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왜 남녀 모두를 잃었나

설익은 이미지 정치로 젠더 갈등만 점화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9-01-3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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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성평등지수 115위 vs 10위

    • 실익 없는 ‘국공립대 교수 여성 할당’ 논란

    •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정, 여성계도 반대했다

    • 화제 노리는 단발성 정책 말고 백년지대계 세워야

    지난해 연말 여러 언론은 ‘내년부터 국립대 여성 교수 비율을 25% 이상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보도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우리나라 국·공립대 여성 교수 비율은 16.8%로, 사립대(28.5%)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낮다. 양성평등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법안 발의 취지다.

    이 내용은 즉각 대학교수 임용 준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30대 후반 사회과학 분야 박사로, 수도권 한 사립대에서 연구교수로 일하는 A씨는 “그날 하루에 ‘분통 터진다’는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지 모른다”며 “대학교수를 꿈꾸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공립대 교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자기 전공 분야에 빈자리가 나기만 기다리며 10년 이상 공부한다. 그런데 이런 법을 만들어 남성의 임용 가능성을 봉쇄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한 대학원 박사과정생 B씨도 같은 의견을 냈다. 그는 “이미 교수가 된 사람들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상황에서 여교수 비율을 높이려면 신규 임용자를 여자로 채우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며 “단지 내가 젊은 남자라는 이유로 이런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항변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댓글 창에는 ‘10여 년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수 되긴 그른 거임’ ‘능력 없어도 25% 채우라고? 이게 뭔 거지 같은 발싸개야’ ‘열심히 준비 중인 남자 박사들 피눈물 날 듯’ 등 비난 댓글이 쏟아졌다.


    남자는 서럽고, 여자는 억울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2019 여성가족부 업무 보고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2019 여성가족부 업무 보고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스1]

    결론부터 말하면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은 내용의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다. 2017년 9월 오세정 당시 국민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교육공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해당 내용을 담고 있긴 했다. 그러나 국회 논의 과정에서 내용이 상당 부분 바뀌었다. 여성인 박경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별 규정을 의무조항으로 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여교수 수가 일정 비율 이상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정도로 다듬는 게 좋다”고 제언했다. 역시 여성인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 또한 “갑자기 이런 법을 만들면 열심히 공부해 교수가 되려고 한 사람들이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 법으로 규정하는 대신 대학평가 등을 통해 여교수 비율을 높이려는 취지를 살리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후 해당 법안은 국가가 전체 국립대 교원 중 특정 성별이 4분의 3을 초과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별 구성에 대한 연도별 ‘목표’ 비율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내용으로 수정돼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했다.



    당초 법안에는 각 대학의 장이 교원 임용 시 양성평등을 위해 필요한 정책을 수립·시행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평가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에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지원과 관련한 강행규정 또한 국회 논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국회 관계자는 “정부가 전국 30개 이상 국립대를 통합 관리해 여교수 비율을 점차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개별 대학이 당장 여교수를 의무적으로 뽑아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수정 법률안이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통과하면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서울 한 대학 박사 과정에 있는 여성 대학원생 C씨는 “해당 법안 내용이 보도된 뒤 남학생한테 ‘너네는 여자라서 좋겠다’는 빈정거림을 들었다. 강제성이 없는 선언적 내용에 불과하다면, 젠더 갈등이 극에 달한 이 시점에 왜 굳이 그런 법을 만든 건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얻는 것도 없이 ‘페미 세상이 됐다’는 비난만 받는 게 억울하다”는 것이다.


    젠더 갈등에 손 놓고 있는 자칭 ‘페미니스트’ 정부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해 7월 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3회 ‘양성평등주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해 7월 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3회 ‘양성평등주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며 ‘(가칭)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을 약속한 데서 출발했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이후 제정 과정에서 법안 이름과 주요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때리면 죄가 안 되고,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만 죄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여성계는 여성계대로 성평등 관점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 피해자 범위와 지원책임 등이 축소됐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퇴행적인 법으로 현재 여성계에서도 상당수가 반대한다. 그런데 마치 여성이 원해, 여성을 위해 만든 법인 양 알려져 괜히 역풍의 빌미만 제공하고 있다. 개정 교육공무원법 또한 마찬가지다. 교수 사회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이 빈 수레만 요란한 격”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 때부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등 겉으로는 성평등 정책을 펴는 듯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내용이 없다. 탁현민 행정관을 둘러싼 논란에서 여성들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라며 “최근의 젠더 갈등과 남성들의 ‘역차별’ 정서는 상당 부분 정부의 이미지 정치가 부추긴 측면이 있다”고 비판했다.

    국무총리실 산하 양성평등위원회도 지난해 1년간 출석회의를 한 차례도 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빈축을 샀다. 양성평등위원회는 양성평등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조정하는 기구로,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각 부처 장관 및 국무조정실장 등이 당연직 위원이다. 그러나 미투운동, 혜화역시위 등 젠더 이슈가 쏟아진 지난해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연말 세계경제포럼(WEF)은 ‘2018년 젠더 격차지수 보고서’에서 한국을 평가대상 149개국 중 115위에 랭크했다. 반면 지난해 9월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성불평등지수(GII)’ 결과에선 우리나라가 조사 대상 189개국 중 10위이자 아시아 1위 성평등 국가로 꼽혔다. 상반된 두 결과는 우리나라 성평등 정도에 대한 대중 인식과도 연결된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차별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은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르다. 남성들은 유년기부터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에게 밀리고, 군복무 때문에 학점 및 스펙 관리에서 또 한 번 또래 여성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이런 경험이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반면 여성들은 취업, 결혼, 출산 등의 과정에서 사회에 공고히 자리 잡은 구조적 차별을 접하고 또한 박탈감과 분노를 갖게 된다. 서로 양상은 다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현실을 개선해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려면 모병제 도입 등 좀 더 섬세하고 긴 안목의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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