는 ‘스틸 라이프’를 자기 나름의 무협영화라고 표현한다. 한순간 가족과 고향을 잃고 맨몸으로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도는 사람들, 중국인들 자신이 바로 무림을 떠도는 강호인이기 때문이다.

    충칭은 ‘공사 중’

    충칭의 인간 명물은 짐꾼 방방(棒棒)이다. 중국의 도시는 대체로 평지이지만, 충칭만큼은 예외적으로 구릉지대다. 다른 도시처럼 수레를 이용할 수가 없어 오직 발로만 짐을 운반하는 짐꾼이 생겨났다. 대나무 작대기 하나로 짐을 운반하기에 ‘막대기 방(棒)’ 자를 썼다.

    이들은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1990년대 싼샤댐 건설 이후 그 숫자가 폭증했다. 변두리에 살던 변변한 기술 없는 저학력자들이 무작정 도시로 오자 만만한 게 짐꾼이었다. 방방족은 오늘도 하루 50위안을 간신히 벌며 자기 체중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중국에서 가장 무덥고 가장 가파른 도시를 오르내린다. 강호 협객이 칼 한 자루로 험난한 무림을 헤쳐가듯, 충칭의 방방은 멜대 하나로 대도시의 무게를 떠받친다.

    변해가는 것은 싼샤만이 아니다. 2012년 충칭은 중심 번화가인 제팡베이(解放碑) 거리부터 장강변까지 모든 곳이 ‘공사 중’이었다. 사방에서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숙소 앞에선 장강대교가 건설되고 있었다.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라지만 정돈되지 않고 한창 개발 중이라 어수선했다. 폐허 같은 부두에는 낡디낡은 유람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그러나 무림을 떠도는 중국인들은 어수선한 순간도 즐기는 법을 안다. 폐허 같은 강변도 소박한 유원지처럼 꾸렸다. 풍선을 터뜨리며 인형을 따고, 자갈이 깔린 강변을 소형 로드러너(沙灘車)로 질주하며, 연을 날린다. 엉성한 강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한편에서는 강바닥을 캐며 보물찾기에 여념이 없다. 화물선이 빠뜨린 보물이라도 찾으려는 걸까. 정작 찾은 것들은 옛날 동전, 열쇠, 도자기 파편, 예쁜 돌 등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뿐이었지만.

    충칭은 면적 8만2368km²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다. 오스트리아 전체 면적과 비슷하고, 한국 국토의 82%에 달하는 크기다. 3200만 충칭 인구는 800만 오스트리아 인구를 압도한다. 이 거대한 지역 곳곳에서 개발이 진행 중이다. 쉴 새 없이 옛 건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다. 흥청스러운 큰길 뒤편에는 ‘철거(折)’라고 쓰인 집들이 가득했다. 그중 한 집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환경보호 모범도시, 5개 충칭 건설을 추진하자(創建環保模範城市 助推五個重慶建設)’. 철거되는 집 주인은 이 표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한 개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찰이 생긴다. 원래 거주하던 사람이 이주하지 않고 남은 경우 ‘못집(釘子戶)’이라 부른다. 주변은 다 개발됐는데 못처럼 혼자 튀어나와 움직이지 않음을 빗댄 표현이다.

    國富民窮

    2007년 충칭은 ‘사상 최고의 못집(史上最牛釘子戶)’을 만들어냈다. 상권 개발에 불복하고 홀로 남은 못집의 주위를 파내 깊이 20m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사진을 보면 백척간두 절벽 위에 살짝 얹혀진 집을 보는 듯하다. 그래도 집주인 우핑이 꿋꿋이 버티고 나가지 않자 결국 법원은 국가 이익을 구실로 강제 철거령을 내렸다. 우핑의 재산권은 무시되고, 상권 개발은 국가 이익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건만, 인민은 못 박을 만한 땅에서도 살 수 없다.

    서부 대개발의 거점 도시이며 2011년 ‘포춘’ 지가 선정한 최고의 신흥 비즈니스 도시 충칭. 2007~2012년 부유층이 무려 80%나 증가해 부유층 수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 충칭. 그러나 주민소득 증가는 도시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다. 국가는 부유해지지만 국민은 오히려 가난해진다(國富民窮).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사는 것이 이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양극화가 극심해지니 불만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보시라이 열풍’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나왔다.

    보시라이를 둘러싼 의혹은 한둘이 아니다. 막대한 뇌물 수수, 부적절한 성(性)관계, 아내의 살해, 미국대사관 도피, 무기징역 판결로 이어진 보시라이의 몰락은 그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파란만장하다. 그러나 의혹을 제쳐놓고 보면, 보시라이는 인민의 신망을 한 몸에 얻던 유능한 정치가였다.

    보시라이는 다롄 시장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퇴임할 때 “우리는 일하느라 늙었지만 다롄은 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훗날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가 다롄을 여행할 때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다롄 사람들이 보시라이를 좋아합니까?” 기사는 답했다. “그리워하죠.” 보시라이는 퇴임 후에도 다롄 발전의 공로자로서 현지인들에게 인정받았다.

    당시 시진핑은 이미 차세대 지도부에 안착해서 튈 필요가 없었지만, 계속 외지를 떠돌며 지도부에 진입하기 어렵던 보시라이는 어떻게든 당과 인민의 신망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보시라이의 충칭 시장 임명은 사실상 좌천이었으나, 보시라이는 여기에서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충칭 시장 보시라이의 이력은 눈부시다. 보시라이는 중국에 ‘충칭 모델’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해 성장을 우선시한 광둥 모델을 반성하고, 공동부유론에 입각해 부의 분배와 형평성을 강조했다. 보시라이의 정책으로 사회복지, 주거, 의료 등 다방면에서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도 충칭의 성장률은 10%가 넘었다. 또한 그는 부패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조직 폭력과의 전쟁을 벌여 사회 분위기를 일신했다. 2009년 63개 범죄 조직원과 배후의 고위 공무원 3348명을 체포해 ‘현대판 포청천’이란 칭송을 받았다. 2010년 충칭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10개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4개 직할시 중 유일했고, 충칭으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보시라이에 열광한 까닭

    미국인 피터 해슬러는 충칭 장강변의 작은 마을 푸링에서 2년간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때 가르친 학생 한 명은 보시라이의 개혁이 자기네 같은 변두리의 작은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며 그의 실각을 안타까워했다. “왕리쥔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줬고 보시라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줬어요. 그들은 완전하진 않았지만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거예요.”

    ‘인민일보’의 설문조사 결과 보시라이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 1등에 올라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애초에 당내 지지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차세대 지도부에 들어가기란 힘들었던 걸까. “돼지와 사람은 튀면 먼저 죽는다”는 중국 속담대로 보시라이는 온갖 의혹에 휩싸인 채 정계에서 불명예스러운 강제추방을 당하고 무기수 신세가 됐다.

    보시라이는 사라졌지만 이후 시진핑의 행보는 여러모로 보시라이를 떠올리게 한다. 시진핑 역시 부패 척결과 사회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한편, 무리한 성장에 대한 반성으로 신창타이(新常態) 개념을 제시했다. 중국의 민심이 갈구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리라.

    중국의 중부와 서부를 잇는 요충지,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로서 충칭의 발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침에 구름 사이로 백제성을 떠나, 천리길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네(朝辭白帝彩雲間,千里江陵一日還)”라던 이백의 노래처럼 충칭은 하루 만에 후베이의 한복판 강릉(징저우)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21세기 실크로드인 위신어우(逾新歐) 열차는 충칭에서 출발해 러시아·폴란드를 거쳐 독일에까지 이른다.

    정책도 전폭적으로 충칭을 후원한다. 충칭의 양강신구(兩江新區)는 다양한 혜택으로 ‘신특구 중의 특구’로 불린다. 신구 설립 3년 만에 500대 글로벌 기업 중 118개가 입주했다. 쓰촨성과 묶어 서부의 광활한 시장을 발전시키려는 ‘청위(成逾)경제구 발전규획’도 일찍이 2011년 제정됐다. 여러모로 충칭은 서부 중국 진출의 거점이다.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충칭의 인사동, 츠지커우(磁器口).

    ‘작은 홍콩’에 남은 숙제

    안일한 쓰촨보다 진취적인 분위기도 장점이다. “젊어서는 촉에 들어가지 말고, 늙어서는 촉에서 나오지 말라(少不入川, 老不出蜀)”는 속담이 있다. 젊어서 쓰촨에 들어가면 너무 일찍 패기를 잃고 안일함에 젖게 되고, 반대로 나이가 들면 이만큼 편한 곳도 없으니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이에 비해 충칭은 거칠고 경박한 대신 적극적이라 야심 만만한 청년은 쓰촨보다는 충칭을 선호한다.

    밤이 되면 충칭은 화려한 야경을 자랑한다. 좁은 면적, 많은 언덕에 밀집된 고층건물은 홍콩과 비슷해서 ‘작은 홍콩(小香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흐린 날씨, 낡은 건물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며 화려한 조명이 빛나 충칭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김용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다만 성장의 현란한 불빛에 현혹돼 어둠 속에 묻힌 소외계층을 잊지 않고 살피는 것이 충칭의 숙제로 남아 있다. 성장 우선 모델로 알려진 덩샤오핑의 선부론은 “먼저 몇 사람이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이런 말로 끝맺는다.

    “그리고 아직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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