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처럼 ‘강성노조’ 과감히 제압해야”
대한민국 ‘민노총의 나라’ 돼
집권세력, 시장 이해 단세포적
안개 속 평화로 고단한 경제 못 덮어
민노총을 비롯한 50여 개 단체가 모인 민중공동행동이 2018년 12월 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주최 측 추산 1만5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2018 전국민중대회’를 열고 있다. [동아일보 장승윤 기자]
경제성장률, 고용지표, 경기선행지수 등 주요 경제지표 가운데 낙제점이 아닌 게 거의 없다. 수출·투자·소비 둔화로 경제성장률은 2017년 3.1%에서 2018년 2.7%로 뒷걸음질 쳤다. 2018년 10월 실업률 3.5%는 같은 달 기준으로 13년 만에 최악의 수치였다. 소득양극화 해소는커녕 상·하위 계층 간 소득격차가 11년 만에 가장 크게 벌어졌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가구소득의 증가분이 8.8%로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소득의 감소분 7.0%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1분위 가구의 취업 인원수가 16.8% 급감한 결과라는 해석이 많다.
2018년 1월부터 9월까지 전체 제조업의 평균 가동률은 72.8%였다. 이 역시 66.8%를 기록한 1998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조선업이 포함된 기타 운송장비 제조업과 자동차·트레일러 제조업 등에서 수치가 저조했다. 주력 산업 퇴조가 도드라진 셈이다.
경상수지가 계속 흑자를 나타내긴 했다. 이는 반도체와 석유 제품 등 일부 효자 산업의 선전 덕을 본 결과다. 그나마 흑자 폭은 점차 줄고 있다. 향후 전망이 나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어둡게 내다보는 가운데, 한국은행 역시 2019년 경제성장률을 2.6%로 내려잡았다.
경제난국 외면하는 文정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7월 3일 오후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에 앞서 김주영 한국노총위원장(오른쪽 첫 번째) 및 김명환 민주노총위원장(오른쪽 두 번째)과 면담을 가졌다. [동아DB]
몇 달 전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을 동시에 교체했지만 기존 정책 기조에는 거의 변화가 없어 보인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 탄력근무제 입법 무산 등에 따라 기업환경은 그야말로 악화일로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마침내 40%대까지 추락해도 정권 차원의 위기의식은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 대담하거나 무심하게도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지금까지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 등 남북관계만 잘되면 지지율쯤이야 언제라도 복원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세간의 시급한 관심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다. 내일의 안갯속 평화가 현재의 고단한 경제를 덮을 수는 없다. 한반도 데탕트 무드가 국정 지지도를 견인하는 동력도 최근에는 확실히 그 힘이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40년 전 영국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 우리나라에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1979년 벽두, 영국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운수노동자, 병원 근로자, 미화원 등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장기 파업이 영국 국민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줬다. 1978년에 두 번째 석유파동이 영국을 덮쳤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운데 1979년 1월 3일, 유조차 운전기사 및 육상화물 운송기사들이 25%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1월 22일 전국공공부문근로자노동조합이 주도하는 대규모 연대파업으로 이어졌다. 도로 운송이 마비돼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고 무역도 큰 타격을 받았다. 거리마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난방 제한과 병원 폐쇄로 병사(病死)하는 노인이 속출했다. 장례업 종사자들의 파업으로 시신이 방치되기도 했다. 영국 전체가 졸지에 ‘무정부 상태’로 돌입한 것이나, 사실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2018년 12월 5일(현지시간) 미국 제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의 장례식이 엄수됐다. 생전의 부시는 1992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빌 클린턴에게 의외의 역전패를 당해 단임으로 물러났다. 선거 초반 부시의 지지율은 고공 행진을 거듭했고, 한때는 90%까지 치솟기도 했다. 걸프전쟁의 영웅인 그가 누린 높은 지지율의 배경은 국제정치였다. 그는 1989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체제를 사실상 종식한 인물이다.그런데 도전자 클린턴의 캠페인 슬로건 하나가 부시가 압도하던 미국 대선판을 막판에 뒤흔들었다.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 is the economy, stupid)”로 미국의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꼬집으면서 부시의 경제정책을 공격한 것이다. 클린턴은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역전의 기쁨을 맛보며 집권에 성공했다.
부시와 클린턴의 극적인 한판 승부는 근대 이후 국가권력 혹은 정권의 성패에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대표 사례다. 안보나 외교가 물론 중요하긴 하다. 도덕이나 윤리가 정치의 세계에서 여전히 한몫을 차지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역시 최대 관건은 경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근대사회에서 정치적 금언(金言)이 된 것은 권력의 정당성이 과거에 비해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방증한다.
근대정치,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관계란 일종의 시장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작동한다. 권력자들은 일정 기간 성과와 업적을 내놓아야 한다. 이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는 건 바로 유권자의 힘이다. 이때 유권자들이 가장 바라는 성과와 업적은 삶이 보다 편안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경제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전근대국가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외면하는 근대국가는 정의상(定義上) 하나도 없다.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20세기 일본의 경제 발전 과정을 연구하면서 근대국가의 경제체제는 두 가지 축의 조합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는 경제 운용의 주체에 관한 것으로, 계획과 시장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는 문제다. 전자가 국가주의라면 후자는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다. 또 다른 하나는 경제활동의 목표에 관한 것이다. 경제활동의 목적을 본연의 합리적 효율성 추구에서 찾을 것이냐, 아니면 특정 이념이나 가치의 실천에 둘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논리 모순의 J노믹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018년 6월 10일 제주시 문대림 당시 제주지사 후보 선거사무소 앞에서 민주노총 제주본부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날 문 후보 선거사무소 앞에서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법 폐기를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뉴스1]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생뚱맞게도 시장과 이념의 결합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J노믹스는 경제적 합리성을 시장 원리에서 구하는 정책이 아니다. 대신 산업, 고용, 부동산, 에너지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시장을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공공부문 고용 확대, 부동산 규제 강화, 탈원전 결정 등은 말하자면 이념 지향적 시장경제다. 경제적 가치가 아닌 사회적 가치를 믿는 것이다. 현 정부가 이처럼 형용모순적인 ‘시장·이념적’ 체제에 집착하는 배후에는 시장경제를 자본주의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1980년대식 운동권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집권세력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들은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단세포적이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에 따르면 인간은 원천적으로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물질생활’을 하는 존재다. 자급자족의 물질적 삶이 인류 문명의 출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교환가치의 영역인 시장의 출현과 더불어 인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경제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시장경제 덕분에 인류 문명이 물질적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는 근대 이후 시장경제의 바탕 위에 올라선 또 다른 차원의 생산양식일 뿐이다. 시장은 경쟁과 규범을 기본 원리로 삼지만, 자본주의는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이 독점이나 반칙 등을 통해 시장을 교란하고 위협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드물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과 시장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시장경제는 인류의 오랜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제2의 자연과 같은 존재다. 시장의 천성(天性)은 자유롭고 투명하며 다양하고 개방적이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단점을 바로잡는 역할도 궁극적으로는 시장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기본 책무는 다름 아닌 이런 시장을 만들고, 키우고, 지키고, 살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사 또한 시장의 발전사에 줄곧 충실했다. 이승만은 건국 과정에서 시장경제를 제도화했다. 박정희식 경제계획의 근본 원리도 시장 친화적이었다. 이른바 진보·좌파 정권의 대표적 경제 업적으로 꼽히는 김대중의 IMF 위기 극복과 노무현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역시 시장주의 원칙을 믿고 따른 성과였다.
영국 깨운 탈이념·친시장의 힘
영국을 ‘불만의 겨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탈이념·친시장의 힘이었다. 정부 축소, 시장 확대, 규제 완화, 세금 인하, 노조 개혁, 법치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을 내걸고 진행된 보수당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정권의 ‘영국병’ 수술은 노동당 간부들조차 “이제 우리 모두는 대처주의자”라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혼합경제와 복지국가 모델이 황혼을 맞이한 것도 이 무렵이었고,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이론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엉뚱하고 황당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친일과 독재 비호, 냉전수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사전적 의미를 잃어버린 바로 그 뉴라이트 개념 말이다. 1979년 영국발(發) 뉴라이트의 본래 의미는 작은 정부, 큰 시장, 법과 원칙 그리고 기업 친화와 근로의 가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벽두 대한민국에는 ‘불만의 겨울’이 현실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이뤄낸 촛불의 기세는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절망감과 패배주의가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재난과 사고가 빈발해 민심마저 뒤숭숭한 분위기다. 또다시 새해를 맞았지만 경제가 작년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보는 전망은 어디서도 찾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한 해를 구상하며 2018년 12월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내놓은 희망 메시지가 하나 있긴 하다. 이른바 ‘포용국가론’이다. 사람 중심의 경제로 모두가 함께 잘살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위가 아닌 구체적 실천 방법이다. 포용국가를 다짐하지 않은 정치지도자가 동서고금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이념 노조 기득권 대신 국민 생존권 택해야
작금의 대한민국이 ‘불만의 겨울’을 예방하려면 집권세력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당연시하고 신성시해온 세계관과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문재인 정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권력 1위’가 된 무소불위의 강성 노조부터 과감히 제압해야 한다. 영국의 대처 정권이 그랬듯이 말이다.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민노총의 나라’가 됐다. 노조가입률 10%인 나라에서 전체 노동자의 4%에 불과한 민노총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뿌리가 해방정국의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노총은 강력한 이념적·정치적 조직체다. 시장을 ‘이기려는’ 교조적 좌파와 시장을 ‘읽으려는’ 합리적 진보 사이에 문재인 정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에 따라 우리나라는 ‘불만의 겨울’을 경험할 수도, 모면할 수도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념 노조와 생존권을 찾으려는 일반 국민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는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간은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