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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다들 내가 대통령 해야 한다는데…”(전두환)

신군부 ‘집권플랜’ 1980년 벽두부터 가동

  •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다들 내가 대통령 해야 한다는데…”(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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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보안사 여론조사→창당 자금→중정부장서리→5·17
  • ● JP가 야당 편들자 군부, “새 대통령 후보 찾아라”
  • ● 보안사 비밀 여론조사…‘전두환 대통령’ 압도적
  • ● ‘창당 자금 180억’ 메모지 허화평에 전달
  • ● 풍운아 허문도, 일본 기자들에게 ‘언론 공작’
부마항쟁과 10·26, 12·12사건이 수습되고 1980년 새해가 밝았다.

군부는 1월부터 최규하 대통령 이후의 정권 향방에 관심을 보였다. 긴급조치 9호 위반자와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이 이뤄지자 재야 세력은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며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복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가두시위가 잇따랐다. 김대중(DJ) 씨가 이끄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이 5월 22일을 시한으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등 극한 대립구도가 형성됐다.

결국 군부가 개입해 5·17 계엄확대조치를 실시하면서 DJ 등 재야 세력을 체포했다. 유신정권의 부정축재자들도 구속했다. 다음 날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DJ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5·18이 발생했고, 3개월 후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을 열었다. 필자도 이 드라마틱한 과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비운의 특전사 보안반장

1979년 12·12사건으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보안사령부에 연행된 다음 날인 12월 13일 대구 50사단장을 하던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에 보직됐다. 그때까지 그의 참모 대부분은 정병주 장군 사람들이었다. 특히 보안사, 계엄사, 중앙정보부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매일 사령관에게 전달되는 비밀 문건 등을 관리할 정보참모가 마땅치 않자 정 사령관은 필자에게 정보 업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정보보좌관 겸직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가능하니 보안사령관에게 건의해 허가를 받아달라고 했다. 특전사를 방문한 전 보안사령관은 필자에게 정보보좌관 업무를 겸직하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정보보좌관 겸직이 혹여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보안처장과 109보안부대장에게도 지시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의 기본 임무 중 하나는 정호용 사령관의 동향을 매일 보안사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 내용 대부분이 보안사령관(전두환)과 관련된 동향이어서, 이런 고급 정보가 장병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 의견을 전했더니 전 보안사령관은 “정 사령관에 관한 일일 보고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필자는 신임 노태우 보안사령관으로부터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다. 정 사령관에 대한 일일 정보보고를 안 했다는 이유로 ‘업무 태만’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6개월간 하지 않던 동향보고를 3일 만에 180건을 작성해 보고했는데, 이로 인해 노태우 사령관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리고 특전사령관의 정보보좌관 임무를 수행한 것은 1980년 말 강제전역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허삼수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은 1980년 말 필자가 중령으로 진급하자 노 보안사령관에게 사실과 다르게 필자가 ‘(인민군)부역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강제 예편시키라고 했다. 허 비서관은 필자가 전역한 지 2주 만에 자신이 관장하는 특수수사대로 필자를 연행해 구금하려다 불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하자 풀어줬다. 이 일을 겪은 후 필자는 미국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김재규를 살려내려는 군내 김재규 계열 장군들이 12·12를 통해 제거된 후 새해를 맞았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최규하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 정부가 끝난 후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지에 쏠렸다. 김종필(JP) 공화당 총재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되는 가운데 DJ가 재야 인사들과 함께 정치를 재개하면서 김영삼(YS) 씨와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었다.

최 대통령이 취임한 후 JP는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하던 DJ에 동조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여당이 아니고 야당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 그러자 군부 내에서 JP가 차기 대통령감이 못 된다는 비판이 대두됐다. JP를 비롯한 이후락, 박종규 등 유신정권의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일었다. JP 대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전두환 집권 위한 여론조사

군부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0·26을 수습했으니 자신의 말대로 군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현실 정치에 뛰어들 것이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보안사 전체 장교들을 대상으로 이와 관련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필자는 ‘전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돼선 안 되고, 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조사 결과 ‘전 사령관이 군에 복귀하지 말고 차기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보안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필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필자는 사령관실로 불려갔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전두환 전 보안 부대원들이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데, 김 소령만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네. 그 이유가 뭐요?

필자 사령관님께서 복귀하지 않고 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다면 사람들은 최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JP, YS, DJ 등 대통령이 되려고 오랜 세월 준비해온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순리대로 풀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후일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이번 기회는 포기하고 군으로 돌아가셔서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도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면 국민이 ‘전두환 장군이 나와야 한다’며 나설 겁니다. 10·26사건 조사를 통해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국민도 알게 됐으니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이 되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전두환 정호용 장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소?

필자 이것은 보안부대 내부 여론조사라 제 개인 생각을 보고한 겁니다. 정호용 장군은 이번 여론조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전두환 그래, 잘 알겠소. 근무 잘하시오.

전 사령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그의 대권욕이 확고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정치적 혼란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해 혼란을 수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떻게 집권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후환이 따른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12·12를 일으킨 허씨들(허삼수, 허화평)과 합동수사본부 요원들, 그리고 ‘하나회’ 회원들 간에는 전 사령관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묵시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필자는 정국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과 주변 추종자들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DJ와 재야 정치권의 투쟁

재야 반체제 인사들 중에는 김재규를 옹호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김재규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공공연하게 평가했고, DJ와 그 추종세력은 유신헌법 폐기와 차기 대통령선거를 위한 정치 일정을 공개하라며 적극적인 공개 투쟁을 전개했다.

1979년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헌법에 따라 3개월 안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헌법 개정 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재야에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 유신헌법 즉각 폐지, 거국내각 구성, 조기 총선 실시를 요구했다. 11월 13일 신민당 총재인 YS가 이를 지지하고, 여당인 공화당 총재 JP도 이에 가담하자 군부에서는 JP의 ‘배신 행위’를 규탄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8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위반자 68명의 형 집행을 면제했다.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1978년 12월부터 가택연금 중이던 DJ가 이 조치에 따라 풀려났다. 아울러 재야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최 대통령이 1980년 2월 29일 DJ 등 시국사범 687명을 복권 조치하자 정국은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국회는 1979년 11월 26일 개헌특위를 설치하고 국회 주도의 헌법 개정을 추진했고, 공화·신민 양당은 1980년 2월 9일 직선 대통령중심제, 4년 임기의 1차 중임제 헌법 시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무분별한 정치 과열 현상을 용납할 수 없다”고 정치권에 경고했다. 신민당은 1980년 3월 15일 민주화촉진대회를 열어 정부의 헌법 개정 심의기구를 해체하라고 촉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중대 결단을 하겠다며 계엄사령부를 압박했다. 재야 세력을 대표하는 DJ는 민주화투쟁을 선포하는 한편 “정부가 유신 세력을 주축으로 신당을 구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 대통령은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 “애국적 견지에서 자제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자”고 당부했다. 그리고 10·26사건 이후 중지된 중앙정보부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 전두환 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해 국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확보해줬다.

DJ는 이런 기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 순회 연설에 나섰다. 4월 29일에는 DJ가 주도하는 ‘국민연합’이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포한 뒤 반정부 장외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 중순 그 세력이 전국적으로 10만 명을 넘어서자, 5월 22일을 기해 정국을 뒤엎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자 기회를 엿보던 군부는 1980년 5월 17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발표하고 DJ를 포함한 재야 인사들과 여권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다음 날 광주에서 DJ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5·18이 터지게 된다.


창당 후원금 180억

12·12사건이 일어날 때만 해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이 되려는 의도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1980년에 들어서면서 JP가 DJ 편을 들며 유신헌법을 부정하자 군부 내에서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됐다. 신당을 만들어 JP의 대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1980년 2월 초 정호용 사령관이 “전 보안사령관이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자금이 필요한 것 같더라.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필자가 “전 사령관이 정치를 하려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는 것이 좋고, 창당 자금도 중앙정보부 자금을 활용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더니 “그래요? 그 문제는 얘기해보겠다”고 했다. 필자는 “자금을 알아보긴 하겠지만, 내가 이야기한 후 자금을 대겠다는 분들이 정 사령관과 직접 대화를 해야 성사될 것 같으니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사실 이 대화를 하기 전, 훗날 국회의원이 된 H씨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출신의 P씨를 정 사령관에게 소개해 함께 식사하면서 창당과 관련한 얘기를 나눈 터였다. 중견기업인인 J 회장과 P 대표와도 저녁식사를 하면서 비슷한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후원금을 낼 의사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며칠 후 P씨는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100억 원을 후원하겠다”고 했고, J 회장은 50억 원, 친구인 P 대표는 30억 원의 후원금을 내겠다고 했다. 필자는 이 내용을 정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다음 날 아침 그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러 갈 때 후원자들의 인적 사항과 연락처, 그리고 후원 금액을 정리한 메모지를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이 메모지는 전 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자금이 안 쓰이게 될 경우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니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특히 전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전 허화평 비서실장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하게 될 경우 외부 자금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박모 씨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빌딩을 팔아 80억 원 상당의 정치자금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유의하시고….”

그런데 정 사령관은 보안사령부에 가서 여러 일을 보다가 필자의 당부를 잊고 180억 헌금 메모지를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주면서 “자금이 필요하면 이분들에게 연락해 활용하라”고 말한 뒤 특전사로 귀대했다. 필자는 그 얘기를 듣고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허 비서실장 등 ‘허씨’들은 정 장군이 전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거나 그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필자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돕겠다는 사람을 범죄자로…”

3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P씨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허 비서실장이 내게 ‘내일 아침 10시 이전에 한국을 떠나라, 그 시간 이후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체포하겠다’고 한다. 지금 특전사로 갈 테니 정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

필자는 즉각 이를 정호용 장군에게 보고하면서 “우리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분을 범죄자로 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정 사령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잡음을 막으려면 허 비서실장의 말대로 출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는 허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P씨는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냐”고 화를 내면서 다음 날 아침 7시 서울 한남동 소재 국일관에서 정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보고 과정에 문제가 생겼고, 심각한 오해가 생겨 난처하게 된 것 같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 보안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 비서실장이 정 사령관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일화는 5공 세력이 1980년 2월 창당하려고 준비한 것이 분명함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전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정치공작’이 시작됐다는 증거다. 이 사건 이후 창당 자금 후원 얘기는 잠잠해졌지만, 5공 군부 세력의 집권 공작과 창당 작업은 계속됐다. 1981년 초 5공 군부에 의한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과 그 2중대인 민주한국당(민한당) 창당은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에 의해 주도된 부끄러운 역사다.  

10·26사건으로 위축된 중앙정보부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의 도발이 우려되고 재야 세력의 반정부 활동이 격렬해지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중정 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최 대통령은 1980년 4월 14일 전 보안사령관에게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하게 했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1980년 2월 필자가 정 사령관에게 전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하는 게 좋다고 말한 것이 전달됐고, 3월 한 달 동안 노력한 결과 겸임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전 사령관은 북한 관련 정보는 물론 국내외 정치·경제·사회 문제 전반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고, 이를 조정하고 수사까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허문도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할 때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있으니 바로 허문도 중정부장서리 비서실장이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일본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일본영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했다. 보안사 인사처장인 허삼수 대령, 수경사 33대대장 김진영 대령과 부산고 동기생으로, 이들의 추천으로 중정부장 비서실장에 발탁된 후 ‘스리 허’의 한 사람으로 허화평과 허삼수에 버금가는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필자가 처음 그를 대면한 것은 1980년 4월 중순경이다. 정호용 사령관에게 보직 인사를 왔을 때였는데, 그는 자신이 썼다는 ‘창조적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정 장군에게 건넸다. 언론인 출신이지만 전두환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은 군 출신 인사들보다 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의 첫인상은 매우 당돌해 보였고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1주일 뒤 정 장군을 다시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언론 통폐합안을 브리핑하고 조언을 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 장군은 “김충립 소령이 보안사에서 정보를 오래 맡은 사람이니 같이 듣고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필자도 언론 통폐합안 브리핑을 함께 듣게 됐다.

그는 자신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대한민국 언론을 개혁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등의 외신기자를 초대해 전두환 사령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인데, 앞으로 외신기자들을 특전사에 데려올 계획이니 잘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한 시간 남짓한 브리핑을 듣고 난 정 사령관은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필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언론 개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언론기관이 너무 많고 기자들의 횡포가 심해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 개혁은 민주주의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은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저해한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특히 한 도(道)에 하나의 신문만 허용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최소 둘은 돼야 서로 견제하며 보도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 XX가 헛소리하고 있어”

정 사령관은 “언론 통폐합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니 시간을 갖고 보완하는 것이 좋겠소. 김 소령(필자)은 정보장교 경험도 많으니 같이 의논해 새로운 안을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제안했다. 이에 허 비서실장은 “지금 바로 의논하자“고 해 차를 함께 타고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하자 허 실장이 “커피숍에서 좀 기다리면 방을 준비하고 연락하겠다”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프라자호텔에 있습니다. 정 장군 지시로 허 비서실장과 언론 통폐합안을 의논하려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이 XX가 헛소리하고 있네. 너는 누구 부하야? 그리고 정 사령관은 언론법에 관여할 자격이 없어. 당장 부대로 돌아가! 그러지 않으면 근무지 이탈로 체포하겠어” 하고 호통을 쳤다.

필자는 그제야 허삼수와 허문도가 이 호텔에서 함께 언론 통폐합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언론 통폐합을 5공 핵심 인사들이 주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특전사에 복귀해 정 장군에게 “언론 통폐합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또한 허씨들이 정 장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정 장군이 12·12사건에 직접 가담한 사람이 아니고, 전두환 사령관과 밀접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의 견제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허씨들이 진행하려던 언론 통폐합 건은 정 장군의 반대로 6개월간 끌다가 1980년 11월 실행됐다. 내용 대부분에 허 비서실장의 원안을 반영했고,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 발전이 20년쯤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자 1000여 명이 강제 해직됐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88년 11월 국회 문화공보위원회 언론 통폐합 관련 청문회가 시작됐다. 언론 통폐합을 누가 주도했는지를 놓고 1주일 정도 갑론을박을 하고 있을 때,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필자는 민주당 김동영 의원에게 “귀국해서 청문회에 나가 누가 언론 통폐합안을 만들었는지 증언하겠다”고 제의하고는 청문회 증인으로 나갔다. 청문회 마지막 날 저녁 정대철 위원장의 요청으로 필자는 참고인으로 출석했고. 허화평·허삼수·허문도·이학봉 등 증인들 앞에서 “언론 통폐합은 허문도 씨가 주도했고, 정 사령관은 이에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全 대통령 만들기’ 해외공작

언론 통폐합 외에 허문도 비서실장언의 또 다른 과제는 자신이 일본특파원으로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일본 언론인들을 초청해 신군부의 동정을 알리고, 전두환 사령관을 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일본 기자들을 특전사로 초청해 한국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홍보할 때 필자도 동석했다. 허 비서실장은 전 사령관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분이라 군부는 물론 일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일본 언론에 전 사령관에 대한 기사가 실리더니, 곧 “대한민국 다음 대통령은 전 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 신문은 “일본 언론은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며 인용 보도했다.

차기 대통령 관련 보도는 허 비서실장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문화공보위원을 거쳐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토통일부 장관을 지낸다. 오랜 기간 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허화평·허삼수 대령은 1980년 청와대에 입성해 각각 정무수석, 사정수석비서관으로 일하다 1982년 말 청와대에서 밀려났지만, 허문도 비서실장은 5공화국 7년 내내 중책을 맡은 핵심 인사로 전두환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언론 통폐합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수많은 언론인을 강제 해직당하게 한 과오를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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