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ZOOM 人

“자괴감에 무너졌다 바닥에서 성숙해졌다”

진화한 ‘타격기계’ 김현수

  • 볼티모어=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6-08-02 11: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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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범경기 때 마이너리그행을 권유받던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의 입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법을 제대로 배운 터라 넘어지는 게 더는 두렵지 않다.
    시범경기 타율 1할7푼8리(45타수 8안타), 23타석 연속 무안타. 여론은 그를 마이너리그로 내려 보내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김현수를 향한 구단 측의 압력도 거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계약서에 적힌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행사하며 버텼다. 감독이 출전 기회를 안 줘도 언제 생길지 모를 기회를 위해 타격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진 비바람을 맞았으나 생존했고, 8번 혹은 9번타자로 간간이 출전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팀의 2번타자로 출전 기회를 보장받고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김현수(28). 메이저리그 데뷔 해에 ‘반전 인생’을 연출했다. ‘격세지감’ ‘파란만장’의 데뷔 시즌이라 하겠다.  

    “마크 트럼보가 제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맹구를 아느냐’고. ‘맹구랑 친하다’고. 정말 웃겼어요. 1루에 출루해서 마크 트럼보한테 (김)현수의 별명인 맹구 얘길 들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맹구가 돌아왔다

    7월 1일 시애틀 매리너스의 이대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현수의 별명인 ‘맹구’ 얘기를 꺼냈다. 안타를 치고 나가 1루 베이스를 밟았는데, 볼티모어 1루수 트럼보가 이대호에게 “현수랑 친하냐”며 ‘맹구’라고 했다는 것. 이후 트럼보는 인터뷰에서 “벅 쇼월터 감독이 그 별명을 알려줬다. 시애틀 경기 때 1루에서 이대호를 만나는 순간 그 별명이 떠올라 물어봤다”고 설명했다. 이대호는 “현수가 그만큼 선수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면서 “볼티모어 선수들이 모두 현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 흐뭇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볼티모어에서 김현수는 더 이상 ‘백업 멤버’가 아니다. 쇼월터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 운영으로 인해 왼손투수가 나올 경우 벤치를 지키지만, 대부분의 경기에서 김현수는 주전으로 출전한다. 지난 3월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때 마이너리그행을 권유받던 상황을 떠올리면 입지가 하늘과 땅 차이다. 김현수는 어떻게 해서 쇼월터 감독의 생각과 볼티모어 팬의 마음을 돌려놓았을까.

    “현수 잘하죠?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이젠 뭐, 걱정할 것도 없어요, 지금처럼만 해주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오승환은 김현수를 만나고 세인트루이스로 넘어온 기자에게 후배의 안부를 물었다. 뉴스를 통해 김현수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다는 오승환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은 김현수의 노력에 진심으로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싸움인지 오승환도 잘 안다.



    추신수, 이대호의 후배 사랑

    김현수가 시즌 개막을 앞두고 볼티모어 여론의 냉대와 무시를 받을 때 그를 감싸준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배들이었다. 다음은 김현수의 얘기다.

    “여론에 밀려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때 (추)신수 형이 네이버에 연재 중인 자신의 일기를 통해 마이너리그로 가지 말고 버티라는 내용의 글을 실었습니다. 물론 저랑 먼저 통화했고요. 절대 흔들리지 말고 계약대로 이행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의지할 곳 없던 제게 신수 형의 조언은 큰 위로가 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해오던 야구를 잊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제가 어떤 선수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어요. 신수 형 글을 읽었을 때 비로소 제가 그렇게 형편없는 선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죠. 뭐라도 잡고 싶은 상황에서 큰 위로가 됐습니다.”

    추신수는 당시 일기에서 ‘볼티모어는 페어하지 않습니다’란 제목으로 김현수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려 한 볼티모어 구단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메이저리그가 모든 야구선수들이 뛰기를 소원하는 최고의 무대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단의 선수 관리나 태도도 최고여야 합니다. 이곳 또한 비즈니스의 세계라 감성적인 호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온 한국 선수에게 볼티모어가 보이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현수가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걸 반대합니다. (…) 현수는 마이너리그에서 뛰려고 미국에 온 게 아닙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현수가 구단의 압력에 굴복해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 그가 아무리 홈런을 많이 쳐도, 4할대의 타율을 기록한다고 해도 메이저리그로 콜업돼 한자리를 차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수한 실력만으로 빅리그에 올라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 제가 대표팀에서 본 현수는 실력이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온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을 정도로요. 지금 현수는 이곳에서 보여준 게 아직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현수의 야구 능력을 시범경기로 평가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김현수에게 실질적 도움을 준 이는 또 있었다. 추신수의 동갑내기 친구 이대호다. 김현수는 5월 18일 홈에서 치른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를 떠올렸다.


    “MLB 만만히 봤다가…”

    김현수는 패스트볼 공략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타격 폼에 변화를 줬다. KBO리그에선 레그킥(다리를 들었다 내리면서 타격하는 것)을 거의 안 했지만, 최근엔 오른쪽 다리를 들었다 내리면서 타격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김현수는 “투수들의 구속이 빠르고 공격적이지만, 그건 이미 생각하고 온 부분이라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면서 “다만 좀 더 효율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다리를 들고 타격하기로 했고, 그게 좋은 성적으로 연결된 듯하다”고 했다.

    김현수는 시범경기 때의 부진과 관련해서는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메이저리그도 똑같은 야구를 하는 곳이기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잘 적응할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이곳 세계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한 후 타격 코치와 연습에 몰두하면서 조금씩 빛이 보였어요. 어두운 터널을 달리다 출구가 가까워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어요.”

    플로리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고 시범경기에서부터 지금까지 4개월여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김현수는 그 짧은 기간에 아픔과 희열을 차례로 느꼈다.

    “메이저리그라서 모든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여태까지 해온 야구는 야구가 아닌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괴로웠어요. 모든 게 새로웠고, 모든 게 어려웠거든요. 메이저리그에 있는 제가 자꾸 낯설고,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어렵게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제가 알던 ‘김현수’로 돌아오더라고요. 힘들게 생각하면 한없이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편하게 받아들이려 했어요. 벤치에서 바라보는 야구도 야구거든요.”

    김현수는 언론에 대한 아쉬움도 숨기지 않았다. KBO리그에서 좋은 커리어를 쌓았는데도 그간의 기록을 믿지 않는 듯 반등을 기다려주지 않는 기사들을 보며 상처를 꽤 많이 받았다고 한다.



    “더는 두렵지 않다”

    “마치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듯했어요. ‘그만 힘들어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느낌? 어느 순간부터 기사를 안 보게 됐습니다. 어느 매체에서 아버지와 인터뷰를 했더군요. 그 기사를 보곤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 가족까지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어쨌거나 제가 잘하는 것밖엔 답이 없잖아요. 잘해야 가족들도 활짝 웃을 수 있고요.”

    6월 22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김현수는 2번 좌익수로 출전해 4타수 1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1삼진을 기록했다. 멀티 출루와 함께 시즌 5번째 타점을 올렸으나 볼티모어는 불펜 난조로 7-10 역전패를 당했다.

    이날 김현수의 플레이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5회초 라이언 쉼프의 파울플라이를 잡으려고 외야에서 3루 쪽으로 뛰어오다 슬라이딩하는 모습이었다. 공이 글러브에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아웃 카운트를 늘리지 못했지만 외야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어오는 김현수에게서 절실함이 느껴졌다.

    경기 후 만난 김현수는 그 순간에 대해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내가 부족한 탓”이라면서 자세를 낮췄다. 심판의 볼 판정에는 아쉬움이 없냐고 묻자 “유리한 카운트에서 좀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쳐야겠다”는 말로 심판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김현수는 메이저리그 식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좌절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더 이상 무섭고 두려운 게 없다. 4개월여 경험한 메이저리그의 생존 경쟁이 김현수를 우리가 알던 그 ‘김현수’로 돌아오게 했다.

    7월 1일 김현수를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인 세이프코필드에서 다시 만났다. 경기 전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그는 자연스럽게 ‘그때’ 얘기를 꺼냈다. 김현수는 “항상 ‘그때’를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야구인생 터닝포인트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생존 능력이 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요. 안타, 홈런을 쳤다고 좋아하기보다는 늘 침착하자, 조심하자는 태도를 가지려 합니다. 시즌 초반, 야구 못한다고 욕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잖아요. 지금은 응원하는 분이 늘었다는데, 저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은 모두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거든요. 격려하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현수는 아픈 시간이 자신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경험이 야구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사실 그가 한국에서 이뤄낸 성공도 좌절을 디딤돌 삼은 것이었다.

    2005년 8월 31일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가 열렸다. 신일고 3학년 강타자 김현수는 2차 7라운드 지명이 끝날 때까지 PC방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프로야구 신인선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못한 것이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까지 받은 김현수였다. 그런 그가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김현수는 계약금도 없는 신고선수 신분으로 천신만고 끝에 2006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2군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던 김현수는 이듬해 1군으로 승격되는 기회를 잡았다. 김현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99경기 타율 2할7푼3리의 성적을 보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2008년 타격왕(3할5푼7리)과 2008년, 2009년 2년 연속 최다 안타왕에 오르며 최고의 중장거리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하면…”

    그런 그가 그로부터 10년 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2년 700만 달러(약 82억 원)의 계약을 맺었다. 볼티모어 입단식에서 유니폼을 입은 김현수가 처음 한 말은 “프로에서 야구하며 입단식은 이번이 처음이다”였다. 신고선수 신분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가 공식 입단식을 KBO리그가 아닌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상승세를 내달리던 김현수에게 최근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다. 7월 11일 볼티모어 홈구장인 캠든야즈에서 열린 LA 에인절스와의 홈경기에서 김현수는 다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트레이너에게 얘기한 후 교체됐다. 볼티모어 1루수 크리스 데이비스는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부상으로 빠진) 김현수의 자리를 누군가가 잘 메워줄 거라 확신한다”면서도 “레이몰드는 전반기 동안 잘해줬으며 리카드 또한 최근 괜찮은 타격감을 보였지만, 김현수를 대체하는 활약을 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김현수는 전반기를 46경기 출전 타율 3할2푼9리(152타수 50안타) 3홈런 11타점으로 마무리했다.

    “제 인생이 쉽게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즐기려고요. 평탄한 삶은 재미없잖아요.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걸 반복하다 보면 제가 닿고 싶었던 그 지점에 가 있겠죠.”

    김현수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부상을 훌훌 털고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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