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호

20대 리포트

삶의 새로운 방식

노멀크러시에 빠지다, 평범함에 반하다

  • 오하선 고려대학교 생명공학부 4학년

    dhgktjs6583@naver.com

    입력2018-12-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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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 “그냥 아무나 돼”

    • 패션? 기교 없이 자연스럽게

    • 영상? 무자극 일상 잔잔하게

    • 휘게, 놈코어룩, 브이로그



    이효리는 초등학생에게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말한다. 2017년 8월에 방영된 이 영상은 25만 조회 수를 올리며 많은 이의 공감을 샀다. 

    최근 젊은이 상당수는 뛰어남보다는 평범함을 더 선호한다. 이효리의 발언이 화제가 된 것도 이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범함에 빠지는 ‘노멀크러시’ 양상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멀크러시는 ‘보통의(normal)’와 ‘반하다(crush)’가 결합한 신조어로, 한 연구소가 ‘20대를 대표하는 트렌드’로 선정하면서 알려졌다.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노멀크러시는 사회 곳곳에 침투하고 있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같은 평범함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용어가 계속 등장하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취재에 따르면, 노멀크러시는 ‘휘게’ ‘놈코어룩’ ‘브이로그’라는 세 키워드로 주로 나타난다.

    “부(富) 대신 휘게”

    ‘휘게’를 소개한 책.

    ‘휘게’를 소개한 책.

    휘게는 아늑함을 뜻하는 덴마크어다. 마이크 비킹 덴마크 행복연구소장이 2016년 펴낸 ‘휘게 라이프(Hygge Life),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라는 책을 통해 알려졌다. 한국에선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으로 정의되는 휘게는 노멀크러시의 핵심에 해당한다. 소확행, YOLO(오직 한 번 사는 인생·You Only Live Once)로 변형되지만 그 중심에는 휘게가 있다.



    요즘 많은 젊은이는 이 휘게를 열심히 추구한다. 모 컨설팅회사 인턴인 김모(여·23·고려대 통계학과 휴학생) 씨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고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때 휘게를 느낀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양모(23·고려대 생명공학부 휴학생) 씨도 “하루를 다 끝내고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에 어떤 것을 할 때 휘게를 경험한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하면 즐겁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다.

    몇몇 대학생은 “과거 세대와는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다른 것 같다”고 말한다. 내집 마련, 부자 되기, 성공 같은 것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재학생 김모(여·24) 씨는 “옛날엔 열심히 공부하면 취업하고 열심히 저축하면 집을 샀다고 한다. 요즘은 열심히 해도 이루기 어렵다. 소박하고 작은 것을 추구하면서 안정을 찾는다”고 말했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눈앞에 있는 휘게를 발견해 즐기려 한다”는 것이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로 근무하는 정모(여·22·전남대 간호학과 휴학생) 씨는 “부모 세대는 공무원 같은 목표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목표를 갖기 싫다”고 했다.

    컨설팅회사 인턴 김씨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흙수저는 흙수저이고, 금수저는 금수저”라고 했다. “아등바등하면, 아등바등하다 죽을 뿐이다. 이런 한계를 깨달으면서 생각이 바뀐 것 같다. 노력한다 해도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놈코어룩, 철저하게 추구하는 평범함”

    노멀크러시를 희구하는 젊은이들은 패션에도 놈코어룩을 뚜렷이 선호한다. 놈코어룩은 ‘평범한(normal)’ ‘철저한(hardcore)’ ‘보임(look)’의 합성어로, 꾸미지 않은 듯 평범함을 철저하게 추구한다. 2013년 미국의 트렌드 전망 기관인 케이홀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경향성으로 놈코어를 제안했다. 최근 우리 대학가에 확산돼, ‘오버핏(약간 넉넉하게 크게 나오는 옷)’이나 ‘미니멀룩(최소한의 기교를 사용한 옷)’으로 나타난다. 

    놈코어룩을 즐겨 입는 고려대 생명공학부 재학생 박모(여·23) 씨는 “옛날엔 유행 따라 입었다. 유행이 자신과 잘 안 맞아도 그랬다. 요즘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패션을 찾는다”고 말했다. 강모(23·고려대 사회학과 휴학생) 씨도 “나와 친구들은 이제 개성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안 좋아한다. 그러나 너무 평범한 것도 싫어한다. 그 사이 경계에서 찾은 것이 놈코어룩”이라고 했다. 

    이들은 놈코어룩의 가장 큰 특성에 대해 “기교를 배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겉모습에 대해 ‘자연스럽다’고 느끼면 된다. 한철 유행 대신 오래 지속되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박씨) 

    “요즘 젊은이들은 외양을 중시한다. 노멀크러시가 외양으로 나타난 양상이 놈코어룩이다. 무엇보다 ‘과하지 않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색감으로 포인트를 주지만 이 포인트조차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진 않는다.” (강씨) 

    요즘 같은 ‘동영상 시대’에 노멀크러시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자극 없는 영상과 잔잔한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도시 어부’ ‘효리네 민박’ ‘나 혼자 산다’ 같은 정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의 TV 프로그램이 뜨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디오(video)와 블로그(blog)의 합성어인 ‘브이로그(vlog)’는 ‘자신의 일상을 촬영한 인터넷 영상물’이라는 뜻으로, 노멀크러시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콘텐츠 사용 특성을 잘 반영한다. 이들은 인터넷 세대답게 디지털 동영상을 스스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거나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꾸미는 일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들이 만드는 동영상은 대체로 이들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다. 

    실제로 노멀크러시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소재로 한 사진을 게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콘텐츠 연구소’가 인기를 끈다. 서울 안암동에서 자취하는 대학생 김모(여·23) 씨와 가천대 영문학과 재학생 오모(여·20) 씨는 자극이 없는 브이로그를 보고 만드는 것을 즐긴다. 

    김씨는 “‘그걸 왜 보느냐’고? 나의 일상 자체가 재밌진 않다. 별 게 없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오씨도 “연예인의 삶이나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은 일반인의 일상과 다르니까 동경하는 마음으로 볼 것이다. 브이로그는 일반인의 일상과 똑같으니까 더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부담스러움으로부터의 도피’

    “자극적인 콘텐츠는 처음엔 ‘이게 뭐지?’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고 이목을 끈다. 이젠 이런 자극이 넘쳐난다. 이야기 중심의 콘텐츠는 재밌긴 하지만 이해하려면 많은 생각을 해야 해 부담스럽다. 짧고 간단하고 직관적인 것이 좋다.” (오씨) 

    휘게, 놈코어룩, 브이로그로 대표되는 노멀크러시. 이런 극단적 평범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부담스러운 인생 목표를 포기하고(휘게), 부담스러운 패션을 거부하고(놈코어룩), 부담스러운 스토리를 외면한다(브이로그). 이들은 ‘부담으로부터의 도피’를 원하는지 모른다. 과연 평범함은 매력일 수 있을까.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업(담당 허만섭 강사·신동아 기자) 수강생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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