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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김재규의 ‘윤필용 감청작전’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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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金 “선배 대접하라” vs 尹 “경력도 하찮은 게…”
  • ● 통신보안 위장해 통화 녹음…참모에 발각
  • ● 보안부대 20여 명 수경사 진격 준비…일촉즉발
  • ● 金, 쫓겨난 뒤 원한 쌓여…10·26으로 폭발
창군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육군 내부에는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었다. 이북 출신이 다수를 점했다. 정일권 장군이 주도하는 함경도 출신과 장도영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출신이 군을 양분했고,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과 그 밖에 호남 출신 등은 약세였다. 그러나 1963년부터 이북 출신 세력이 줄어들면서 힘의 공백 상태가 생긴다.
1961년 5·16군사정변엔 군내 3대 파벌이 다 같이 동참했으나 경상도 출신과 평안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63년 들어 윤필용 장군 등 일부 현역은 군으로 복귀했지만, 많은 현역이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런데 제3공화국 정권 창출 과정에서 파벌 간 갈등이 표출되고,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 혁명 주체세력들의 새로운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면서 이북 출신 고급 장교들이 대거 축출됐다. 1963년 3월 11일 김동하, 박임항 등 함경도 출신들이 주도한 쿠데타와 같은 해 7월 3일 장도영 등 평안도 출신이 주축이 된 쿠데타 모의가 적발된 것이다.
이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경상도 출신과 호남 출신 인사들이 주도권을 장악해 군내 파벌이 종식되고 정국이 안정됐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정국이 다소 불안정했으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후 수년간 정국은 안정됐다. 박정희는 호남 출신 장군을 많이 등용했고, 호남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1. 요동치는 권력구조

1965년 한일수교 이후 1968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은 견고했고,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 중 그로부터 가장 확고한 신임을 받은 사람은 방첩부대장 윤필용(1927~2010) 장군이었다. 육사 8기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이던 그는 1963년 민정이양 때 군으로 복귀해 서울지구 506보안부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1965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동시에 방첩부대장으로 보직돼 1968년까지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간첩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한다. 1·21사태 이후 윤필용 장군이 김신조 일당을 데리고 TV 방송에 출연한 것을 본 박 대통령은 윤 방첩대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김재규(1926~1980) 6군단장을 앉혔다. 결국 1·21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윤필용, 가장 큰 수혜자는 김재규였다.
1963년 윤필용 비서실장이 군으로 복귀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던 이후락(1924~2009)이 1969년까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경호실장은 박종규(1930~1985)가 맡았다. 중앙정보부장에는 1963년 김재춘 장군이 물러나고 혁명 동지인 육사 8기 출신 김형욱 부장이 1969년까지 근무했고, 1970년 이후락, 1976년엔 김재규가 보직돼 박 대통령을 보필했다(표 참조).
이들 중 윤필용과 이후락은 최고회의 당시 비서실장 전·후임자이면서도 서로 불편한 관계였다. 최고회의 전·후임 공보실장인 이후락과 신범식의 관계가 나빴던 것과 비슷하다. 박종규와 이후락도 평소 경쟁관계였는데, 박 실장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원했기에 두 사람은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다. 



‘보안사령부’ 격상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과 사이가 안 좋던 이후락 비서실장을 일본 대사로 좌천시키고, 그 후임에 김정렴 씨를 임명해 1978년까지 장기 근속시켰다. 박종규 경호실장, 김형욱 중정부장,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을 보필하며 3선 개헌을 했다. 1971년 ‘윤필용 장군 감청사건’ 이후 김재규 보안사령관 후임으로 강창성 장군이 보직됐고, 1973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사건’으로 진종채 장군이 수도경비사령관이 됐다가 1975년 보안사령관에 보직됐다. 1979년에는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됐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됐다. 1973년 윤 장군 사건에 연루된 이후락 부장은 그해 말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물러나고, 신직수 부장에 이어 1976년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1979년 10·26 사태로 이듬해 형장의 이슬이 됐다. 1980년에는 전두환이 중정부장을 겸하게 된다.
1968년 윤필용의 후임으로 방첩부대장에 부임한 김재규는 부대 명칭을 ‘육군보안사령부’로 고치고, 부대장을 군단급 중장이 지휘하는 부대로 격상시켜 취임 3년 후인 1971년에는 윤필용보다 더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다. 김재규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박 대통령과 동향이고,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박 대통령과 동기이지만, 나이는 아홉 살 어렸다. 자존심과 명예욕, 정치적 욕망이 강했는데, 군내 최고 권력기관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자 안하무인이 되어 강력한 파워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방첩부대장직을 떠난 윤필용 장군은 20사단장과 주월 맹호사단장을 마치고 1970년 귀국해 수경사령관에 보직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측근으로 돌아왔다. 1971년에는 1963년부터 중정부장을 한 김형욱이 해임되고 후임에 주일대사 이후락이 임명된다. 따라서 1971년엔 김정렴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 이후락 중정부장, 김재규 보안사령관,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는 시대가 열렸다.





2. ‘필동사령관’을 견제하라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경북대 농대 중등교원 양성과정을 수료한 경력을 과대 포장했다. 그는 경북대 사범대 전신인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학교 후배’라고 하면서 의욕을 보였다. 김재규는 윤필용 장군이 귀국하자 잔뜩 경계하면서 그가 어떤 보직을 받게 될 것인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게 된 연유는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김재규가 윤필용보다 한 살 많지만 둘은 친구 사이였다. 육사 기수로 따지면 김재규는 2기, 윤필용은 8기라 김재규는 “군대 선배이고 계급도 중장으로 한 계급 높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이었고, 윤필용은 “그간 쌓은 경력과 품격이 김재규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김재규를 무시하는 편이었다. ‘선배 대접’을 제대로 안 한 것이다. 두 장군 사이가 나빠지자 김재규와 윤필용을 따르는 장교들 간에도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함께 근무한 장교들의 면면은 이렇다. 육사 11기 김복동 대령이 비서실장으로 근무했고, 최성택 대령이 감사실장, 하나회 회원이던 육사 18기 김재창 대위와 박흥주 대위가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보안사령부 장교들 사이에는 “윤필용이 월남에서 3선 개헌을 반대해 조기 귀국했고 이로 인해 박 대통령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곧 군복을 벗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반면 윤필용 측근 장교들은 “윤 장군은 박 대통령이 7사단 근무 당시 군수 참모와 최고회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군으로 복귀한 후 방첩부대장과 주월 맹호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신임은 변함없다”고 주장했다. “3선 개헌을 반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차후 요직으로 갈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윤필용이 대통령을 경호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수경사령관에 보직되자 청와대 김시진 민정수석을 포함한 비서들의 수경사 방문이 이어졌다. 지방에 근무하는 장성들도 서울에 오면 윤 사령관에게 인사를 하러 갔고, 윤필용보다 상위직에 있는 육군 주요 인사들도 서울 필동 소재 수경사를 찾았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청와대 방문 전후에 윤필용에게 간다는 보고를 받은 김재규가 이를 예의주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군인뿐만 아니라 일부 민간인들도 수경사를 방문하자 ‘지원금을 주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고, 김재규는 윤필용에 대한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를 하도록 지시했다. 여기까지는 보안사령관 고유 권한에 속했다. 문제가 발견되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였다. 따라서 필자를 포함한 보안반에서는 자연스럽게 시간별 동향보고를 하고 있었다. 


파워게임 시작되다

흥미로운 점은 윤필용이 수경사령관에 부임한 후, 전국에 흩어져 근무하던 윤필용 계열의 우수 장교들이 대거 수경사로 전입된 사실이다. 당시 육군본부는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은 수경사에 일종의 특혜를 주고 있었는데, 수경사로 장교 전입 요청을 하면 우선적으로  차출해 발령을 내줬다. 따라서 수경사로 전입한 우수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대통령을 경비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윤필용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부대 사기가 충천했다.
수경사 일부 장교들은 “수경사가 대통령 신변을 지키는 부대이고 충성심도 더 강한데, 보안부대가 감시를 하고 동향보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보안사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배타적으로 나왔다. 특히 서울 경복궁 소재 수경사 30대대의 경우 ‘경호임무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보안반의 부대 출입을 막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안사에서는 수경사가 보안부대원 출입을 못마땅해할수록 예의관찰하며 강력히 대응하라고 지시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71년 6월 김재규-윤필용 간 본격적인 파워게임이 시작된다.



3. 감청사건과 김재규 좌천

원래 수도권 대전복 부대(쿠데타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부대) 지휘관은 일일 동향보고를 하게 돼 있지만,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는 특별하게 동향을 감시할 필요가 있을 때 실시했다. 통신 감청은 특정인에 대해 범죄혐의가 적발됐을 경우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윤필용 수경사령관에 대해 시간별 동향보고를 지시했다. 며칠 뒤 515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 2명을 투입해 윤필용의 전화를 감청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지시는 윤필용을 군에서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절대 보안이 유지돼야 하고, 실패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따르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필자가 가장 걱정한 것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는지 여부였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수경사령관에 대한 감청을 할 경우 사전에 대통령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다. 수경사의 경우 비밀리에 감청할 수 없는 여건이라 탄로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될 것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필자는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에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과 참모장 강성탑 준장(육사 8기, 손영길 대령 전임), 그리고 통신참모에게 “보안사에서 전군을 대상으로 통신보안 점검을 실시하게 돼 수경사령부에서도 당분간 보안점검을 실시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보안부대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보안업무”라고 통보했다. 이에 대해 모두들 ‘불쾌하다’며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필자는 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에게 사령부 건물 교환대 뒷벽에 붙어 있는 단자판에서 통신보안 점검활동을 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지하 맨홀에 들어가 윤필용 장군의 전화선을 찾았다. 통화를 하면 자동으로 녹음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감청요원으로부터 “최선을 다했지만 맨홀에 설치된 수백 개의 전화선 뭉치에서 윤 장군의 전화선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필자는 감청요원에게 “종전처럼 통신실 단자판에서 윤 장군 전화를 감청하되, 수경사 요원들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뒤 수경사 통신참모에게는 “일반적인 통신보안 점검이니 모른 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부터 열흘 정도 윤 장군 전화에 녹음기를 연결하고, 통화 내용을 24시간 녹음한 후 녹취록을 보안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반 부대에서는 이렇게 감청하지만, 윤 장군을 감청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라서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러던 중 한 감청요원이 수경사 통신참모가 단자판실에 자주 들어와 본다고 전했다. 결국 통신참모가 윤 장군에게 “보안사령부에서 사령관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여관으로 사무실 옮겨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니 통신감청요원 2명이 수경사 제5헌병대대 구치소에 구속됐고, 녹음장비와 그간 윤 장군의 전화를 감청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필자가 제5헌병대대장 지성환 중령을 찾아가 “근무 중인 보안부대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니 구속한 병사와 장비를 즉각 돌려달라. 보안사령부의 기본 업무를 방해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두 명의 병사와 장비를 돌려주면 감청업무를 중단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현행범을 구속한 것이니 법적으로 하자가 없고 이는 윤필용 사령관의 지시”라고 했다. 그는 필자에게 “당신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완강하게 나왔다.    
잠시 후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이 “사령관 지시로 수경사령부에 파견된 보안반 사무실을 폐쇄하니 보안부대원 전원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직속상관인 중구팀장 김형노 소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김 소령으로부터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정봉화 소령은 “절충안을 찾아보자. 이런 사태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말자”며 대안을 내놓았다.
보안반을 잠시 수경사령부 앞 ‘경화장 여관’으로 옮기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수경사령부에서 볼 때는 보안부대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한 것이고, 보안사령부에서 볼 때는 부대원이 수경사령부에 계속 출입은 하니 철수한 것은 아닌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전 반원이 이 조치를 따랐다.
다음 날 우리는 보안반 사무실을 경화장으로 옮기고, 전과 같이 부대 출입을 하면서 근무했다. 하지만 보안반을 여관으로 옮긴 것을 본부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는데도 김재규와 윤필용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청와대 분위기는 윤 장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정봉화 비서실장이 수경사령관에게 보안반 원대복귀를 건의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5헌병대대에 구속된 두 병사를 석방시키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짧은 기일 안에 수경사령관이 다시 보안반을 영내로 들어오게 할 리 없다는 판단이 서자 김형노 소령은 “우리는 파국을 막고 사태가 호전될 것을 예상하고 경화장 여관으로 잠시 옮겨왔으나 상황이 오래갈 것 같으니 본부에 보고하고 철수하자”고 했다.



고래 싸움의 끝

경화장에서 철수하고 서울 소공동 소재 506보안부대 본부로 들어갔다. 부대장 조현수 대령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우리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줬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지하 감방에 감금됐고,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는 김형노 소령에 대해 지휘책임을 물어 파면을 결정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김 소령은 억울하게 처벌을 받았다.
필자에게는 ‘불문’ 결정을 내리고,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보안반 전원을 데리고 다시 수경사 영내로 쳐들어가라는 것, 그리고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라는 것이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필자는 506보안부대 소속 병사 20여 명에게 전투복에 총기를 지급하고 군용 트럭에 탑승시킨 후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서 필동 소재 수경사령부로 진격 출동 준비를 했다. 명령에 따라 무작정 수경사로 돌진하겠다는 각오였다.
우리가 쳐들어간다고 수경사에서 우리를 받아줄 리 없는데 이렇게 하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어 난감했다. 그때 조현수 부대장이 “부대원 모두를 하차시키고 보안사에 가서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의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보안사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은 필자에게 “육본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장군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고소인 조서까지 작성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바로 삼각지 소재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 장군을 고소하고 고소인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육군 중위가 육군 소장을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소인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 3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때 육군본부 검찰관들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3군단장으로 발령났으니 조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령부 보안처장의 지시를 받아 고소를 취하한 후 506보안부대로 돌아왔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자 윤필용은 폐쇄한 수경사 보안반 사무실을 원위치시키라고 지시했고, 필자와 보안부대원들은 다시 수경사에 들어가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팀장 김형노 소령은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처분을 받고 군을 떠났다. 두 장군의 고래 싸움에 훌륭한 영관 장교 한 명이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후일에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위로가 됐다.
결론적으로 윤필용 감청사건은 윤필용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 핵심 간 시기·질투와 세력 다툼일 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무모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의 3군단장 좌천으로 종결됐지만 김재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내부 관계자들은 김재규가 ‘윤필용 장군과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누구도 이를 챙기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하긴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후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 앉힐 줄을. 그리고 그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박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할 줄을.  
김재규 보안사령관 후임으로는 육사 8기 중 선두주자로 명석하다고 소문난 강창성 장군이 부임했다. 강 장군은 경기도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에 오래 근무했고, 우수한 장군으로 인정받던 실력자였다. 그가 청와대 주변 권력기관장으로 부각되자, 표면적으로는 보안사령부와 수경사령부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필용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난 셈이었다. 또 다른 파워게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불거진 것이다.

4. 강창성의 등장과 10월 유신

중앙정보부 출신 육사 8기 강창성 소장이 보안사령관에 보직되자 보안사 내 김재규 장군 계열 장교들은 축출됐다. 대신 이북 출신의 일반 장교들을 대거 영입해 주요 보직에 앉혔다. 1961년 5·16 당시 군은 물론 혁명 주체세력의 대부분이 이북 출신이었지만, 1963년 두 번의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이 제거되자 영남과 호남 출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때 이북 출신의 대부는 황해도 출신 육사 8기 김형욱 중정부장이었지만 경기도 출신 강창성 장군도 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 보안사에는 강창성 장군 계열의 이북 출신 장교들이 대거 영입돼 주류를 이뤘다. 그중 주요 인사는 참모장인 이북 출신의 육사 9기 김귀수 장군과 보안처장 김종진 대령이었다. 수경사 보안반장에는 참모장과 가까운 갑종 출신 안수덕 소령이 보직된다.
강창성 사령관은 1972년 3월부터 10월유신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과 세력을 구축했다. 당시 필자는 수경사 보안반에서 차출돼 506서울지역 보안부대 정보계장이면서 계엄사령부 일을 함께 맡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10월 유신을 주도하는 강창성 보안사령관과 서울지구계엄사령관이 된 윤필용 장군 사이에 또 다른 파워게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일 업무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누구에게 먼저 보고하느냐’ 하는 문제로 민감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별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 보고 우선순위를 놓고 민감했기에 우리는 신경을 써서 동시에 보고했다. 과연 윤필용과 강창성 중 누가 더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느냐가 관심거리였는데, 당시 보안사령부에는 강창성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보다 대통령의 신임을 더 받고 있다고 보는 장교가 더 많았다. 1972년의 청와대 주변 권력구조는 김정렴 비서실장-박종규 경호실장-이후락 중정부장-강창성 보안사령관-윤필용 수경사령관으로 재편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는 과업을 완수한 뒤 물러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적합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서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면 경제발전은 어렵게 되고 사회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은 다소간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통치철학도 확고했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따라 10월 유신은 1972년 4월부터 본격화했다. 정치적으로는 김홍일 당시 신민당 총재와 김상현 의원 등 40여 명의 야당 정치인 동향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검거와 가택 연금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10월 유신이 실행되자 50여 명의 대원으로 하여금 정치인과 야당 국회의원을 연금한 후 김상현 의원이 10월 유신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회유하는 공작을 맡았지만 실패했다. 특히 김상현 의원에 대해서는 강창성 사령관이 10월 유신에 참여할 것을 직접 종용했으나 김 의원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서빙고(보안사 분실)에 구속됐다.  


‘필동 육군본부’

10월 유신이 성공리에 끝나자 필자는 다시 수경사 보안반으로 발령이 났다. 보안반에 돌아와 보니 상황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안수덕 소령이 김귀수 보안사 참모장에게 수시로 구두보고를 했다. 윤필용 장군에게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감청사건 때와 흡사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파워는 10월 유신 후 훨씬 강해졌다. 10월 유신 때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직을 성공리에 마쳤고 박 대통령의 전속부관이던 손영길 대령이 수경사 참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대통령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보였다.
당시 수경사령부는 일명 ‘필동 육군본부’로 불렸다. ‘필동에 육군 참모총장 못지않은 파워를 가진 윤필용 장군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 좋지 못한 별명이었는데, 이게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군 장성들이 윤 장군에게 문안 인사를 오기도 했고, 윤 장군은 일반인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들 중에는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 김연준 한양대 총장 등도 있었다.
강창성 사령관은 임무상 윤필용 장군의 이러한 동향을 예의주시한 뒤 경호실장과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보고를 받은 박종규 경호실장과 박 대통령은 분명히 심기가 불편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자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10월 유신 2개월 후인 1973년 1월 1일 육사 11기 선두주자들의 장성 진급이 있었고, 다시 2개월이 지난 1973년 3월 8일에 결국 윤필용 장군 사건이 터졌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을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71년 김재규가 윤필용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감청사건은 1973년 3월 윤필용 장군 구속 사건과 원인이 같다. 따라서 감청사건은 윤필용 사건의 전초전이고, 더 나아가 1979년 10·26사태에 원인(遠因)을 제공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5. 10·26 사태의 발단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난 김재규는 강원도 최전방 3군단장으로 좌천돼 엄청난 모욕감과 분노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 선배인 육군 중장이 소장을 못 이기고 물러났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에게도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내가 당신과 동향이고, 군 동기로서 당신의 국가 통치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버릇없는 윤필용을 혼내주려고 한 일 때문에 나를 이렇게 강원도 산골로 귀양살이를 보낼 수 있느냐’는 불평과 불만을 가질 만했다. 3군단장을 끝으로 군을 떠난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배려로 호남비료 사장, 유정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을 역임한 후 1976년 12월 대통령의 최측근 권력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왔으나, 이 사건으로 인한 원한은 뼛속 깊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김재규에 대한 장교들의 여론은 ‘자존심이 강하고 섬세하지 못해 정보업무를 다루기에 부족하며 즉흥적,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차분하지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박 대통령도 당연히 이러한 여론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인재가 없었다. 1973년 윤필용 장군과 손영길 장군의 ‘쿠데타 모의 음모 사건’ 때문에 이후락 중정부장을 포함한 3명의 ‘충신’을 잃었고,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도 떠났다. 그리고 이 사건 당시 군내 우수 장교 30여 명과 중앙정보부에서 30여 명의 우수 인재를 정리했기 때문에 중정부장으로 등용할 사람도 마땅찮았다. 따라서 당시 핵심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부득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봤다.



惡貨의 良貨 구축

10·26사태는 대한민국 현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권력기관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재규는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욕과 정치적 욕망, 질투심이 강해 권력 주변에 두기에는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치적 욕망이 강한 인물은 경쟁자나 정적(政敵)이 될 가능성이 높은 대상에 대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거하려 한다.
둘째, 한번 일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 자는 같은 일을 또 저지른다는 교훈이다. 초범이 재범, 3범이 되는 것과 같다. 1963년 거사를 음모하다 구속돼 조사를 받은 과거가 있는 인물들이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사건을 일으켰고, 1979년 12·12사태, 1980년 5·18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욕망이 강한 자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은인을 밟고 일어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의리는 이득이 되는 유리한 경우에만 지키고, 불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자신의 처신을 합리화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인자를 무너뜨리는 도전자는 2인자였고, 정치적 욕망이 강한 자는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권모술수, 음모, 암투를 벌인다. 1973년 윤필용·손영길 사건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많은 인재를 제거했다. 이 때문에 중용할 마땅한 인물이 없게 되자 김재규를 재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쿠데타 음모 사건은 재조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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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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