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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김재규의 ‘윤필용 감청작전’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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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게임 시작되다

흥미로운 점은 윤필용이 수경사령관에 부임한 후, 전국에 흩어져 근무하던 윤필용 계열의 우수 장교들이 대거 수경사로 전입된 사실이다. 당시 육군본부는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은 수경사에 일종의 특혜를 주고 있었는데, 수경사로 장교 전입 요청을 하면 우선적으로  차출해 발령을 내줬다. 따라서 수경사로 전입한 우수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대통령을 경비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윤필용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부대 사기가 충천했다.
수경사 일부 장교들은 “수경사가 대통령 신변을 지키는 부대이고 충성심도 더 강한데, 보안부대가 감시를 하고 동향보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보안사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배타적으로 나왔다. 특히 서울 경복궁 소재 수경사 30대대의 경우 ‘경호임무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보안반의 부대 출입을 막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안사에서는 수경사가 보안부대원 출입을 못마땅해할수록 예의관찰하며 강력히 대응하라고 지시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71년 6월 김재규-윤필용 간 본격적인 파워게임이 시작된다.



3. 감청사건과 김재규 좌천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1973년 ‘윤필용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맡긴 데서도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수경사령관과 보안사령관에 기용되기 전 사단장 시절 육사 8기 장성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차규헌 육본장교보직처장, 강창성 5사단장, 윤필용 20사단장, 이범준 15사단장. 동아일보

원래 수도권 대전복 부대(쿠데타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부대) 지휘관은 일일 동향보고를 하게 돼 있지만,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는 특별하게 동향을 감시할 필요가 있을 때 실시했다. 통신 감청은 특정인에 대해 범죄혐의가 적발됐을 경우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윤필용 수경사령관에 대해 시간별 동향보고를 지시했다. 며칠 뒤 515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 2명을 투입해 윤필용의 전화를 감청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지시는 윤필용을 군에서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절대 보안이 유지돼야 하고, 실패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따르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필자가 가장 걱정한 것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는지 여부였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수경사령관에 대한 감청을 할 경우 사전에 대통령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다. 수경사의 경우 비밀리에 감청할 수 없는 여건이라 탄로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될 것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필자는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에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과 참모장 강성탑 준장(육사 8기, 손영길 대령 전임), 그리고 통신참모에게 “보안사에서 전군을 대상으로 통신보안 점검을 실시하게 돼 수경사령부에서도 당분간 보안점검을 실시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보안부대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보안업무”라고 통보했다. 이에 대해 모두들 ‘불쾌하다’며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필자는 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에게 사령부 건물 교환대 뒷벽에 붙어 있는 단자판에서 통신보안 점검활동을 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지하 맨홀에 들어가 윤필용 장군의 전화선을 찾았다. 통화를 하면 자동으로 녹음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감청요원으로부터 “최선을 다했지만 맨홀에 설치된 수백 개의 전화선 뭉치에서 윤 장군의 전화선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필자는 감청요원에게 “종전처럼 통신실 단자판에서 윤 장군 전화를 감청하되, 수경사 요원들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뒤 수경사 통신참모에게는 “일반적인 통신보안 점검이니 모른 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부터 열흘 정도 윤 장군 전화에 녹음기를 연결하고, 통화 내용을 24시간 녹음한 후 녹취록을 보안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반 부대에서는 이렇게 감청하지만, 윤 장군을 감청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라서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러던 중 한 감청요원이 수경사 통신참모가 단자판실에 자주 들어와 본다고 전했다. 결국 통신참모가 윤 장군에게 “보안사령부에서 사령관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하나회 장교 다수를 직계 부하로 거느린 '군부 강자' 윤필용 수경사령관(왼쪽)에게 처음 견제를 시도한 장성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다. 동아일보

여관으로 사무실 옮겨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니 통신감청요원 2명이 수경사 제5헌병대대 구치소에 구속됐고, 녹음장비와 그간 윤 장군의 전화를 감청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필자가 제5헌병대대장 지성환 중령을 찾아가 “근무 중인 보안부대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니 구속한 병사와 장비를 즉각 돌려달라. 보안사령부의 기본 업무를 방해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두 명의 병사와 장비를 돌려주면 감청업무를 중단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현행범을 구속한 것이니 법적으로 하자가 없고 이는 윤필용 사령관의 지시”라고 했다. 그는 필자에게 “당신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완강하게 나왔다.    
잠시 후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이 “사령관 지시로 수경사령부에 파견된 보안반 사무실을 폐쇄하니 보안부대원 전원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직속상관인 중구팀장 김형노 소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김 소령으로부터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정봉화 소령은 “절충안을 찾아보자. 이런 사태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말자”며 대안을 내놓았다.
보안반을 잠시 수경사령부 앞 ‘경화장 여관’으로 옮기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수경사령부에서 볼 때는 보안부대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한 것이고, 보안사령부에서 볼 때는 부대원이 수경사령부에 계속 출입은 하니 철수한 것은 아닌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전 반원이 이 조치를 따랐다.
다음 날 우리는 보안반 사무실을 경화장으로 옮기고, 전과 같이 부대 출입을 하면서 근무했다. 하지만 보안반을 여관으로 옮긴 것을 본부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는데도 김재규와 윤필용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청와대 분위기는 윤 장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정봉화 비서실장이 수경사령관에게 보안반 원대복귀를 건의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5헌병대대에 구속된 두 병사를 석방시키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짧은 기일 안에 수경사령관이 다시 보안반을 영내로 들어오게 할 리 없다는 판단이 서자 김형노 소령은 “우리는 파국을 막고 사태가 호전될 것을 예상하고 경화장 여관으로 잠시 옮겨왔으나 상황이 오래갈 것 같으니 본부에 보고하고 철수하자”고 했다.





고래 싸움의 끝

경화장에서 철수하고 서울 소공동 소재 506보안부대 본부로 들어갔다. 부대장 조현수 대령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우리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줬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지하 감방에 감금됐고,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는 김형노 소령에 대해 지휘책임을 물어 파면을 결정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김 소령은 억울하게 처벌을 받았다.
필자에게는 ‘불문’ 결정을 내리고,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보안반 전원을 데리고 다시 수경사 영내로 쳐들어가라는 것, 그리고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라는 것이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필자는 506보안부대 소속 병사 20여 명에게 전투복에 총기를 지급하고 군용 트럭에 탑승시킨 후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서 필동 소재 수경사령부로 진격 출동 준비를 했다. 명령에 따라 무작정 수경사로 돌진하겠다는 각오였다.
우리가 쳐들어간다고 수경사에서 우리를 받아줄 리 없는데 이렇게 하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어 난감했다. 그때 조현수 부대장이 “부대원 모두를 하차시키고 보안사에 가서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의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보안사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은 필자에게 “육본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장군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고소인 조서까지 작성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바로 삼각지 소재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 장군을 고소하고 고소인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육군 중위가 육군 소장을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소인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 3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때 육군본부 검찰관들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3군단장으로 발령났으니 조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령부 보안처장의 지시를 받아 고소를 취하한 후 506보안부대로 돌아왔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자 윤필용은 폐쇄한 수경사 보안반 사무실을 원위치시키라고 지시했고, 필자와 보안부대원들은 다시 수경사에 들어가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팀장 김형노 소령은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처분을 받고 군을 떠났다. 두 장군의 고래 싸움에 훌륭한 영관 장교 한 명이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후일에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위로가 됐다.
결론적으로 윤필용 감청사건은 윤필용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 핵심 간 시기·질투와 세력 다툼일 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무모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의 3군단장 좌천으로 종결됐지만 김재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내부 관계자들은 김재규가 ‘윤필용 장군과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누구도 이를 챙기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하긴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후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 앉힐 줄을. 그리고 그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박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할 줄을.  
김재규 보안사령관 후임으로는 육사 8기 중 선두주자로 명석하다고 소문난 강창성 장군이 부임했다. 강 장군은 경기도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에 오래 근무했고, 우수한 장군으로 인정받던 실력자였다. 그가 청와대 주변 권력기관장으로 부각되자, 표면적으로는 보안사령부와 수경사령부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필용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난 셈이었다. 또 다른 파워게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불거진 것이다.

라이벌 제거 실패하자 8년 뒤 주군(主君) 시해

1969년 7월 윤필용 장군이 주월 맹호사단장으로 있을 때 3대대장이던 노태우 중령(가운데)과 박희도 중령(오른쪽).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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