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산시성

북방 선비의 기풍 탐욕 앞에 흔들리다

晉 중원의 방패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북방 선비의 기풍 탐욕 앞에 흔들리다

1/5
  • 산시(山西)성은 옛 중국의 ‘북방한계선’으로 진문공 때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고, 명대(明代)에 중국의 ‘월스트리트’ 기능을 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시성은 탐욕스러운 석탄 개발로 민중의 삶을 외면한 부끄러운 얼굴을 내보인다.
“‘인디아나 존스’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

산시성 다퉁(大同)의 윈강석굴(雲崗石窟)을 보고 미국인 친구가 말했다. 산을 깎아 만든 석굴에 자리한 거대한 불상은 정말 모험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윈강석굴은 스케일이 클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헬레니즘 예술, 인도의 간다라 예술, 북방 선비족의 기풍이 표현 양식에 녹아 있어 매우 개성적이다.

산시는 어떻게 이토록 개성적인 문화를 갖게 됐을까. 산시는 옛 중국의 북쪽 끝이다. 중국의 오악(五岳) 중 북악 항산(恒山)이 산시에 있다. 중원의 북방 영역이 산시성에서 그친다. 매서운 겨울바람 삭풍(朔風)이 부는 삭주(朔州)가 산시의 북쪽에 있다. 기러기가 오가는 길목인 안문관(雁門關), 당태종의 딸 평양공주가 낭자군을 거느리고 지켰다는 낭자관(娘子關) 등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들이 산시성에 즐비하다. 즉, 산시는 옛 중국의 최북단이며, 산시 북쪽의 만리장성은 중국의 북방한계선이었다.

한 지역의 끝은 다른 지역의 시작이다. 산시 제2의 도시 다퉁에서 차로 서너 시간만 가면 내몽골의 성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가 나온다. 따라서 산시는 다양한 유목민족, 이민족들과 한족이 만나며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민족과 전쟁도 잦지만 교류도 잦았던 산시는 문화 융합을 통해 중원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모든 게 어중간하다

산시성의 약칭은 ‘나라 이름 진(晉)’이다. 산시성은 태행산(太行山)의 서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고, 진(晉)나라는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 진문공(晉文公)이 이끌던 강국이다. 즉 산시성의 약칭 ‘진(晉)’은 태행산 호랑이 진나라의 영광을 추억하는 이름이다.

산시성은 산악지역이다. 이웃인 산시(陝西)성 역시 산 많기로 유명하지만 중심부는 비옥한 관중평원이다. 그러나 산시(山西)는 성 전체가 황토고원이다. 산과 구릉이 전체 면적의 80%가 넘는다. 이백은 ‘길을 가기 어렵구나(行路難)’에서 산시의 추운 겨울과 험난한 지형을 노래했다.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이 막고, 태행산을 오르자니 눈발이 하늘을 가리네(欲渡黄河冰塞川,將登太行雪滿山).”

중국에서 산 안의 분지로 유명한 성은 쓰촨, 산시(陝西), 산시(山西)다. 산 높고 분지 넓기로 쓰촨이 으뜸이고, 산시(陝西)는 중간이며, 산시(山西)가 꼴찌다. 나는 새조차 넘기 힘든 험준한 산 안에 거대한 분지가 있는 쓰촨은 폐쇄적이고 독립적이다. 산시(陝西)는 쓰촨만큼은 아니나 역시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산이 높고 분지도 넓다. 함곡관을 보루로 삼고 관중평원을 근거로 삼은 산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산시(山西)의 태행산은 기어코 넘어가려면 못 넘을 것은 없지만, 막상 넘으려면 만만찮은 참 애매한 높이다. 분지 역시 내부의 인구를 적잖게 유지할 수 있긴 해도 쓰촨과 산시의 생산력에는 훨씬 못 미친다. 어중간한 산과 어중간한 생산력. 이것은 산시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시의 이웃 역시 화려하다. 동쪽에는 태행산맥을 사이에 두고 산둥성, 서쪽에는 진진대협곡 너머로 산시(陝西)성이 있다. 남쪽에는 중원 허난성, 북쪽에는 내몽골자치구가 있다. 춘추전국시대로 말하자면 험준한 산의 양쪽에 강국 제(齊)와 진(秦)이 있고, 남북으로 중원의 농경민족과 북방의 유목민족을 잇는 것이다.

초기 산시 일대에는 황하중류 평지의 농경민족인 화하족과 구별되는 유목민족 융적(戎狄)이 살았다. 수많은 산속에 여러 군소집단이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산으로 나뉜 탓에 통일국가의 형성은 융적이 아닌 화하족의 몫이 된다.



산악국가 어드밴티지

진(晉)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으로 탄생했다. 주 무왕의 아들 성왕이 친구인 숙우와 놀다가 “그대를 제후로 봉하노라”라고 농담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관은 “천자는 실언을 할 수 없다”며 숙우를 제후로 봉해야 한다고 했다. 성왕이 어쩔 수 없이 숙우에게 갓 차지한 당(唐)의 영토를 주면서 진나라가 생겼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재벌 2세가 친구에게 “너 상무시켜줄게”라고 농담한 것이 화근이 돼 술상무를 맡긴 꼴이다.

믿거나 말거나의 탄생 설화지만 한 가지 함의는 분명하다. 당시 산시는 중원에 그다지 중요한 땅이 아니었다. 산시는 북방의 산악지대로 생산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전투 종족’인 북적·서융과 직접 맞닿아 있어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진나라가 발원한 진청(晉城)시는 산시성의 남부이며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鄭州), 천년고도 뤄양(洛陽)의 바로 위쪽에 있다. 진청시의 별명은 ‘중원의 울타리(中原屛翰).’ 진나라는 태생적으로 중원의 방패였다.

그러나 산악지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원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진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거친 산악지형에서 융적과 부대끼며 자라난 진인(晉人)은 강인한 전사였다. 주위에 득시글거리는 융적은 귀찮은 적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용병이요, 명마를 공급해주는 납품업자이기도 했다. 강한 전사와 명마, 험한 지형은 진나라를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 진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우월한 점이 세 가지나 있는데 적들이야 하나라도 있소? 우리의 지형은 험하고, 말(馬)은 믿을 만하며, 초나라나 제나라처럼 난리가 많지도 않소.”

평원국가는 백성이 모이기도 쉽지만 떠나기도 쉽다. 공자·맹자 등이 선정(善政)을 강조한 것은 도덕적 이상주의라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바른 정치를 베풀면 사방에서 백성이 몰려든다. 인구는 곧 국력이다. 늘어난 인구는 국력을 강하게 하고, 더 좋은 정치를 하면 더 많은 백성을 불러오는 선순환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강한 국력에 방심해 정치를 잘못하면 그 많던 백성이 순식간에 떠나버려 국력이 약해진다.


중국의 오디세우스

반면 산악국가는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백성이 찾아오기도 어렵지만 떠나기도 힘들다. 평원국가의 인구는 탄력적인 반면 산악국가의 인구는 비탄력적이다. 따라서 진나라는 가난했지만 거주민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진나라는 “땅의 힘을 최대한 뽑아내는 정책”으로 일약 강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진나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장점을 살려 성장하다가 진문공 시대에 이르러 북방의 초강대국이 된다. 진문공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왕위 싸움에 휘말린 그는 43세 때부터 19년이나 천하 각지를 방랑하는 망명객 노릇을 했다. 62세 때 비로소 귀국해 왕좌를 차지하고 불과 9년 만에 진나라를 북방의 최강국으로 키워낸다. 대기만성의 전형이요, 늦깎이 인생의 희망이다.

진문공의 긴 방랑과 재건 스토리는 영락없이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오디세우스는 신화 속 인물이지만 진문공은 실제 인물이라 더욱 생생하다. 게다가 진문공은 북방인답게 희로애락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방랑하던 진문공이 배가 고파 농부들에게 밥을 구걸하자 농부는 밥이 아니라 흙을 그릇에 담아줬다.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우리처럼 가난한 농부에게 밥이 어딨어? 사지 멀쩡한 놈이 밥 구걸하러 다니지 말고 열심히 땅을 일궈 먹고 살아라.”

깡촌 무지렁이들의 푸대접에 잔뜩 화가 난 진문공이 이들을 패려 하자 신하 호언이 말린다. “백성들이 땅을 바치겠다니 매우 상서로운 일입니다.” 이 일화에서 보듯 진문공은 그 자신이 특출 나게 어질고 지혜롭진 않았지만,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 자신도 매우 현명해져서 단기적 이익을 탐하는 신하들을 대의명분과 실리로 설득하는 면모를 보인다.

진문공은 어떻게 단기간에 패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방랑하며 여러 나라를 두루 살펴본 진문공은 나라의 체질에 적합한 운영 방식이 모두 다름을 깨달았다. 진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것은 제나라다. 제나라는 드넓은 산둥평야를 황하가 적시고 황해가 감싸주는 풍요로운 나라였다. 따라서 명재상 관중은 전면적인 경제 개혁을 통해 부유함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첩첩산중 속 빈약한 황토고원이 전부인 진나라가 제나라를 따라 하다가는 뱁새가 황새 흉내 내다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 된다. 진나라는 아껴야 잘산다. 그래서 제환공이 부유한 나라를 만들었다면, 진문공은 검소한 나라를 만들었다. 둘의 대비를 묵자가 잘 표현했다. “(올바른) 행동은 의복에 있지 않소. (…) 옛날에 제환공은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르고 좋은 금(청동) 칼에 나무 방패를 들고도 나라를 잘 다스렸고, 진문공은 포의에 양가죽 옷을 입고는 허리에 띠를 둘러 (볼품없는) 칼을 꽂고도 역시 나라를 잘 다스렸소.”

애초에 내부 생산력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나아갈 길은 군사력으로 외부의 재부(財富)를 차지하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진문공은 절약을 통해 확보한 예산을 군대에 투자했다. 이미 군사강국이던 진은 진문공의 군제 개혁을 통해 최강국으로 거듭난다. 기존의 2군(상·하군)체제를 5군3행 체제로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말을 조달하기 쉬운 이점을 극대화해 압도적인 전차 병력을 갖추고 이를 유기적으로 보완·엄호하는 보병부대를 확충했다.



진(晉)과 진(秦)의 대결

그러나 진문공이 정말 뛰어난 것은 막무가내로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는 점에 있다. 주(周) 양왕이 왕위 다툼으로 동생에게 쫓겨났을 때 진문공은 양왕이 천자의 자리를 다시 찾게 도와줬다. 왕실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황하 북부의 노른자 같은 땅을 얻었다. 또한 초가 중원을 위협하자 중원의 연합군을 이끌고 초군을 대패시켰다. 성복대전을 통해 진문공은 남방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수호해(尊王攘夷)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된다.

당시 진(秦)의 지도자는 목공이었다. 진목공은 진문공의 훌륭한 전략적 파트너였지만, 결국 천하를 두고 다투는 동상이몽의 처지였다. 진문공이 죽자마자 진목공은 문상 사절도 보내지 않고 바로 중원의 정나라를 기습공격하려 했다. 진목공은 진나라를 신흥 강국으로 만든 탁월한 군주였지만, 이때만큼은 매우 경솔했다.

진나라와 정나라는 대단히 멀다. 시안에서 정저우까지는 오늘날 기차로도 예닐곱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제대로 기습할 수 없었다. 정나라가 진나라에 비해 약하다고는 하나 기습전이 아니면 단숨에 함락시킬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나라도 아니었다. 진군은 먼 길을 왔기에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으니 애꿎은 약소국 활나라를 쳐서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런데 활나라는 진(晉)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였다.

진(秦)은 진(晉)에 큰 잘못을 범한 노릇이었다. 문상도 오지 않고, 길을 빌려달라는 말도 없이 멋대로 진군해 활나라를 공격했다. 진(晉)은 효산에 매복해 있다 회군하던 진군(秦軍)을 몰살했다. 승패만 확인되면 싸움을 멈추던 춘추시대에 벌어진 최초의 몰살전이었다. 당시 진(秦)의 병력은 전차 300대에 2만 대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목공은 체면도 잃고 소중한 병력도 잃었다. 다만 진목공은 이를 거울삼아 더욱 훌륭한 정치를 폈으니 그 역시 명군은 명군이다.

진(晉)은 성복대전으로 초를 격파하고, 효산대전으로 진(秦)을 격파한다. 연달아 남방과 서방의 강대국을 패배시켜 진의 군사력이 당대 최강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성공은 교만을 낳는다. 최강의 군사력에 지형이 험해 외부의 근심이 없으니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소모전으로 자멸한 三晉

더욱이 산시의 숙명인 산악지형이 문제를 더욱 심화했다. 산둥성과 산시성을 가르는 태행산맥은 산줄기가 매우 복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진 산은 산시성 내부조차 복잡하게 갈라놓는다. 진(秦)은 관중평야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지만, 진(晉)은 세 귀족가문이 나라를 셋으로 갈랐다(三家分晉). 여기서부터 두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진(秦)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진(晉)은 진(秦)의 첫 희생물이 된 것이다.

분열 초기에 삼진(三晉)의 각개약진은 꽤 화려했다. 삼진, 즉 조·위·한(趙魏韓)은 모두 당당히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된다. 조의 무령왕(武靈王)은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胡服騎射)’ 전대미문의 개혁을 단행해 군사강국의 전통을 이어갔다. 위는 명장 오기를 등용해 진(秦)과 76전 64승 12무의 무패 싸움을 벌여 진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은 삼진 중 가장 약했지만, 그래도 20만 대군과 명검, 강궁을 보유했으며 산시 남부와 중원의 요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삼진은 가장 위험한 적인 진(秦)을 무시하고 사방팔방으로 전쟁을 벌였다. 순간적인 이익을 탐하다 장기적인 우방과 친구를 모두 잃었고, 전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토와 백성을 늘리지 못하고 오히려 낭비하는 소모전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승리하면 할수록 오히려 국력이 약해졌다. “군사를 좋아하는 자는 망하고, 승리를 이로운 것으로 여기는 자는 욕을 당한다”는 손빈의 말은 삼진의 약점을 정확히 꼬집는다.

당시 선비들은 “삼진이 합치면 진이 약해지고 흩어지면 진이 강해지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라고들 했다. 삼진이 함곡관을 틀어쥐면 진은 중원으로 갈 수 없다. 그렇기에 진과 삼진은 살육의 전국시대에서도 가장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진의 전신(戰神) 백기는 장평대전으로 조나라를 격파하고 40만 병사를 모두 생매장해버린다. 이때의 흔적이 산시의 ‘시골갱(尸骨坑, 시체와 뼈의 구덩이)’과 ‘고루묘(骷髏廟, 해골을 제사 지내는 묘당)’에 남아 있다.

조나라는 이후 결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한다. 이때의 원한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산시요리 중에는 ‘츠바이치(吃白起)’가 있다. ‘백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두부를 물에 삶아 먹듯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는 원한이 투영됐다.

훗날 이연은 산시의 고대왕국 이름을 따서 당(唐) 왕조를 열고, 분하를 타고 내려가 속전속결로 산시(陝西)를 정복한 후 천하를 통일한다. 진에게 당한 삼진이 다소나마 설욕을 한 셈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관우의 상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참 좋아하는구나.” 중국 친구는 답했다. “응, 관우가 돈을 가져다준다고 믿거든.” 엥, 이게 웬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관우는 돈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인물이었는데?


財神이 된 武神

관우는 평생 떠돌이 신세이던 유비를 섬겼기에 그 자신도 떠돌이 신세였다. 정사 삼국지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란 표현을 관우와 장비, 단 두 명에게만 쓴다. 그토록 뛰어난 무예에 인품까지 훌륭하니 당대의 실력자 조조는 관우를 부하로 삼고 싶어서 관우가 말을 타면 금을 내리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걸어줬다. 높은 관직에 보물, 미녀를 아낌없이 퍼부어댔건만 관우는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떠돌이 유비를 찾아 만리길을 떠난다. 관우는 이처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충성과 의리를 지킨 인물이다. 그런 관우가 왜 돈을 가져다준다는 말인가.

관우는 산시 출신이고, 산시 출신의 상인집단인 진상(晉商)은 관우를 숭배했다. 명대 10대 상방 중 진상은 단연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고, 여타 상인들이 진상을 벤치마킹하며 진상의 수호신 관우마저 따라 모셨다. 관우가 원래 가진 좋은 이미지에 돈을 가져다준다는 믿음까지 더해지니 관우는 졸지에 무신(武神)에서 재신(財神)이 된 것이다. 오른손에 청룡언월도, 왼손에 은자를 들고 있는 관우의 상은 매우 얄궂어 보인다.

산시의 지정학적 위치는 진상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명이 원을 북방으로 내몰고 중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몽골군은 여전히 막강했다. 정통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親征)했다가 몽골군에게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포로로 사로잡힌, 이 보기 드문 사건이 ‘토목의 변(土木之變)’이다. 명은 몽골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건축하고 변방 9개 진에 80만 대군을 주둔시켰다. 산시성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최전방으로 중요해졌다.

80만 대군이 소모하는 어마어마한 보급품을 감당하기 위해 명 조정은 상인을 활용했다. 이에 현지의 산시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초기에는 식량 위주로 교역을 시작했지만, 곧 산시의 특산물인 소금, 철, 석탄, 비단 등을 다뤘다. 교역 품목과 범위는 점점 넓어져 진상은 전국적 상인으로 부상한다. 나중에는 국경을 넘어 몽골의 말과 중국의 차를 교역했다. 진상이 성장함에 따라 허베이, 몽골, 닝샤 등 인접 지역의 도시들도 교역 거점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참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지역이면 어디든지 산시 상인이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진상은 유통업뿐만 아니라 금융업, 물류업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진상의 표호(票號, 금융기관)는 예금, 대출, 어음 업무를 수행하는 은행이었다. 청의 도광제는 진상에게 ‘회통천하(匯通天下, 금융망이 천하를 관통한다)’ 편액을 내렸고,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8개국 연합군에게 쫓길 때 진상에게 40만 냥을 빌려 긴급 자금으로 썼다. 진상은 청 조정의 거의 모든 금전 출납을 총괄하며 재무부 기능까지 수행했다.



以義制利 상도덕

진상의 근거지 산시는 중국의 월스트리트였다. 명의 작가 사조제(謝肇淛)는 산시의 번영에 찬사를 보낸다. “아홉 군데의 변방 중에 다퉁 같은 곳도 그 번화함과 풍요로움이 강남 못지않았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이나 집기의 정교함이 다른 변방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산시의 핑야오 고성(平遙古城)은 명의 성벽이 잘 남아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성곽은 둘레 6163m, 면적 2.25㎢로, 한족 고성의 전통미를 뽐내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 지역을 더욱 빛내주는 것 역시 진상의 유산이다. 중국 최초의 표호인 일승창(日昇昌)을 위시해 많은 표호, 표국(票國, 운송기관)이 핑야오의 역사와 개성을 자랑한다. 교가대원에서 그 유명한 영화 ‘홍등(紅燈)’을 촬영한 이래 핑야오는 매우 인기 높은 사극·방송 촬영지가 됐다.

진상의 상도덕은 매우 윤리적이다. 진상은 진문공의 근검절약과 관우의 의리를 상도덕으로 승화시켰다. 척박한 환경은 강인한 생활력과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줬다. 잔머리를 굴리면 단기적인 이익은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이익은 바랄 수 없다. “똑똑한 사람은 작은 장사를 하고, 정직한 사람은 큰 장사를 한다.” 따라서 정도(正道)를 걷고 신용을 지키는 길이 최선이다. 동업자와의 의리, 고객과의 의리를 지켜야 장기적으로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진상은 ‘의로써 이를 제어한다(以義制利)’는 원칙 아래 “성실한 자세로 천하의 인재들을 모으고 의롭게 온 세상의 재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청 조정을 대표하던 진상은 청과 함께 몰락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앞에 청조의 신용도가 급락한 데다가, 서양식 근대 은행이 영업을 시작하자 시대에 뒤떨어진 표호는 쇠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산시의 지역은행은 ‘진상은행(晉商銀行)’으로 진상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오늘날은 황량해 보이는 산시성이지만 아득히 먼 옛날에는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던 땅이었을 것이다. 식물이 탄화한 돌, 즉 석탄이 산시에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석탄 매장량은 1145억t으로 전 세계 매장량의 12.8%이지만, 생산량은 46.9%, 소비량은 50.6%를 차지한다. 특히 산시의 석탄 매장량은 중국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중국은 석탄대국이고, 산시는 석탄대성[煤炭大省]이다.

중국의 에너지원 중 석탄의 비중은 76%로 압도적이다. 중국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것은 석탄이고, 따라서 산시는 중국 경제 발전의 숨은 공신이다. 산시인들은 말한다. “산시로 통하는 길이 막히면 베이징의 고귀하신 분들이 모두 얼어 죽는다.”


GDP 1만 달러의 그림자

그러나 석탄을 둘러싼 정황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산시의 ‘석탄부자(煤老板)’는 권력과의 유착, 무허가 채굴, 잦은 탄광사고, 졸부적 행태 등으로 진상의 후예답지 않게 이미지가 매우 나쁘다. 석탄부자는 탈세를 일삼고, 부동산을 싹쓸이하고, ‘황제의 기운’이 서린 고급차를 사기 위해 베이징까지 간다고 조롱받는다.

2009년 4월 상하이 모터쇼에 19세 여성이 세련된 옷차림과는 안 어울리는 마대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그녀는 주위의 관람객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후 촬영을 마치자 마대 가방에서 수천 위안의 지폐를 꺼내줬다. ‘상하이 모터쇼의 마대녀(麻袋女)’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그녀가 산시 석탄부자의 딸로 밝혀지자 석탄부자의 원체 안 좋은 이미지와 겹쳐 더더욱 공분을 샀다.

악덕 탄광주들의 광부 착취는 역사가 매우 길다. 이미 원나라의 희곡작가 관한경(關漢卿)은 악덕 탄광주를 “쪄도 흐물흐물거리지 않고, 삶아도 익지 않고, 방망이로 쳐도 깨지지 않고, 볶아도 터지지 않는, 동으로 만든 완두콩(銅豌豆)”이라 조소한 바 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사정이다.

석탄부자의 이윤은 원가 절감에서 나온다. 광부의 임금은 턱없이 낮고, 안전시설에 대한 투자도 매우 적다. 그 결과 탄광사고로 매년 2500여 명의 광부가 죽는다. 대형 탄광사고가 연달아 터진 2010년에는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격노해 광산 간부들을 갱내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간부들을 갱 안에 집어넣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전조치를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민중예술가 장젠화(張建華)는 2007년 3월 한 달 동안 산시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움막 같은 숙소에서 20여 명이 함께 살면서 지하 800m의 막장까지 내려가 석탄을 캤다. 그가 베이징에 급한 일이 생겨  탄광을 뜬 사이 매몰사고가 발생해 같은 방을 쓰던 20대 청년이 죽었다. 그러나 이 일은 뉴스에 나지 않았다. 장젠화는 ‘광부 시리즈’를 완성하며 말했다. “해마다 1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 1만 달러를 향해 급성장하는 GDP.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캐낸 석탄으로 중국의 불이 켜진다.”



“이렇게 사는 게 두려워요”

석탄 자체도 문제가 있다. 에너지 효율이 낮을뿐더러 연소될 때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한다. 바다 건너 한국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미세먼지의 주원인은 중국의 석탄 대량 소비다. 산시의 린펀(臨汾)은 세계 최악의 환경오염 도시이자 탄광사고 다발 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2010년 한 미국 매체는 세계 9대 환경오염 도시 중 린펀을 1위로 꼽으며 말했다. “린펀은 막 세탁한 옷을 입더라도 금방 새까맣게 오염될 뿐만 아니라, 하루 정도 지내면 담배 3갑을 피우는 정도의 유독가스를 흡입하게 된다.”

바로 이 린펀에서 환경오염을 고발한 사람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린펀 출신의 아나운서 차이징(柴菁)은 중국의 환경오염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Under the Dome(柴菁霧霾調查)’을 자비로 제작했다. 차이징은 대기오염의 원인을 조사하다가 그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다. 공장을 돌리는 것은 석탄이다. 장쑤성은 30㎢마다 한 개의 발전소가 있고, 상하이는 1㎡당 10kg의 석탄을 쓴다. 1970년대 이후 중국의 폐암 환자는 30년간 465%나 증가했다.

석탄의 대량 소모로 고품질탄은 귀해지고 저품질탄이 많이 사용된다. 저품질탄은 탄화가 덜 돼 태우면 검은 매연이 훨씬 많이 발생한다. 이보다도 못한 저질탄은 발암물질까지 배출한다. 유럽에서는 석탄을 세척한 후 사용하지만, 중국은 세척량이 절반도 안 된다.

차량이 내뿜는 오염물질도 상당하다. 베이징에 오가는 3만 대의 불량 화물차는 엄청난 오염물질을 뿜어댄다. 그러나 당국은 화물차가 베이징 시민의 생계를 쥐고 있기에 은근히 눈감아준다. 화물차의 환경보호장비를 규제하면 물류비가 상승하고 결국 베이징 물가가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해의 악취는 돈의 악취다.

차이징은 다큐멘터리에서 중국 정부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대기오염과 암 발병률의 관계를 알았지만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이런 문제를 수수방관했다고 고발했다. 중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환경오염 관계단체만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단체의 요건을 충족하려면 5년 이상 환경보호사업을 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통제와 관여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결국 중국 환경오염은 정치, 경제, 사회제도, 사법기관 등이 모두 얽히고설킨 총체적 문제다.

중국 정부가 당돌한 문제 제기를 허용할 리 없다. 차이징의 다큐멘터리는 발표된 지 이틀 만에 1억50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곧바로 삭제됐다.

중국 정부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고 말한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사실상 인민은 그저 정부가 베풀어주는 봉사를 받기만 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주체적으로 권리를 요구할 자격 같은 건 없다. 매사에 투명함이 없는 정부는 석탄처럼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다. 차이징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이 새삼스럽게 심금을 울린다.

“사실 저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사는 게 두려워요.”



광업에서 관광업으로

중국 정부는 의뭉스럽긴 해도 바보는 아니어서 그 나름대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개시했다. 가정의 개별난방을 중앙난방으로 바꿔 석탄을 쓰더라도 오염을 한결 덜 발생하게 했다. 아직 미흡하지만 환경오염 규제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중국의 변화에 발맞춰 산시 역시 상당히 변했다. 전에는 산시성 전체가 탄광촌이다시피 했지만 이제 웬만한 곳에서는 석탄과 관련된 것을 보기 힘들다. 다퉁시는 시내 중심에 있던 석탄 작업장을 없애고 가짜 옛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시안과 핑야오가 옛 모습을 잘 보존해서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는 것을 보고, 아예 성벽과 옛 거리를 새로 만드는 중이다. 광업에서 관광업으로 산업의 중심을 옮기려는 산시의 염원이 읽힌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1/5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북방 선비의 기풍 탐욕 앞에 흔들리다

댓글 창 닫기

2021/03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