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 흐르면서 시작되는 삶도 있다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 탁자에 생긴
아주 작은 홈
이상한 기분을 가진 적 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게는 멀리 있고
심부름을 다녀오면 사라져버릴 사람과
남아 있을 빈 의자
한 손에 달콤한 사탕이 들려있다 해도
다음에 다시 만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는
창밖에
다 녹을 만큼만 눈이 내렸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그렇게 생겨난다
빛도 어둠도 없이
막아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우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걸 몰랐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참았다
모두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두에겐
아주 무거운 상자
무릎이 아픈 사람이 자주 무릎을 만진다
빛은 찌르는 손을 가졌는데
참 따듯하다
안미옥
●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온’ 출간
● 2018년 김준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