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대외경제협력투자위 114쪽 분량 제작
외국인 투자 우대 정책 일목요연하게 정리
주6일 48시간 근무, 월 최저임금 30유로(시급 192원 수준)
비핵화 없는 투자 유치는 백일몽일 뿐
2018년 5월 26일 노동신문이 보도한 원산갈마해안 관광지구 전경. [뉴스1]
“조선이 경제 발전을 하려면 외국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미국이 제재를 가하는 상황에서 방법이 많지 않다. 현재 외화를 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광이다. 관광객을 대폭적으로 늘려 관광을 발전시켜야 한다.”
개성공단을 언급하면서 개혁·개방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개성공업지구가 조선 체제에 장기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겠느냐고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하지만 얻은 게 더 많다. 우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을 벌었다. 둘째, 개성 시민에 대한 자연스러운 통제와 관리가 용이해졌다. 다른 지역은 장마당 때문에 인민 통제가 얼마나 힘들어졌나. 개성 시민 5만 명이 매일 한곳에 모여 일하고 퇴근하는데 따로 무슨 관리가 필요한가. 총체적으로 우리가 훨씬 이익이다. 이런 경제특구를 내륙으로 확대해야 한다. 개성공단 같은 곳을 14개 더 만들라.”(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참조)
북한 전역에 20개 경제개발구 설치
2013년 11월 북한은 13개 경제개발구를 새로 지정하면서 국가경제개발총국을 국가경제개발위원회로 승격했다. 국가경제개발위원회는 노동당 행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 2013년 12월 처형된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이다. 장성택 사형 판결문에는 “놈은 내각이 경제사령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장성택 처형 이후 13개 경제개발구는 유명무실해졌다. 중국과 가까웠던 장성택 처형 이후 북·중 관계가 경색됐으며 김 위원장은 공포 통치에 나섰다. 북한은 이후 빠른 속도로 핵 개발에 나서 완성 단계에 진입했다.대북소식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에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입안한 왕후닝(王寧·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같은 전략가가 있다. 2013년 13개 경제개발구를 입안한 인물이다. 장성택 처형 이후 한동안 한직으로 밀려나 있다가 되돌아와 경제개발구를 챙긴다. 장성택이 추진하던 경제개발구 사업이 모두 부활했다. 제재 완화가 시작되면 북한이 본격적으로 외자 유치에 나설 것이다.”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는 북한이 “핵무기, 체제 유지, 제재 해제로 이뤄진 ‘3종 세트’를 원한다”고 봤다.
“북한의 일관된 목표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핵무기를 가졌다고 강한 나라가 되나? 핵무기를 남겨놓은 채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이 김정은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핵무기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갖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핵보유국 지위에서 미국과 핵 군축협상을 벌이면서 대북제재 완화 및 해제를 받아내는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제재 완화를 공론화했으니 북한의 의도가 얼마간 먹혀들었다고 하겠다. 아직까지 미국은 선제적 비핵화 없이는 제재 완화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으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해 제재를 단계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개 국어로 제작한 ‘가이드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투자안내’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제작됐다.
이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개성공업지구(한국 투자), 금강산국제관광특구(현대그룹 투자), 나선경제무역지대, 황금평·위화도경제지대, 무봉국제관광특구(백두산 일대) 5곳을 ‘개발 중’이다. 덧붙여 20개 경제개발구를 새로 개방하려고 한다. 문건은 “경제개발구들은 매개 지방의 경제기술적 토대와 자연지리적 특성에 맞게 경제개발구 밖과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무역 거래와 수송을 발전시킬 수 있게 위치를 정하고 전망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힌다. 이렇듯 20개 경제개발구는 제재 완화 및 해제를 기다리는 ‘전망 계획’ 단계다.
개성공업지구를 비롯해 ‘개발 중’인 5곳과 새로 경제개발구로 지정한 20곳,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합하면 ‘26개 특구, 개발구’를 지정해 외자 유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상응 조치를 기다린다”면서 제재 완화를 거듭 요구한다. “미국이 우리가 취한 조치들에 상응한 조치들로 계단을 쌓고 올라와야 침체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2018년 12월 13일 조선중앙통신 논평)는 것이다.
문건은 “다른 나라의 투자자들은 자기의 전문 분야와 희망에 따라 적합한 경제개발구를 선택하고 공업과 농업, 무역, 관광,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투자를 진행할 수 있다”고 밝힌다. ‘26개 특구’에서 외자를 동시에 유치하는 것은 개방 경제로의 적극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북한 대외경제협력투자위원회는 3가지 방식의 투자를 제안한다. “①국가가 경제개발구의 하부구조시설(infrastructure)을 종합적으로 개발하고 다른 나라 기업의 투자를 받아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 ②다른 나라 개발 기업이 국가로부터 개발 사업권을 승인받아 경제개발구의 하부구조시설을 개발하고 그 개발구에 창설되는 외국 투자기업에 토지를 재임대하는 방식 ③다른 나라 기업과 우리나라 기업이 합영의 방식으로 개발기업을 창설하고 국가로부터 개발 사업권을 승인받아 공동으로 경제개발구의 하부구조시설을 개발하고 외국 투자기업들에 공동으로 토지를 재임대하는 개발 방식”이 그것이다. 그중 ②는 특정 외국 기업이 개발구를 통째로 맡아 개발하는 방식이다.
“특혜적인 경영활동 보장하겠다”
북한의 대외경제투자협력위원회는 한국의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성격이 비슷하다. 문건은 “국내 기관, 기업소와 회사들, 조선에 대한 투자를 희망하는 다른 나라 비정부기구, 기업, 단체, 투자가 협회, 기업가(해외 조선동포 포함)들과 비정부 국제기구들을 사업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문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관 △외국투자정책 △투자환경 △출입국 절차 △외국인투자기업 유형 △외국인투자기업 창설 및 운영 △외국인투자기업 및 외국인 세금제도 △우대정책 △재정, 회계 검증 제도 △지적재산권 보호제도 △경제개발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 △조선대외경제협력위원회 등 12절로 구성돼 있다.
북한에 투자하려는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인 셈이다. 북한의 자연 지리, 인문 지리, 자원(지하자원, 동식물자원, 관광자원)을 개괄한 후 외국인 투자 정책, 법령 및 조세제도를 망라해 소개한다. 투자 유치와 관련된 각 기관의 전화번호와 e메일 주소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문건은 첫머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나라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경 1000㎞ 내에 6억 명의 인구가 밀집된 거대한 소비시장과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세계 여러 나라와의 경제협력과 교류를 확대 발전시키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관한 정책”이라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공업과 농업, 건설, 운수, 통신, 과학기술, 관광, 유통, 금융과 같은 여러 부문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투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외국인 투자자 우대 정책에 대해서는 “소득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금의 감면, 유리한 토지 이용 조건의 보장과 은행 대부의 우선적 제공과 같은 우대를 받는다”면서 “물자 구입 및 반·출입, 노력 채용, 세금 납부, 토지 이용 등에서 특혜적인 경영활동 조건을 보장해준다”고 밝힌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1013달러로 밝힌 것도 눈길을 끈다.
월 최저임금 한국 돈 3만8500원
북한의 노동시간은 “주 48시간(6일 근무제), 하루 8시간이며 부득이한 사정으로 명절일과 일요일에 노동을 시켰을 경우에는 1주일 안으로 대휴를 줘야”하며 “외국인투자기업에서 채용하는 일반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월 30유로(약 3만8500원), 탄광·광산 부문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월 80유로(액 10만2700원)”다. 일반 노동자의 경우 1시간당 최저임금이 192원 수준에 불과해 인건비에서 경쟁력이 높다.경제개발구 20곳 중 만포경제개발구는 관광, 농업, 공업을 결합했다. 청진경제개발구는 금속가공, 기계제작, 전자산업을 기본으로 한 수출단지다. 혜산경제개발구는 수출가공, 관광휴양, 중국과의 무역으로 특화한다. 압록강경제개발구도 중국 기업의 투자를 염두에 뒀다. 평양에 위치한 은정첨단기술개발구는 “정보기술, 나노 및 새 재료, 생물공학 분야의 첨단 산업구와 첨단공업 설비제작 기지를 기본으로 해 가공무역 사업과 상업 봉사활동을 적절히 결합한 첨단과학기술개발구로 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밖에 현동공업개발구, 흥남공업개발구, 위원공업개발구, 북청농업개발구, 어랑농업개발구, 와우도수출가공구, 송림수출가공구, 신평관광개발구, 은성섬관광개발구, 신의주국제경제지대, 강령국제녹색시범구, 진도수출가공구, 청남공업개발구, 숙천농업개발구, 청수관광개발구가 외국인 투자를 기다린다.
“오늘부터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면서 태도를 바꾸는 독재자는 없다. 독재자가 추구하는 이득은 권력 유지다. 북한의 현재 경제구조에서 체제 유지의 원천은 돈, 그중에서도 외화(外貨)다. 외화를 확보해야 경제적 생존이 가능하고 성과도 과시할 수 있다. 북한이 제재 완화를 요구하면서 외자 유치에 팔을 걷어붙인 까닭이다.
“동시다발 외자 유치는 백일몽”
남북 경협을 검토하는 한 대기업 임원은 문건을 살펴본 후 “북·중 국경에 위치한 개발구들과 내륙의 몇몇 개발구는 중국을 비롯한 외부 자본이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면서도 “26개 특구·개발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외자를 유치하겠다는 구상은 백일몽에 가깝다”고 봤다.북한이 투자 유치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는 첩경은 하루빨리 핵을 포기하는 것이다. 비핵화에 나서지 않으면 경제 개방 구상도 공염불일 뿐이다.
유승민 삼성증권 북한투자팀장은 “독재자로서 오래가려면 인민의 존경이 필요한데, 그것은 경제 성과에서 비롯한다. 경제 성과를 얻기 위한 원동력으로 핵을 이용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시야가 어느 곳을 향했는지에 따라 핵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