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호

모차르트에게 영감 준 바흐의 막내아들, 그의 성공 비결

[음악으로 보는 세상-마지막회] 이전 시대 유산과 집착에서 해방돼야…

  • 김원 KBS PD·전 KBS 클래식 FM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6-05-0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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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로봇과 에너지 같은 기술과 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전쟁을 통해 질서가 재편되고 새로운 문화와 예술이 피어난다.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1756~1763)을 시작으로 프랑스혁명(1789)이 일어나기까지 유럽은 고전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낭만주의를 잉태했다. 음악사에선 바흐의 아들들과 하이든이 이 시기에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다. 

    바흐의 네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페라에 뜻을 둔 막내 크리스티안 바흐. Gettyimage

    바흐의 네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페라에 뜻을 둔 막내 크리스티안 바흐. Gettyimage

    1740년 오스트리아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합스부르크의 왕위를 계승하자, 같은 해 프로이센의 왕이 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해서 천연자원이 풍부한 슐레지엔(실레지아·오늘날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지대)을 차지한다. 이후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한편이 되고,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다른 한편이 돼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은 1748년에 끝났는데, 그 결과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얻었고, 영국은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프랑스는 잃은 것이 많았고,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켜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을 안정시킨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고 싶어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756년에 7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한편이 됐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된 이 사건을 외교 혁명이라고 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도중에 영국의 조지 2세가 사망하고 조지 3세가 즉위했다. 7년이나 지속된 이 전쟁에 이해관계가 얽힌 유럽의 강대국들이 참전했고, 아메리카와 인도에서도 식민지를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프로이센이 위기에 몰렸으나, 1762년에 전쟁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그녀의 뒤를 이은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것이다. 프로이센의 적이던 러시아가 프로이센의 동맹국이 되면서 프로이센은 기사회생하고 전쟁의 승리자가 됐다. 1763년에 전쟁이 끝났고, 이듬해인 1764년 당시 8세이던 신동 모차르트가 아버지와 함께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베를린의 바흐와 런던의 바흐

    바흐의 아들 중 가장 유명세를 떨친 둘째 에마누엘. ‘베를린의 바흐’로 불렸다. Gettyimage

    바흐의 아들 중 가장 유명세를 떨친 둘째 에마누엘. ‘베를린의 바흐’로 불렸다. Gettyimage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을 지켜냈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 지역의 강국이 됐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되찾는 데 실패했지만, 패배를 계기로 제국을 개혁했다. 영국은 가장 큰 승리자였고, 이를 계기로 인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해양 제국으로 부상했다. 전쟁은 유럽을 넘어 대서양과 인도를 아우르는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에 바흐의 아들 중 가장 유명한 둘째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이하 에마누엘)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베를린의 바흐라고 불렸고,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이하 크리스티안)는 런던의 바흐가 됐다. 그리고 하이든은 오스트리아를 개혁하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하에서 개혁의 대상이 된 빈(비엔나)을 대신해 새로운 음악의 중심지로 부상한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악장이 됐다.

    바흐의 둘째 아들 에마누엘은 이 시기에 플루트를 연주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하프시코드 반주자로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1750년에 아버지 바흐가 죽자 그의 막내아들인 크리스티안도 베를린에 와서 형과 함께 살았다. 크리스티안은 음악가가 된 바흐의 네 아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오페라에 뜻이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열아홉 살이 되던 1754년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떠났고, 1760년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1762년엔 런던으로 이주했다.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우고 런던에서 성공하는 경로는 헨델이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헨델은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9년 런던에서 사망했는데, 크리스티안은 조지 3세가 다스리는 영국에서 헨델의 뒤를 이었다. 



    4차원의 음악으로 발전한 고전음악

    하이든의 몇몇 현악사중주와 교향곡을 제외하곤 바흐 이후, 모차르트 이전 시대의 음악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서양 역사에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이 독립하던 이 시대를 모르고서 전후의 세계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음악사에서도 이 시대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바흐의 음악이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바뀌었는데, 과장하면 3차원 세계가 4차원 세계로 바뀐 것 같다. 바흐의 음악이 균일한 질서의 공간 속에서 음을 쌓아 올리는 구조였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시간 속에서 음이 흘러가면서 발전하고 전개되는 구조였다. 음악에서 선율이 중요해지고 매력적인 선율을 지지해 주는 정교한 화성 체계가 만들어졌다. 선율이 흐르면서 음악이 속도와 시간을 정하고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율과 함께 음악을 듣는 인간의 시간도 함께 흘렀다. 

    이전 바로크 시대엔 느리고 빠른 것은 똑같은 가치를 지녔고, 음악의 의미는 느리고 빠른 속도의 대비에서 만들어졌다. 바로크 시대엔 춤마다 빠르기가 정해져 있었다. 사라방드는 느린 춤이고, 쿠랑트는 살짝 빠르게 뛰는 정도의 경쾌한 춤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모음곡은 속도가 다른 여러 춤을 늘어놓고 빠르기가 대비되는 것을 즐기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전주의 시대가 되면서 속도가 다른 여러 춤곡을 모아놓은 모음곡 형식은 사라지고 교향곡이나 협주곡, 현악사중주에 미뉴에트 악장이 등장했다. 미뉴에트는 대부분 경쾌하게 연주되지만 때에 따라 상대적으로 느리게도 연주된다. 

    하이든의 교향곡 44번 ‘슬픔’의 3악장엔 ‘미뉴에트 알레그레토(Menuetto Allegretto)’라는 악상기호가 붙어 있는데, 대개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된다. 하이든의 작품 중에서 유명한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중 마지막 말씀인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악장에선 예수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춤추듯 묘사되는데 느리고 장중하다. 작곡자와 연주자가 시간과 속도를 정하고 다루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슬픔’ 교향곡이 만들어지던 1772년은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외교적 협상을 통해 폴란드를 나눠 가진 해다.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이 작곡된 1787년은 왕이 없는 미국에서 헌법이 제정된 해다. 재편된 세계질서와 함께 새로운 미학도 태어났는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아예 ‘슬픈 왈츠’ 같은 작품이 등장한다.

    음악에 감정 담은 에마누엘

    음악에 감정이 담기기 시작하면서 슬픈 춤이 등장하는데, 음악에 감정을 담는 데는 바흐의 둘째 아들 에마누엘의 역할이 컸다. 앞서 언급한 하이든의 작품은 모두 에마누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들이다. 에마누엘 이전에도 슬픈 음악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에마누엘은 슬픈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선 연주하는 사람이 슬픔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크 시대의 슬픈 음악은 오페라나 교회음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슬픈 상황을 묘사한 음악이었다. 슬픈 장면을 묘사하는 음악은 느리고 장중했으나 연주하는 사람이 반드시 슬픈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 슬픈 장면 뒤에 곧잘 빠르게 연주하는 흥분의 장면이 이어졌고, 빠르기의 대비에 의해 놀라움과 감동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에마누엘은 슬픔을 묘사하기 위해 느리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기 때문에 느리게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마누엘은 한 악장 안에서도 여러 빠르기를 구사했다. 그리고 조성을 자주 바꾸면서 음악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음정을 갑자기 높이 띄웠다가 떨어뜨리면서 감정의 진폭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런 표현은 낭만주의 음악을 묘사하는 데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에마누엘의 음악은 이미 낭만주의를 잉태하고 있었다. 베토벤 이후에 바흐에게서 독일 음악의 뿌리를 재발견하면서 낭만주의 음악을 이끌었던 작곡가가 멘델스존이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10대 시절의 현악 교향곡이 많은데, 모두 에마누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다. 에마누엘은 최초의 본격적인 건반악기 교본도 썼는데, 베토벤도 이 교본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클라비어를 연주하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소고(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 )’라는 책인데 아버지 바흐로부터 배운 연주법과 스스로 터득한 건반악기 연주법이 망라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건반악기를 연주할 때 엄지손가락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이 책에 상세히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쓰지 않고 건반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많았다.

    선율의 크리스티안과 구조의 하이든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악장으로 활약한 하이든. 그가 만든 현악사중주와 교향곡이 유명하다. Gettyimage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악장으로 활약한 하이든. 그가 만든 현악사중주와 교향곡이 유명하다. Gettyimage

    에마누엘이 음악에 감정을 담는 법을 후대에 전했다면, 음악에 아름다운 선율을 넣어 모차르트에게 물려준 사람은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이다. 1764년, 여덟 살이 된 모차르트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티안이 모차르트를 무릎에 앉히고 같이 건반악기를 연주하는 걸 봤다는 증언이 전해지는데,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가 크리스티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티안이 쓴 아리아의 선율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연이 담긴 모차르트의 편지도 전해진다. 크리스티안이 선율을 잘 다루게 된 것은 10대 시절 오페라에 매력을 느끼고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던 무모함과 용기 덕분이었다. 아버지 바흐도 관현악과 칸타타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많이 만들었지만, 오페라를 만든 적은 없다. 그는 오페라 아리아의 매력적인 선율을 중심으로 대위법 없이 기악곡을 만들지는 않았다.

    바흐의 아들들이 각각 음악에 감정과 선율을 도입했다면 하이든은 음악에 형식과 구조를 만들어 넣었다. 거의 30년간 헝가리의 외진 지역에서 오케스트라 단원 수보다 적은 귀족 관객을 상대로 교향곡과 오페라, 실내악을 만들어야 했던 하이든은 폐쇄된 공간에서 관객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쉽게 제공하기 위해 정교한 구조를 발전시켰다. 주제를 제시하고 발전시킨 후 다시 재현하는 소나타 형식을 체계화한 사람이 하이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모차르트였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도 시대의 변곡점에서 실패한 바흐의 큰아들 프리데만과 달리, 에마누엘과 크리스티안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초 위에 자신만의 것을 쌓아 성공했다. 에마누엘이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형에 대한 질투였을지 모른다. 형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의도적 선택도 있었을 것인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에마누엘은 막내의 선택도 존중해 줬다. 어쩌면 전 시대의 유산과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후대의 성공 조건일 수도 있겠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 저서: ‘미디어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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