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명작의 비밀

베일 벗은 투탕카멘의 진짜 사인

누이와의 근친혼 ‘소년 왕’을 죽이다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19-11-07 14:04:2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소년 파라오(왕) 투탕카멘. 그는 왜 어린 나이에 죽어야 했을까. 의문은 1922년 무덤 발굴 당시부터 제기됐다. 그의 무덤은 다른 파라오 무덤에 비해 너무 작은 데다 서둘러 축조한 흔적이 역력했다. 갑작스레 죽임을 당해 불명예스럽게 매장된 것이 아닐까. X선 촬영, 컴퓨터단층촬영, DNA 분석 등 다양한 조사가 이어졌다. 사인 분석은 최근 들어 놀라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근친혼으로 인한 치명적 유전적 결함! 우리는 3300년 전 소년 파라오의 죽음에 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것일까.
    [GettyImage]

    [GettyImage]

    이집트 나일강 중류 룩소르 서쪽 교외지역에 위치한 왕들의 계곡. 고대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1922년 11월 4일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인부들은 비밀의 문으로 통하는 16개의 돌계단을 발견했다. 1914년부터 왕들의 계곡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니 벌써 9년째였다. 카터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곧바로 발굴 후원자인 런던의 카나번 백작에게 ‘놀라운 발견’이라는 짧은 전보를 보냈다. 카나번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 

    11월 26일 카나번이 도착하자, 첫 번째 문을 열었다. 어두운 회랑을 가로 막고 있던 대리석 돌문을 열자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 두 번째 문 앞은 돌로 채워져 있었다. 돌을 치우기 시작하자 투탕카멘이란 이름이 드러났다. 카터는 몇 개의 돌을 더 제거한 뒤 촛불을 들고 돌문을 열었다. 안에서 뜨거운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왔고 들고 있던 촛불이 흔들렸다. 뒤에 있던 카나번이 카터에게 물었다. 

    “뭐가 보입니까?” 

    카터의 짤막한 대답. 

    “예, 대단합니다. 호화로운 유물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습니다.”



    세기의 발굴

    발굴은 1924년까지 이어졌다. 황금 관과 황금 마스크가 화려하고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4년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일 것이다. 화려한 황금 마스크의 주인공인 투탕카멘. 그는 이집트 제18왕조의 12대 파라오(왕)였다. 그가 태어난 시기와 왕에 즉위한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왕위 즉위 연대는 대략 기원전 135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9세 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무덤을 발굴해보니 투탕카멘은 겹겹의 관 속에 황금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미라 상태로 누워 있었다. 무덤에서는 34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희대의 파라오 무덤 발굴 소식은 전 세계로 보도됐고, 그해 12월부터 왕들의 계곡으로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이집트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다. 해외 관광객을 위해 크루즈 관광과 연계한 룩소르 여행 상품이 출시됐다. 1930년대엔 투탕카멘 관련 영화도 제작됐다. 1932년작 ‘미라’, 1939년작 ‘우리는 미라를 원한다’ 등. 

    이집트는 1968년 투탕카멘의 미라를 X선 촬영했다. 그 결과, 두개골 뒤쪽이 손상됐음을 확인했다. 두개골 뒤쪽의 위편에서 작은 뼛조각이 나타났고 아래편에선 핏덩어리가 보였다. 모두들 뼛조각과 핏덩어리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머리 뒤쪽을 강하게 가격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투탕카멘 죽음의 비밀이 대중을 매혹하기 시작했다. “타살이야말로 진정한 파라오의 저주 아닌가”라는 말도 나왔다.

    투탕카멘 마케팅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이집트는 투탕카멘 무덤 출토 유물을 해외에 내보내기로 했다. 투탕카멘 유물들이 장사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1972년 투탕카멘 유물 다수를 영국 런던의 브리티시뮤지엄(일명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명분은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무덤 발굴 50주년 기념이었다. 1976, 1977년엔 미국 순회전을 열었다. 명분은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이었다. 영국에서는 6개월간 170만 명, 미국에서는 2년 동안 800만 명이 몰렸다. 전시가 열리는 도시에서는 각종 기념상품이 불티나게 팔렸고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은 인기 문화 상품으로 부각됐다. 

    투탕카멘 전시는 프랑스, 일본, 캐나다, 독일 등 세계 곳곳에서 계속됐다. 복제품만으로 열리는 전시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2011년엔 한국에서도 복제품 1300여 점으로 투탕카멘 황금유물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1968년 X선 촬영 이후, 투탕카멘의 사인(死因)에 관한 특별한 진척 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2002년 7월, 미국의 베테랑 수사관 2명이 투탕카멘 타살설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2명의 수사관은 당시 연방수사국(FBI) 수사관 그레그 쿠퍼와 유타주 경찰국 범죄분석관 마이크 킹이었다. 이들은 투탕카멘 무덤 사진, 미라 두개골의 X선 촬영 자료, 각종 관련 자료 등을 종합 분석해 치명적인 가격에 의해 투탕카멘이 숨졌다고 보았다. 쿠퍼와 킹은 왕의 자리를 노리는 주변 인물 네 명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총리인 ‘야’, 회계 담당자인 ‘마야’, 군사령관인 ‘호렘헵’, 왕비인 ‘안케세나멘’이었다. 쿠퍼와 킹은 총리 야를 가장 강력한 용의자로 꼽았다. 왕비를 탐하기 위해 투탕카멘을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무덤 벽화 속에 그려진 결혼반지에 왕비 안케세나멘과 총리 야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다는 점, 과부가 된 한 이집트 왕비가 ‘신하와 결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히타이트 왕에게 보낸 일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여기서 편지를 보낸 왕비가 안케세나멘이고 신하는 총리 야라고 보았다. 왕비는 평소 남자를 좋아했으며 결국 총리가 왕비를 차지하기 위해 왕을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투탕카멘이 죽고 난 뒤 총리 야가 실제로 권력을 잡았고 결국 왕비와 결혼까지 했다는 점에서 야가 틀림없이 범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쿠퍼와 킹의 타살론에 고고학자들은 “그 추론은 그저 상상의 산물일 따름”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타살인가 자연사인가

    컴퓨터단층촬영(CT)을 기반으로 복원한 투탕카멘 왕의 모형. [ⓒAtelier Daynes Paris]

    컴퓨터단층촬영(CT)을 기반으로 복원한 투탕카멘 왕의 모형. [ⓒAtelier Daynes Paris]

    2005년 이집트는 무덤 현장에서 미라에 대한 컴퓨터단층촬영(CT)을 실시했다. 죽음의 비밀 등을 밝혀내기 위한 새롭고 과학적인 시도였다. 이집트, 프랑스, 미국의 이집트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은 컴퓨터단층촬영한 1700여 장의 사진을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투탕카멘은 167㎝의 키에 둥근 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이나 영양실조 모습은 없었다. 다만 사망하기 하루 이틀 전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왼쪽 무릎 골절을 확인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무릎 골절 이후 말라리아 감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컴퓨터단층촬영에 기초한 분석은 타살론을 뒤집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연구진은 “두개골 뒤쪽의 상처는 미라 발견 당시 얼굴에서 황금가면을 뜯어내다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사망한 나이도 19세로 보았다. 그때까지 투탕카멘은 18세에 숨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연구진은 이 데이터를 토대로 컴퓨터 3차원 그래픽 기법을 통해 투탕카멘의 얼굴을 복원해 공개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투탕카멘의 얼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황금 마스크와 비슷한 미소년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집트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두개골 뒤쪽의 손상 부위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투탕카멘이 사망한 직후 시신을 미라로 만들면서 방부제 용액을 주입하기 위해 뚫은 구멍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2007년 일군의 과학자들은 투탕카멘이 달리는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투탕카멘 미라 조사는 2010년대 들어 더욱 과감해졌다. 2010년 이집트 연구진은 컴퓨터 단층촬영뿐만 아니라 DNA 분석을 추가했다. 이집트 왕들의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미라의 유전자를 조사해 서로 비교 분석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다국적 연구팀들은 지속적으로 조사 분석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투탕카멘의 새로운 면모가 속속 드러났다.

    근친혼 가족사, 비극적 죽음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직후 모습. [©The Griffith Institute]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직후 모습. [©The Griffith Institute]

    우선, 유전적 질환이 다수 발견됐다. 투탕카멘은 왼쪽 발 내반족(內反足) 질환을 앓았다. 이것은 발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유전적 질병이다. 투탕카멘은 내반족 때문에 심하게 절뚝거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투탕카멘은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무덤에서 100여 개의 지팡이가 발굴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내반족 질환이 있으면, 발목뼈에 일시적으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골세포가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골괴사증이다. 이것이 투탕카멘 사인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오른쪽 다리는 뼈 질환을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투탕카멘이 전차 경주를 즐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투탕카멘은 또 겸상적혈구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이 투탕카멘의 발 뼈를 자세히 조사해본 결과,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일그러지는 유전병인 겸상적혈구병을 앓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유전적인 혈액 질환의 하나인 겸상적혈구병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전차 낙상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 골절로 인한 사망 가능성, 말라리아 감염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모두 뒤집어버리는 결과였다. 

    투탕카멘의 골반은 남성의 골반이 아니라 여성의 골반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구강 구조상 언청이였을 가능성도 드러났다. 선천성 기형으로 입천장이 갈라져 말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투탕카멘 출생의 비밀도 밝혀졌다. DNA 분석 결과, 투탕카멘은 아크나톤(이집트 제18왕조 10대 파라오)과 그의 다섯 누이 중 한 명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즉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또한 투탕카멘 무덤에서 나온 태아 미라 2구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투탕카멘의 유전자와 일치했다. 이들은 투탕카멘의 쌍둥이 아들이었다. 투탕카멘은 12세에 그의 이복 누나 안케세나멘과 결혼했고 후사 없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이 같은 기존 통설 또한 뒤집혔다. 

    내반족 기형, 겸상적혈구 질환, 여성의 골반, 유전적 언청이…. 투탕카멘은 왜 이런 증상을 갖게 됐을까. 그저 우연일 뿐인가.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러한 질환들은 모두 근친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근친혼으로 태어나다 보니 유전적인 결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이 같은 무서운 질환이 생겼다는 것이다. 호르몬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신체장애. 끔찍한 일이다. 소년 파라오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유전적 신체장애를 이기지 못하고 투탕카멘은 결국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쳐야 했다.

    투탕카멘 유물의 수난사

    2011년 1월 29일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국립박물관에서 한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다. 앞서 이집트 문화재위원회는 “박물관에 침입해 유물을 훔치려 한 범인 9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뉴시스]

    2011년 1월 29일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국립박물관에서 한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다. 앞서 이집트 문화재위원회는 “박물관에 침입해 유물을 훔치려 한 범인 9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뉴시스]

    1922~1924년 투탕카멘 무덤 발굴 당시 일부 유물이 외부로 반출됐다는 의혹이 있었다. 구체적인 물증이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유물의 무단 반출 가능성에 대해선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으로 유물 일부가 들어갔고, 영국에도 일부 건너갔다고 한다. 다행스럽게 이집트로 돌아온 것도 있지만 일부는 지금도 여기저기 떠돌고 있을 것이고 더러는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 

    1996년 9월 어느 날 오전, 이집트 국립박물관에서 20대 청년이 투탕카멘의 황금 보검을 양말 속에 감추어 나오다 현관에서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전날 관람객으로 가장해 박물관에 들어간 뒤 전시대 밑에 숨어 있었다. 밤이 되자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전시실 진열장으로 다가가 드라이버로 투탕카멘 보물 진열장 유리 뚜껑을 열어 황금 보검을 양말 속에 넣었다. 크기가 작은 유물 20여 점은 나중에 찾아갈 생각으로 화장실에 숨겨 놓았다. 그런데 경찰에 붙잡힌 범인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박물관은 일단 폐장하고 나면 간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물건을 훔치기에 너무 편하다. 가정집을 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이번 실패는 아마도 파라오의 저주 때문인 것 같다.” 

    201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이라는 시위 상황을 틈타 이집트국립박물관에 사람들이 침입했다. 이들은 유리 진열장을 부수고 유물들을 훼손했다. 조각품이 도난당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집트 국립박물관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일까. 2014년엔 이집트 국립박물관 직원이 전시 유물을 청소하다 황금 마스크를 떨어뜨려 턱수염이 부러졌다. 박물관 직원들은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자기들끼리 에폭시 접착제로 수염을 다시 붙였다. 에폭시 접착제는 공업용 접착제(본드)와 비슷하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본드로 붙이다니,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접착제가 마스크 얼굴에 떨어져 주걱으로 접착제를 긁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 긁힌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다. 투탕카멘의 출생과 죽음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데, 이집트 국립박물관에선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투탕카멘

    2022년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 100주년이다. 이집트는 이를 미리 기념하기 위해 2018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파리 등 세계 10대 도시 순회전을 시작했다. 개별 전시회마다 출품 유물이 다소 다르지만, 최고급 유물이 수십 점씩 포함된다고 한다. 

    2020년 말엔 카이로 기자 지구에 이집트 대박물관(The Grand Museum of Egypt)이 들어선다. 투탕카멘 무덤 출토 유물 상당수는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옮겨진다. 미라를 넣었던 황금관은 지난 7월부터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8개월에 걸쳐 보존 처리가 진행되면 황금관은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된다. 이집트 대박물관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0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 전시할 계획이다. 그 엄청난 유물 가운데 두드러진 주인공은 단연 투탕카멘이다. 이 박물관에서 소년 파라오는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투탕카멘 가족사의 내력을 거론할 것이다. 두드러진 화제는 근친혼, 근친상간이리라.
     
    아직 투탕카멘 죽음의 실체를 100% 밝혀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고고학자와 과학자들의 노력은 집요하게 계속될 것이다. 내밀한 가족사와 비극적인 죽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너무 들여다보는 건 아닌지. 이제 그만 그를 놓아줘야 하는 것 아닌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밀과 내력을 들여다보고픈 욕망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소년 파라오를 탐할 것이다. 우리는 3300여 년 전 소년 파라오에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컴퓨터 3차원 그래픽으로 되살려놓은 투탕카멘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눈망울이 슬프게 다가온다, 그는 과연 영면에 들 수 있을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한국의 국보’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