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금융 인사이드

긁어 부스럼 이동걸 산은 회장의 수은 ‘통합론’

“치밀한 전략 세워도 모자랄 판에 잡음 키워”

  • 나원식 비즈니스워치 기자

    setisoul@bizwatch.co.kr

    입력2019-10-29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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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서 ‘산은·수은 합병’ 언급

    • ‘사견일 뿐 vs 청와대 사전교감설’

    • “교감 있건 없건 부적절한 발언”

    • ‘산은 지방이전 이슈 탈피 의도’ 해석도

    • 설 자리 잃은 산은의 궁여지책인가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합병을 정부에 건의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뉴스1]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합병을 정부에 건의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뉴스1]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산은과 수은의 합병을 정부에 건의해볼 생각이다. (다만) 정부와 협의된 게 아닌 사견이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최근 내놓은 이 발언이 금융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언뜻 보면 이 회장이 충분히 언급할 만한 자연스러운 발언 같지만 곱씹을수록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이상한 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이 발언은 이 회장의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나왔다. 통상 주요 기관장의 기자간담회라면 해당 기관의 현황과 향후 전략 등 공식적인 발언이 준비돼 있기 마련이다. 취재진도 당연히 그런 내용을 기대한다.

    정부와 협의 없는 사견?

    그런데 이 회장은 이 중요하고도 논란을 일으킬 게 분명한 언급을 하면서 ‘정부와 협의되지 않은 사견’이라고 전제했다. 지인들과 소모임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라는 타이틀을 건 장소에서 한 말이 사견이라는 것부터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물론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이 회장의 경우 특정 사안에 대해 ‘소신 있게’ 말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이 건을 정부에 건의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산업은행 회장으로서 정부에 의견을 내놓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다면 이 발언은 단순 사견이라고 할 수 없다. 주요 국가기관 수장의 공식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상한 점들 때문에 이 발언은 온갖 해석과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선 이 회장의 발언이 실은 정부와 어느 정도 교감이 오간 내용일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산업은행-수출입은행’ 합병과 같은 정책금융기관 기능 조정 방안은 대권주자의 입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기능을 조정하거나 조직을 합병하는 등의 사안은 정책금융의 큰 흐름을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자 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권 초부터 산업은행 민영화가 힘 있게 추진됐던 점이나 박근혜 정권 초인 2013년 정책금융공사와 산업은행이 통합된 전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정권 초부터 밀어붙여도 곳곳에서 잡음이 일어난다. 산업은행 민영화의 경우 여야의 의견이 엇갈리며 삐걱대다가 결국 다음 정권에서 중단돼 힘만 뺀 격이 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 분리됐던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통합됐다. 산업은행 회장이 툭 던진다고 해서 의미 있는 논의가 이뤄질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발언이 정부와 교감한 후 나온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까닭이다.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

    이 회장이 현 정부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대표적인 친문(친문재인) 인사로 꼽힌다. 그는 2002년 노무현 당선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 1분과 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2017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활동했다. 최근에는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후임으로 이 회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인맥도 화려하다. 현 정권에서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장하성 주중대사를 비롯해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 윤석헌 현 금융감독원장과 경기고 동문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은성수 금융위원장 등과는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이 회장의 발언이니 당연히 그의 말에 청와대의 의중이 담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국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은성수 위원장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라며 “사견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고유 핵심 기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자 이 회장은 다시 수출입은행과의 합병 가능성을 묻는 취재진에게 “은성수 위원장의 말 못 들었느냐”며 답을 회피했다. 

    이 정도면 사견으로 인정해줄 만도 한데, 금융권 안팎에서는 ‘금융 당국 패싱설’까지 돌며 여전히 믿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금융위나 기재부 등 당국과는 협의하지 않았더라도 청와대·여권과는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기자간담회에서 가볍게 말할 만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와의 교감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며 “교감이 있었든 없었든 적절한 발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당장 이를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이 회장의 발언이 실제 사견일 뿐이라 해도 문제고, 만약 청와대와 교감을 거친 뒤 나온 언급이라고 가정하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점이다. 발언의 방식이나 시기에서 모두 그렇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통합 등 정책금융 개편 문제는 완전히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능을 조정하거나 조직을 통폐합해야 한다는 지적은 그간 꾸준히 있어왔다. 예를 들어 산업은행의 경우 그간 집중해온 기업 구조조정 기능을 줄이고 중소·벤처기업 지원에 힘을 쏟는 분위기다. 정부(산업은행)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보다는 시장 중심의 구조조정이 낫다는 지적에 따라서다. 

    산업은행은 이와 함께 글로벌 진출 기업 지원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 경우 수출입 지원 분야에 특화한 수출입은행과 기능이 중복될 수 있다. 차라리 두 국책은행의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워 효율성을 높이고 해외 경쟁력을 제고하는 게 낫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충분히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방안이다.

    “어떤 기여로 낙하산 됐는지 모르나…”

    최근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서 내놓은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남주하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정책금융 혁신과 체계 개편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주요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정책금융의 규모가 과도해 정책금융의 혁신이 시급하다”며 “중복 기능이 많은 정책금융기관을 통합하는 등 정책금융의 혁신과 체계 개편을 통한 효율성 제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전 금융감독원장)이 통합정책금융지주회사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지주사 밑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정책금융기관을 넣는 구조조정 방안이다. 

    이처럼 이 이슈는 민감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논의해야 하는 주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회장이 툭 던지는 방식으로 언급한 바람에 ‘괜한 논란만 일으키는 이야기’가 돼버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논의를 수면으로 끌어올리기보다는 되레 불필요한 논의로 만들어버린 꼴이 됐다는 지적이다. 

    정책금융기관들의 기능 조정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기능 중복으로 인한 통폐합 필요성이 가장 많이 거론된 조직은 사실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다. 또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통합 이야기도 때마다 있어왔다. 단순히 두 국책은행의 통합만이 아니라 큰 틀의 밑그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더욱이 두 국책은행의 통합 문제에는 부처 간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 산업은행을 관할하는 부처는 금융위다. 수출입은행의 경우 기획재정부가 담당하고 있다. 두 기관을 합쳐 한쪽으로 몰아줄 경우 둘 중 한 부처의 기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 이슈는 부처의 입장까지 조율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정말 정책금융 개편 방안을 추진하려면 사전 연구와 여론 형성, 이해관계자들의 협의 등 치밀한 전략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잡음만 일으킨 격”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번 발언이 수출입은행장이 공석일 때 나왔다는 점에서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버젓이 국책은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기관을 상대로 한 발언인데, 수장이 없을 때 ‘기습’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출입은행 노동조합은 즉각 반발했다. 노조는 “현 정권에 어떤 기여를 해 낙하산이 됐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정책금융 역할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 이 회장을 비난했다. 노조는 그러면서 “수은 행장의 공석 기간을 틈타 ‘수은 부지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다’라는 발언으로 타 국책금융기관을 비하하고 흔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성수 위원장이 ‘의미 없다’며 단번에 일축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은 위원장은 전 수출입은행장이었다. 본인이 몸담고 있던 기관을 흔드는데 반겼을 리 없다.

    행장이 아닌 회장인 이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4월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4월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이 회장이 이런 발언을 한 이유를 전혀 다른 이슈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통합론’으로 논란을 일으켜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산업은행 등 금융 공기업 지방 이전 이슈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아니냐는 해석이다. 

    여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공공기관 추가 이전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당연히 표심을 잡기 위해서다. 이전 대상으로 산업은행을 비롯해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만약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통합 이슈가 논쟁거리로 확산될 경우 지방 이전 논의는 뒤편으로 밀릴 수 있다. 

    실제 이 회장은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국책은행의 지방 이전 방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산은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할 시점에 지방 이전은 쓸데없는 논의”라며 “(지방이전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고 강조했다.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산업은행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방안이라는 해석도 있다. 금융권에선 이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잖다. 

    그간 산업은행의 핵심 기능은 기업 구조조정 업무였다. 이 회장은 관련 업무를 장기적으로 시장에 넘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핵심 업무를 시장에 넘기겠다는 복안을 내놓은 셈이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제 산업은행과 같은 개발은행의 필요성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가 왔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남주하 교수 역시 보고서에서 “정책금융은 경제성장 또는 산업화 과정에서 민간 금융시장이 미발달된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장 중심의 체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한국에서는 점차 개발은행이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무튼 이 회장의 이번 발언은 여러모로 실축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 보인다. 의도가 없는 사견이었든, 사전 교감을 통한 의도 있는 발언이었든 간에 말이다. 산업은행은 우리나라 정책금융기관의 맏형으로 불린다. 산업은행의 수장을 ‘행장’이 아닌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무게감을 실어주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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